199화
산모의 휴식을 위해 짧은 만남을 마치고 나온 지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치유 능력자 카리나를 떠올렸다. 그닥 내키지 않는 각인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카리나에게 각인을 해 줘 다행이었다.
엠마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카리나 덕분이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능력자라고 출산이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능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서 가이딩으로 산통을 덜어 줄 수도 없었다.
지금이야 엠마도 아이도 멀쩡한 얼굴로 행복하게 웃지만, 막상 출산의 과정은 전쟁 같았다고 들었다. 위험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치유 능력자에게 빚을 졌네…….”
악시온은 작은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지안의 내심을 짚어냈다.
“그녀를 풀어 줄 셈인가?”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엠마에게 도움을 준 치유 능력자를 이대로 감옥에 가둬 둘 순 없었다. 그녀가 무슨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나. 카리나도 이제 그녀가 원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처음부터 황족들이 유폐된 섬으로 떠나겠다고 거듭 호소한 사람인걸요. 더는 붙잡을 명분도 이유도 없어요. 이멜다 에를랑겐을 찾아 나서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니……. 이 이상 붙잡아 두는 건 억압이겠죠.”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이멜다를 잠시 떠올린 지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군대가 주둔하던 곳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 황태후를 발견했을 때, 이미 이멜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다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무려 황후씩이나 되었다가 그 지위를 잃게 되지 않았나.
하지만 이런 생각 모두 다 쓸데없는 오지랖일 것이다. 그토록 당차고 무서운 여자라면 어디서든 잘 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흐릿한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싸리눈이 쏟아져 내렸다. 허공을 올려다본 일리아스가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별일이군. 제도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는데.”
일리아스의 말대로 황성 사람들 모두 오랜만에 눈을 본다는 듯 들떠 있었다. 다들 들뜬 얼굴로 복도의 창가에 모여들었다.
흩날리는 눈발에 시선을 빼앗긴 하녀 하나가 소리쳤다.
“얘들아 이것 봐! 눈 온다!”
“얘도 참. 눈이 오면 오는 거지.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뭘 모르네.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런 풍경을 보겠어?”
재잘거리는 하녀들의 말을 듣던 지안은 저도 모르게 웃다가, 오래전 자신에게도 비슷한 추억이 있었음을 떠올려 냈다.
라영 언니의 성화에 마지못해 제주도행 비행기를 끊고, 계획에도 없던 한라산에 오르게 되었던 2월 초입. 하얗게 눈이 쌓인 백록담을 앞두고 탄성을 터뜨리던 언니의 뒷모습이 찰나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안아 이것 봐! 눈 온다!’
‘언니도 참. 눈이 오면 오는 거지. 왜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뭘 모르네.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런 풍경을 보겠어?’
눈 쌓인 설경을 배경으로 함께 숨을 고르던 그 날에도 딱 이런 싸리눈이 내렸다.
‘아아. 이제 나랑 매칭률 맞는 가이드만 찾으면 완벽한데…… 어디서 짠하고 안 나타나 주려나…….’
‘꿈 깨요, 언니.’
‘꿈 깨라니 너무하다. 너 진짜 잿가루 좀 그만 뿌려. 상상은 자유잖아. 혹시 알아? 날 구해 줄 제주도민 시골 가이드가 짜잔 하고 나타날지!’
‘……’
‘그리고 어쩌면, 폭주 직전의 에스퍼가 네 앞에도 기적처럼 나타날지 모를 일이잖아.’
‘폭주 직전의 에스퍼라니…… 너무 위험한 거 아녜요? 살아 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잖아요.’
‘알아. 안다고. 나라고 그걸 모르겠어? 내 말은, 운명 같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단 거지. 여기 좀 둘러 봐. 그런 걸 꿈꿔 볼 만한 풍경이잖아.’
그즈음의 언니는 진통제를 밥처럼 달고 살았다. 헛된 희망을 이야기하던 씁쓸한 얼굴을 떠올리며, 지안은 흩날리는 눈을 잡으려 두 손을 뻗었다.
우연처럼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난 몰라도 넌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나중에 매칭률 나오는 에스퍼 나타나면…… 잘 대해 줘.’
입버릇처럼 하던 그 말. 네게 매칭되는 에스퍼가 나타나면 잘 대해 달라던 그 말은 번번이 가이딩을 거부당했던 스스로의 처지에 절망해 나온 것이었을 터다.
과거, 눈 쌓인 한라산의 정상에선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다.
“그럴 거예요.”
제가 얼마나 이곳의 능력자들을 사랑하는지 알면, 언니도 깜짝 놀랄걸요.
이젠 전해지지도 않을 마음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찰나, 지안의 어깨 위로 악시온의 손이 닿아 왔다.
“지안.”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보니 그새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지안은 열없이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문을 흐리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잔뜩 긴장했다. 지안이 무언가를 강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아득한 슬픔과 상실감에 절로 피가 말랐다. 잠자코 있던 일리아스마저 악시온의 창백한 기색에 덩달아 긴장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서 지안은 곧장 활짝 웃어 보였다. 마침 이럴 때 꺼내기 딱 좋은 화제가 있었다.
