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절망도 잠시, 알스페트 후작은 서둘러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빠져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지붕을 받치고 있던 나무 기둥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접선지로 삼은 창고의 지붕이 산산이 무너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후작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몇 분간 꼼짝없이 실신해 있던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후작이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건물의 잔해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불길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 마치 태양이 다시 뜨기라도 한 것처럼 온 사위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삼황자, 일리아스 테리온의 소행이 분명했다.
알스페트 후작은 황녀의 기사와 휘하의 능력자들이 잔해 속에서 포로들을 끄집어 내는 것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능력자들의 실력이야 자신도 익히 알던 바지만, 치열한 전투 한 번 않고 꼼짝없이 당하다니? 충격적이다 못해 기가 막혔다.
그러나 전원이 건물의 잔해에 반쯤 깔려 있는 지금,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눈을 굴려 형편없이 제압당한 가문의 기사들을 둘러본 후작은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능력자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렇게 구출된 포로 중에는 황제도 있었다.
끌려가는 황제를 보며, 후작은 자신이 순순히 포박에 응하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음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도박에 실패한 것이다.
기사들은 알스페트 후작을 지체 없이 이비엔의 앞으로 끌고 갔다. 무료히 군마 위에 올라앉아 있던 이비엔은 냉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감이군, 알스페트 후작. 닳고 닳은 제도의 귀족답게 적당히 유보하는 척 버티며 중간을 지킬 줄 알았는데…… 설마 그대가 알레인에게 이렇게나 충성할 줄 누가 알았겠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이비엔의 말에 후작은 반박 하나 하지 못했다.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 모습을 보고 이비엔은 심드렁히 말했다.
“적당한 공포는 통치를 강화시키는 데 좋은 재료가 되지. 그간 본보기 삼을 대상을 선정하지 못해서 난감했는데 이렇게 나서 주어 고맙군.”
제국의 건립과 함께 대를 거쳐 이어져 온 가문이 오늘로써 끝을 맞이했다는 걸 직감하며 후작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암담함으로 비틀거리는 그에게 이비엔은 준엄히 통보했다.
“그대의 후작위를 박탈한다. 알스페트 가의 사유재산 역시 남김없이 국고에 환수될 것이다.”
그 말에 포로 중 하나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버럭 목소리를 높인 건 알레인이었다.
“황제는 나야! 이비엔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반역자!”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는 알레인의 모습에 이비엔은 짧게 조소했다.
“반역?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봐. 난 널 사로잡는 데 성공했어.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넌 더 이상 황제가 아니란 걸 의미해. 그리고 성공한 반역은 더 이상 반역이 아니야. 혁명이지.”
“웃기는 소리 마!”
“포로 주제에 당당하네. 지금 정말 웃긴 사람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제도를 버리고 도망쳤으면서 황제 노릇은 여전히 하고 싶은 모양이지?”
이비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너와 같은 핏줄을 공유한다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 선황제 폐하께서 급사하시지만 않았어도 넌 황좌 근처에도 못 갔을 거라고. 똑똑히 들어, 알레인. 네가 그러니까 이멜다에게 배신이나 당하는 거야. 명색이 황후라는 사람이 오죽하면 널 버리고 내게 손을 내밀어 왔겠어?”
“무, 뭐?”
이비엔은 새파랗게 질린 알레인을 내버려둔 채 가벼운 걸음으로 뒤돌아섰다. 내내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알레인을 사로잡은 이상, 더는 내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도로 행군해 오고 있는 군대 역시 자연히 와해될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군대라 해도, 누가 비겁하고 무모한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세상에 개죽음당할 걸 알면서 사지에 뛰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모든 체스는 왕을 잡으면 끝나는 법. 사소한 세력전이나 전쟁 역시 머리를 날려 버리면 대부분 끝나기 마련이다. 내놓은 명분마저 형편없던 와중에 황제라는 놈마저 포로가 되었으니……. 굳이 선동하지 않아도 저들에겐 희망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허무하고도 분명한 끝이었다.
* * *
“지금, 뭐라고 했나? 알레인이…… 그 애가 기습 작전에 직접 참전했다니?”
말을 잇지 못하는 황태후의 모습에 사령관이 침통히 대답했다.
“작전 중에 고집을 피우시며 제도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사로잡히셨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황태후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곁에 선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황태후를 푹신한 소파 위로 부축했다. 이맛살을 구긴 채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던 황태후는 곧장 이멜다의 행방부터 찾았다.
애초에 이 모든 걸 계획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이멜다의 술책이 가미되어 있을 터였다.
“이멜다는 어디 있지?”
“저 역시 황후 폐하를 먼저 찾았습니다만…… 사라지셨습니다.”
“뭐라?”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당장 기사들을 풀어 이멜다를 찾게 했으나, 사령관의 말대로 이미 이멜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설상가상으로 야반도주라도 한 것마냥 마차마저 엉망으로 뒤집혀 있었다.
