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6/199)

197화

‘날 비난하는 거냐? 나는 티타니아가 누구보다 완벽한 인생을 살기를 바랐을 뿐이다.’

‘완벽? 어머니의 계획이 티타니아를 옥죄었단 걸 왜 아직도 모르십니까?’

‘그 계획이 오늘날 너를 황제로 만들었다. 그런 나를 비난하는 거냐? 널 제위에 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나를?’

‘네, 그러셨지요. 황좌를 위해 제가 소중히 여긴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다 손수 짓밟아 버리셨지요. 이를 모조리 목격한 제가, 어찌 그 노고를 모르겠습니까? 기어코 소원을 이루신 걸 축하드립니다.’

‘카디스!’

‘오늘 밤 이후로 모든 알현을 거절합니다. 다시는 절 찾지 마십시오. 이제 더는 그러실 수도 없으시겠지만.’

분노에 차 이죽거리던 음성이 귓전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와 같은 패배감이 짙게 밀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이멜다에게 묻고 싶었다.

직접 치유 능력자 행세를 할 정도로 그 애가 그렇게 소중했느냐?

차마 나오지 않는 질문을 삼키며 알테어즈는 깊이 후회했다. 그리고 내내 입을 열지 않은 이멜다의 심정을 비참히 되짚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달리 행동했을 것이다. 이멜다를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네 행방을 찾아내어 추락한 황실의 명예를 바로잡으려 했는데…….”

이제 와서는 모두 무의미해진 말이었다. 아들이었던 전 황제도, 티타니아만큼이나 소중한 딸이었던 이멜다도 모두 제 손 사이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알테어즈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사이, 황제가 포로로 사로잡혔다는 소식은 걷잡을 수 없이 군영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

제도로 행군해 오던 군대는 허무하게 와해되고 말았다.

지휘관들은 흔들리는 군기를 바로잡아 보려 했으나 애초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전술에 능한 병사도, 용맹하기로 정평이 난 기사도, 한 꺼풀 벗겨보면 비슷비슷한 속사정을 가진 한 명의 사람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제도에 무슨 일이 닥쳐오는지 까맣게 모른 채 동부행에 동원된 피해자였다.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어서, 다들 대놓고 드러내지만 못했을 뿐, 병사들 사이에서 알레인에 대한 반감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에 반해 제도를 구원한 성녀와, 바로 그 성녀를 찾아내 제국에 드리운 위기를 극복한 황녀의 이야기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바로 이런 와중에 황제는 비겁하게 제도를 버리고 도주하더니, 황녀가 나서서 위기를 해결하자 공로를 인정하고 치하하긴커녕 반역자로 몰아가는 비열함을 보여 주었다.

여기까진 그래도 참을 만했으나, 멍청하게 직접 제도에 숨어들었다가 사로잡히기까지 했다니. 병사들의 마음이 제도를 장악한 이비엔에게 돌아서게 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탈영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장 지휘관들조차 멍청한 황제에 대한 성토와 울분을 숨기지 못하는 판국에 군기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여기에 더해 이비엔이 투항하는 자들은 누구도 처벌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하자, 동부에서 제도로 진격하듯 행군하기 시작하던 군대는 물을 만난 설탕처럼 녹아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백기를 든 채 이비엔의 군영에 차곡차곡 흡수되었다. 힘겹게 균형을 이루던 세력의 무게추가 완벽하게 한 곳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허무한 쇠락이었다.

* * *

파비안은 반폐인이 되어 버린 아론을 보며 혀를 찼다. 갑자기 사라진 사이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제도의 뒷골목마다 마련해 둔 지부마저 몽땅 정리해 버린 길드장은 한풀 꺾인 악당들이 그러하듯 어딘가 비실비실 힘이 없었다.

“엉망이 된 채 나타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파비안으로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시무시한 이능을 가진 소유자가 저러고 있으니 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게 되어서 저러나? 분명 자말은 꾸준히 재활하면 언젠가는 다시 달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다시 걸을 의욕이 없어 보였다. 암암리에 거리의 지배자라 불려 왔던 아론의 추락에 파비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기껏 수익이 나기 시작한 사업은 성녀의 등장과 함께 모조리 중단되어 버렸고, 그나마 운영되고 있던 도박장도 영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게다가 아론이 일선에 나서지 않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사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길드원들이 따로 세력을 형성하는 등, 길드 안팎에서 일어난 갈등이 점점 곯아가고 있었다.

모두 아론이라는 강력한 이능력자의 부재로 생긴 문제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론은 그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손 한번 대지 않은 듯 딱딱히 굳어 있는 죽 그릇을 확인한 파비안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마스터. 그러다간 걷는 법도 완전히 까먹을 겁니다. 뭐라도 좀 먹고 일어나서 복도라도 걸어요. 다리를 계속 안 쓰면 영영 못 걷게 될 수도 있다고 자말이 올 때마다 충고하는데, 들은 척은 좀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귀찮으니 내버려둬.”