“그보다 시온. 우리 결혼식 말인데요. 옷은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흔들리던 악시온의 동공이 옅게 팽창했다. 원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진지하게 착장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작게 웃었다.
정말이지 화제를 돌리는데 이 말만큼 효과 좋은 말이 없었다. 어떤 상황이건, ‘우리 결혼식 말인데요.’ 하며 말문을 열면 쉽게 상황이 종료되어 버렸다. 뒤에 가져다 붙일 질문도 무궁무진했다. 꽃은 뭐가 좋을까요?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구두는? 부케는?
그런 식이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둘이 같이 있어서인지, 고민은 시온에게 넘기고 일리아스가 버티고 섰다. 질문에 넘어가지 않은 그가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지구가 그립나?”
기습적인 질문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어. 음.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지안의 말에 두 남자의 심장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쿵 떨어졌다. 악시온은 비난 어린 시선으로 일리아스를 노려본 다음, 서둘러 지안을 달랬다.
“내가 더 노력하겠다.”
“나도 뭐든 할게. 더는 그곳이 그립지 않도록 만들어 줄게.”
애타 하는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기껏 화제를 돌렸는데 하필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안해할 줄 알았다면 지구 따위 생각도 안 난다고 대답했을 텐데…….
잔잔한 호수에 벼락이라도 내린 것처럼 요동치는 파장에 지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정해요.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거창하게 사기극까지 벌였는데 제가 거길 어떻게 돌아가요. 게다가 우리 결혼식 준비도 하고 있잖아요.”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그 말에 가까스로 진정했다. 지안은 부러 서운한 척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 대공비 전하 시켜 준다면서요. 아직 결혼식만 안 올렸지, 우리 이미 부부인 거 아니었어요? 여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니, 아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다급히 대답한 악시온은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지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뭐예요?”
“대대로 북부의 안주인이 지니는 가문의 창고 열쇠다. 오늘부로 그대의 것이다. 원하는 건 뭐든 해도 좋다. 그대가 무얼 하든 절대 말리지도 관여하지도 않겠다.”
그 말에 난처해진 것도 잠시, 이번엔 일리아스가 경쟁하듯 나섰다.
“내게 배정된 황실 예산을 모두 네 앞으로 돌릴게.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도 모두 네가 운용할 수 있도록…….”
진정하기 무섭게 환심을 사려 경쟁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지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제 와 필요 없다고 거절하기도 우습고……. 거절해 봤자 불안감만 더 높일 것 같았다.
그래서 지안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
그대로 일리아스의 턱을 잡아당겨 비스듬히 입을 맞춘 지안은, 그의 입술 안으로 불쑥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강하게 기운을 밀어 넣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이딩에 일리아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지안의 입술이 떨어진 뒤였다. 지안은 공평하게 악시온에게도 한 차례 깊고 진하게 입을 맞춰 준 다음,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 다 목소리 좀 낮춰요. 저랑 약속한 거 잊었어요? 바깥에선 이런 경쟁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 말대로 한참 눈 구경을 하던 하녀들이 부러운 얼굴로 그들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쟁이 어디 자제가 되는 것이던가.
그럼에도 짐짓 부끄러워하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눈을 굴리며 애처로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제하겠다.”
“난 못 해.”
숫제 당당한 말에 지안의 눈썹이 이마로 치솟았다. 그 기세에 일리아스는 잠시 찔끔하더니 곧 뻔뻔스레 요구해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여태 한 번도 안 해 줬잖아. 매번 나만 널 사랑해. 넌 나를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고.”
한풀 꺾인 목소리로 투정해 오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각인해 줬잖아요.”
“그건 나 말고도 모두 다 받은 거잖아.”
“그래서 서운했어요?”
“……그래.”
“이미 특별하시면서. 요구사항이 너무 많으시네. 각성자 협회에서 안 가르쳐 줬어요? 전담 가이드가 에스퍼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간접적인 고백에 일리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안은 그와 눈을 맞추며 이어 말했다.
“아직도 부족해요?”
의심의 여지 없는 애정 어린 시선에 일리아스는 탄식 같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빙긋 웃은 지안은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가운데에 선 채 욕심껏 두 팔을 벌렸다.
“사랑해요. 항상. 늘 그래 왔어요.”
자칫 듣고 지나칠 만큼 조그만 속삭임이었으나, 두 사람에겐 천둥보다 더 큰 소리였다. 우레와 같은 환희가 손끝을 떨리게 만들었다.
“내 에스퍼니까.”
처음으로 드러낸 지안의 소유욕에 감격한 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지안의 허리와 어깨에 팔이 감겼다. 지안 역시 악시온의 목에, 일리아스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치듯 둘렀다.
한데 엉겨 안은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싸리눈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