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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197/199)

198화

“그랬는데, 이븐이 각인을 받은 능력자들을 위해 얼굴이라도 비춰달라고 해서요. 이비엔도 그걸 바랐고……. 그리고 이미 퍼레이드에 걸맞게 드레스도 새로 차려입었는걸요.”

볼을 긁적이며 답하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지금 지안의 차림이 시가행진을 염두에 두고 준비된 건 사실이었다. 지안을 위해 만류하고 있으나, 이 일로 지안의 명성 또한 더욱 높아질 것도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있어서 결국 말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막상 지금 모습을 보니 그 결정을 뒤엎고 싶어졌다. 이런 제 기분도 모르고 지안은 멋쩍게 악시온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저 이상하진 않죠?”

“이제껏 본 어떤 이들보다도 가장 아름답다.”

악시온은 부드럽게 대답하며 지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말대로, 즉위식에 맞춰 지어진 드레스를 차려입은 지안은 실로 에다의 성녀란 칭호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이비엔이 자신의 즉위식 제복마저 뒤로 한 채 지안의 치장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손톱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어느 한 군데 다듬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촘촘한 다이아몬드와 작은 진주로 장식된 지안의 살결 위로 은은한 광채가 흘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악시온 또한 지안을 모두에게 선보이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지안을 방 안에 가둬 두고 홀로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찾아들어 억누르기 어려웠다.

일리아스는 악시온의 눈빛을 보고서 자신과 그의 사정이 같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렴,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안에게 반하는 능력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기회를 틈타, 벌써 수십 번도 더 한 설득을 그는 다시 한번 꺼냈다.

“이비엔이 마법 약으로 네 행세를 했을 때, 바람의 능력자가 부린 행패로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어. 이비엔이야 능력자 특유의 치유력 덕에 얼굴에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지만, 넌 달라. 위험하니 시가행진 참여는 지금이라도 취소를….”

“염려 마세요! 제가 호위하는 이상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리고 폐하와 성녀님을 뵈려고 다들 몰려들었는걸요. 모두 얼마나 기대하고 있겠어요. 안 그래요, 성녀님?”

“이븐의 말이 맞다. 설령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바로 뒤에 있겠다.”

재빠른 이븐의 훼방에 더해 악시온마저 태세를 바꾸며 말을 거들자 일리아스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지안은 달래듯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리아스. 오늘 즉위식으로 능력자들 모두가 몹시 고양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발현 후 사교계의 주류세력에서 대놓고 배척당했던 황녀 전하가 황제 폐하가 된 거잖아요. 이비엔이 그랬어요.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걸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장차 능력자들의 처우가 달라질 거라는 메세지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다고요. 제가 곁에 있으면 더 안심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기어코 가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사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쉬워하는 일리아스를 보다 못한 이븐이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거참. 행진에 참석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뒤에서 따라올 거면서 되게 말 많네…….”

그 혼잣말에 발끈한 것도 잠시, 일리아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때맞춰 모든 예식이 끝나고 마차가 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안은 절차에 따라 손을 뻗어 오는 이비엔의 손을 맞잡은 뒤,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따라 융단을 걸었다.

“긴장했어?”

“별로요. 그보단 황관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 반하겠어요. 예복도 너무 멋있고요.”

“그런 표현은 좀 참아 줘. 오라버니가 날 질투한단 말야. 봐, 지금도. 말은 안 하지만 공작도 날 보는 눈이 요즘 들어 예사롭지 않아. 경쟁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본다니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지안의 긴장을 완화시킨 이비엔이 말했다.

“행진 도중에 누가 이능을 써도 너무 놀라진 마.”

“흐음? 뭐예요? 저한테 뭔가 숨기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곧 알게 될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지안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오래 궁금해 할 수는 없었다.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시가행진을 위해 제작된 입석 마차라,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손잡이를 잘 잡고 있어야 했다. 마차의 뒤로는 삼황자와 공작이 각각 말을 타고 뒤를 호위했다.

이윽고 천천히 황성의 성문이 열리며 행진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높이 깃발을 들었고, 군악단이 북을 치며 나팔을 불었다. 즉위식에 이은 본격적인 국가 행사다운 면모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도 잠시, 마차가 제도의 대로를 향해 매끄럽게 나아갔다.

와아―!!

행렬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앞에는 장관이라 불릴 법한 광경이 펼쳐졌다. 파장으로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황성의 입구에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대부분은 능력자였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아름 꽃바구니를 든 채였다.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꽃잎과 기다렸단 듯 터져 나오는 함성. 하나같이 선망과 애정이 넘실거리는 눈길에 지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처음 각성했던 날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모두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그 날로.

무섭도록 치솟는 아찔한 고양감과 함께, 지안은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관심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도 잠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침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성녀님! 저 상단에 취직했어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부자가 돼서 만나러 갈 테니까!”