보고를 받은 황태후는 붉어진 얼굴로 탄식했다.
“이멜다가 이비엔과 거래했구나. 후작을 끌어들이겠다던 건 모두 눈속임이었어. 알레인이 난데없이 습격을 지휘하겠다며 제도행에 나선 것도, 기습을 성공시키긴커녕 외려 함정에 빠져 포로가 된 것도…… 모두 이멜다의 소행이 틀림없다.”
빠르게 진실에 도달한 황태후는 다음 순간 두 눈을 번뜩였다.
“당장 인근을 수색해라. 작은 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뒤져야 한다. 내 직접 그 아이에게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곧바로 수색대가 꾸려지는 걸 보고도 쉽사리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황태후는 이멜다의 약점이었던 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멜다가 사라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치유 능력자는 도망치지 못했을 테지. 당장 내 앞에 끌고 와라!”
서릿발 같은 명령에 곧바로 카리나가 끌려왔다. 기사들에 의해 황태후의 앞에 내팽개쳐진 카리나는 잔뜩 숨죽인 채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사라졌다.”
“…….”
“카리나라 했던가? 전해 듣기론 후작가에서부터 이멜다와 함께 자라 왔다지. 그래서 이멜다가 너를 그렇게나 아꼈던 것일 테고 말이다. 너라면 이멜다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말해라. 적어도 사라지기 전에 네게 뭐라도 귀띔 정도는 했을 것 아니냐.”
“…….”
“왜 대답이 없지? 날 상대로 네 얄팍한 신의를 지키려 하지 말아라.”
그러나 살이 에이는 듯한 분위기와 황태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좋은 말로 얼러 보기도 하고, 재물로 회유해 보기도 하고, 협박과 호통까지 몇 차례 동원했으나 어떤 으름장도 소용이 없었다.
황태후는 더는 참지 못하고 기사들을 시켜 매질을 가했다. 그럼에도 꿋꿋이 다문 카리나의 입에선 신음 한 번 새어 나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윽박지르며 황후의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는 답변 외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매질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모진 고문이었으나 상대는 능력자였다. 살이 터지고 뼈가 어긋나고 피가 튀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회복하는 족속이었다.
하지만 능력자라 해도 매질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위태롭게 버티던 것도 잠시, 매질을 견디지 못한 카리나가 끝내 실신해 버리자 이멜다를 향한 분풀이를 마냥 카리나에게 쏟아내던 황태후조차 진저리를 내고 말았다.
“독한 것. 뭣 하느냐? 물을 끼얹어라.”
가차 없는 명령에 기사가 머뭇거리며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 기절한 카리나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흠씬 두들겨 맞은 충격 탓일까, 얼음장 같은 물이 전신을 때렸음에도 카리나는 엎드려 쓰러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자코 이를 지켜보던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물속에 얼굴을 처박으면 깨어나겠지.”
냉정한 황태후의 지시에 묵묵히 명을 따르던 기사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럼에도 주인의 명령인지라, 이들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기절한 카리나의 머리채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양동이에 담긴 물속에 카리나의 머리를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사는 화들짝 놀라며 잡았던 머리채를 놓치고 말았다.
“화, 황…….”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 머리카락 색. 뒤이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얼굴과 체형에 그 자리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모두가 익히 아는 이였다.
“황후 폐하….”
그토록 행방을 찾던 황후가, 설마하니 치유 능력자 행세를 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사들 모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멜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황태후 폐하의 명령이었다지만, 자신들이 매질을 가한 사람의 정체가 다름 아닌 황후였다니!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질린 건 황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모두와 같은 얼굴을 한 채 돌처럼 굳었다. 어째야 할지 몰라 하는 황태후의 두 눈에, 매질에 얼룩덜룩 창백해진 이멜다의 얼굴이 아로새기듯 박혀 들었다.
그 순간 황태후가 떠올린 것은, 매질 당한 종아리를 부여잡고 황실의 정원 구석에 숨어 울던 여자아이였다. 고통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던, 설움을 감추려 부단히 노력하던 어린 후작 영애.
“이멜다…….”
딸을 잃은 자신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멜다의 존재는 위안 그 이상이었다. 첫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이후의 인연은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계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미리 예고되어 있던 일처럼. 어린 이멜다를 은밀히 보살피며 죽어 버린 딸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랬는데……. 상황의 긴박함과 조급한 마음을 앞세워 에를랑겐 후작과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과거와 같은 짓을….
어지럼증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젖힌 황태후는, 먼 옛날 들었던 아들의 비난을 떠올리며 입술을 떨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모든 걸 당신의 뜻대로만 하시는군요. 티타니아가 절망한 건 오데르겐 공작과 이어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멋대로 혼사를 통보하지만 않았어도 그 앤 멀쩡히 살아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대체 왜! 왜 모든 걸 어머니 뜻대로만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