잔뜩 잠긴 목소리엔 아무런 의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파비안은 할 수 없이 최근에 들었던 성녀의 근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론이 그나마 반응하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그거 아십니까? 황녀가 곧 황제가 된다고 제도가 떠들썩합니다. 바로 일주일 뒤가 즉위식인데, 능력자들끼리 모여서 뭘 준비한다고 하더라고요. 듣기론 시가행진 준비라나 뭐라나……. 하여간 가까이서 성녀를 볼 수 있는 기회라고 다들 들떠 있던데, 마스터는 관심 없으십니까?”

“성녀가…… 직접 거리로 나오는 건가?”

“저야 모르죠. 어쨌건 그 행진을 보러 가려면 걷는 연습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파비안의 말에 아론은 대답 없이 몸을 웅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행진을 보러 가고 싶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이라도 본다면 이 미칠 듯한 후회가 조금은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그녀가 자신을 발견해 버리면? 일그러질 지안의 얼굴을 상상하니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내가 나타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놀라울 만큼 허약한 대답에 파비안은 할 말을 잃었다. 에다의 성녀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대충 짐작했다만,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열없는 아론의 모습을 보며 파비안은 직감했다. 제가 지금 당장 길드의 재물을 챙겨 달아나도 길드장은 하등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 지금이라도 다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계속 여기 처박혀 있든가 말든가. 모두 마스터의 결정이지, 제 알 바 아닙니다.”

“…….”

“다만, 이런 모습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저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한 번 더 시도해 볼 겁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도 없으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파비안은 곧장 길드의 재물을 챙겨 달아났다.

이후 제도를 떠나 멀리 도주하는 3일 내내 그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치밀하게 도주로를 계획하고 흔적까지 말끔하게 지웠지만, 하필 상대가 아론 베르그만이란 점이 파비안을 불안하게 했다. 아론이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은 시간이 지나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수중에 있는 어마어마한 금화는 없던 자신감도 되찾아 줄 만큼 대단한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사흘째 되는 날, 다소 여유를 되찾은 파비안은 부자가 된 것을 자축하며 고급 여관에서 진탕 술을 퍼마셨다.

하지만 다음 날 숙취에 전 채로 일어난 그는, 여관방의 의자에 앉아 있는 아론을 보고 술이 다 깨 버리는 기적을 경험해야 했다.

“마, 마스터….”

폐인이 되었다고 확신했던 길드장이 말끔해진 낯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길드의 재산에 손을 댄 자신을 처벌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파비안은 잔뜩 긴장한 채 죽음을 직감했다. 상대는 악명 높은 밤까마귀 길드의 길드장이었고, 그의 주특기는 사람의 장기를 뜯어다 이동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론 베르그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시가행진을 보러 가야겠어.”

“네?”

아론은 기막혀하는 파비안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용건을 끄집어냈다.

“다시 걸어야겠어.”

“하아? 이제 와서 말입니까? 뭘 위해서?”

“에다의 성녀를 만나러 갈 거야. 다시, 평범하게.”

목이 달아나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대화가 점점 더 괴상해지고 있었다. 파비안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스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에다의 성녀인 그 여자한테 마음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시죠?”

넘겨짚듯 던진 질문에 아론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졌다. 이를 본 파비안은 완벽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지안은 다소 감격한 얼굴로 즉위식을 바라보았다. 식을 간소히 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즉위식이다. 줄지은 깃발과 곳곳에 치장된 생화. 타국에서 정식 즉위를 축하를 위해 보내온 사신단까지. 조촐한 예식이지만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겨울임에도 날씨는 화창했고, 기온 역시 포근했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햇살이 땅을 비추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눈을 뚫고 돋아나오는 녹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언 땅이 녹고 봄이 가까워지려는 징조였다.

지안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제위에 오른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장인이 새로 손 본 황관을 쓴 이비엔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딱히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지구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위스로데 대륙으로 넘어온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눈물마저 글썽이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 좋은가?”

“그러게요. 제가 황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감동스럽고……. 이제 보니 제가 킹 메이커가 되려고 차원을 다시 넘었나 봐요.”

지안의 대답에 잠자코 즉위식을 관람하던 일리아스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비엔이 이 말을 듣는다면 또 얼마나 지안의 곁에 찰싹 붙어 있을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올릴 이비엔을 생각하니 절로 이마에 열이 올랐다.

이런 말까지 들은 이상, 지안의 편애를 받는 이비엔을 진지하게 견제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비엔이 제위에 오르는 데는 아무런 유감도 없지만, 지안이 이비엔의 열렬한 지지자인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리아스도 이것 한 가지만큼은 동의했다.

“적어도 알레인보단 더 나은 치세를 보여 줄 테지. 그 세상에선 네가 더욱 살기 좋을 것이고.”

동의는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지안. 정말 이비엔과 함께 마차에 오를 생각인가? 보통 그런 건 황제와 황후만 참여하는 게 원칙이야. 그리고 시가행진 같은 건 부담스럽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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