“저 이젠 남들처럼 멀쩡한 집에서 삽니다! 더는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 걱정 없이요!”

“성녀님! 저도 이젠 친구 있어요!”

“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성녀님 덕분에 빨래터의 인기인이 됐어요! 저 세탁소를 차리려구요!”

모두 미래에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대한 현재의 대답이었다.

사람을 사귀었다. 용병 생활을 청산했다. 땅을 사서 포도나무를 심고 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던 능력자들 모두, 이젠 해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어린아이가, 소년과 소녀가,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릴레이를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으로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했어요!”

“저도요. 하루가 지나는 게 더는 두렵지 않아요!”

능력자들의 연이은 외침에, 지안은 격정에 사로잡힌 채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행진 내내 웃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을 전부 내버려 두고 기를 쓰며 지구로 돌아가려 했다니. 그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막 눈물이 흐르려던 순간, 대로 양옆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커다란 물 양동이에서 세차게 물줄기가 쏘아 올려졌다.

펑, 퍼엉.

정확히 양쪽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나뉘어진 물줄기가 양동이와 양동이를 옮겨 다니며 마차를 감쌌다.

일전에 힉스로 가던 중, 어느 물 능력자가 광장에서 선보이던 것과 똑같은 분수 쇼였다. 다만 그때와 달리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건대, 한 명의 이능력자가 아닌 여러 이능력자들이 합을 맞춰서 선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요란한 물소리와 허공을 장식하는 물안개에 지안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 아까 이비엔이 건넸던 의미 모를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행렬을 감싼 쇼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물 양동이가 준비된 구간이 끝나자, 이번엔 바람의 이능력자들이 나서서 리본과 종이를 날리기 시작했다. 색색의 종잇조각들이 반짝이며 하늘을 날았다.

“세상에….”

이능력자들이 각종 행사에 나와서 힘을 과시하는 영상은 심심찮게 봐 왔지만, 이 정도로 장엄한 건 처음이었다. 퍼레이드가 지나갈 거리에 미리 씨앗을 심어둔 건지, 지나가는 타이밍에 딱 맞춰 꽃이 피어나는 길목도 있었다.

수많은 볼거리에 눈이 쉴 틈이 없었다. 지안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비엔은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모두 너를 위해 준비된 거야.”

“저 정말 놀랐어요.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런데 이건 폐하의 즉위식 기념 행진인데, 이래도 돼요?”

“당연하지. 전부 내가 직접 승인한 일인걸.”

짓궂게 웃어 보인 이비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안의 손을 번쩍 잡아 올렸다.

“와아아아―!”

그러자 기다렸단 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가슴 한가득 벅차오르는 고양감에 지안은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인파의 뒤쪽, 아주 멀리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에서 언뜻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일순 지안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 듯도 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뒤이어 지안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날아올랐다.

* * *

이비엔의 즉위 이후, 제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알레인은 폐위당한 채 변방에 유폐되었고, 능력자들로 인한 사건 사고도 완전히 사라졌다.

새로운 치세 아래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한 건 능력자들의 처우였다. 폭주의 고통으로 인해 성격 더러운 놈들이란 오해를 곧잘 받곤 했던 이들에게 드디어 여유란 것이 생긴 것이다.

더는 아프지 않으니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지 않게 되었고, 이능 제어에 실패해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해를 가하게 되는 일도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오래된 차별과 배척은 금세 힘을 잃었다.

능력자들은 더 이상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위험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힘은 더없이 유익했고, 마법사들을 상회할 만큼 유용했다.

하지만 이런 단적인 변화보다 더 지안의 관심을 산 건, 단연 엠마의 출산이었다. 아이를 배 속에 품은 채 폭주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던 그녀가 무사히 산달을 채우고 아이를 낳은 것이다.

지안은 꼼질거리는 조그만 손가락을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작고 예뻐요.”

흠뻑 홀린 것 같은 지안의 모습에 엠마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기가 이뻐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얼른 결혼하셔야겠어요. 두 분 대공 전하께서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시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렇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결혼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출산으로 쉬고 있는 처지지만 명색이 전속 시녀인데, 그 정도는 저도 알아야죠.”

“폐하가 도와줘서 순조로워요. 이븐도 있고요. 그리고 황성에 시녀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몸조리에만 열중해요, 엠마.”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어디 안심이 돼야 말이죠. 제가 쉬는 사이에 전속 시녀직을 다른 사람이 꿰차면 어떡해요?”

“아이참, 그럴 일 없어요.”

“정말이시죠? 성녀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에요.”

활짝 웃어 보인 엠마는 지안의 뒤편에 선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다시 뵐 땐 대공비 전하라고 불러야겠네요.”

타박할 수 없는 아부성 발언에 지안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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