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지안은 손등으로 입술을 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아스는 혼자서라도 못다 한 입맞춤을 마저 하겠다는 듯 지안의 손등 위로 제 입술을 눌렀다. 아랫입술 대신 아프지 않게 손등이 깨물리고, 혀가 닿았다 떨어졌다.
녹지 않는 사탕을 먹듯 손등을 핥아대며 일리아스가 말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게 해 줘.”
떨리는 목소리와 호소하는 눈빛에 절로 심장이 떨려 왔다. 고민하는 사이, 일리아스가 손등에 입술을 붙인 채 말했다.
“사랑해.”
그가 말할 때마다 손등 위로 그의 입술이 쓸리고 뭉개졌다. 고해성사 같은, 맥락 없는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성격 고칠게. 질투도 줄일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입 맞춰 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세상에 어떤 여자가 외면할까. 진심이 아니라 가이딩이 고파서 한 말이래도 별수 없었다. 심장을 녹여 댈 듯이 졸라대는데 어떻게 이걸 외면하나.
속절없이 함락당한 지안은 천천히 손등을 내렸다. 일리아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답삭 지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고개를 모로 튼 채로 갈급히 혀를 빨아당긴 그는 지안의 입술이 퉁퉁 붓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실컷 점막 가이딩을 받았음에도 아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걸 티 낼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더 했다간 지안이 질린 얼굴로 타박할 것이다. 사실 지금도 반쯤은 질린 것 같았다.
“미안해. 입술이 부었네. 연고 가져올게.”
급한 불을 끄듯 욕심이 충족시킨 일리아스는 실수를 한 것마냥 조급해했다. 앞으로는 항상 연고를 챙겨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지안을 껴안은 채 그대로 일어났다. 그 행동에 지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러면 연고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같이 찾는 게 되지 않아요?”
“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귀여운 고백에 지안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크흠. 연고라면 이븐이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건 뭐예요?”
지안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아침부터 만들어 온 화관이었다. 일리아스는 그새 조금 생기를 잃어버린 화관을 냉큼 치워 버렸다.
“별거 아냐.”
“아닌 것 같은데? 저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
“그새 시든 것 같아. 다음에 더 잘 만들어서 선물할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는 저게 갖고 싶어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할 수 없이 화관을 들어 지안에게 건네주었다. 형편없어서 주기 싫었던 것도 잠시, 지안이 환하게 웃었다. 이비엔에게 보여 주었던 웃음보다 더 기쁘게.
“예뻐요.”
아니야. 예쁜 건 너야.
절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일리아스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뭘 만회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만회하려면 지안이 기분이 좋은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았다.
“혹시라도 내가 너를 난감하게 만들면 앞으론 그냥 화를 내.”
“난감하다니. 그런 적 없어요.”
정말이었다. 지안은 정말로 일리아스로 인해 난감했던 적이 딱히 없었다. 당황한 순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이드를 둘러싸고 전투마저 종종 벌어지는 것에 비하면 그깟 질투쯤이야.
실제로 각성자 협회에서 지안이 보고 들은 에스퍼간의 싸움과 모략질에 비교하면 일리아스의 질투는 아주 귀여운 편에 속했다. 멀쩡한 도시를 날려 먹는 에스퍼도 있는 마당에 가벼운 투기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한 지안은 늦게나마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시온 앞에서 말수가 좀 줄어든 건 사실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해서, 굳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물을 가져다준다거나, 멀리 있던 디저트를 제 앞으로 끌어와 준다거나, 그런 일이 자주 있었거든요. 뭘 요청하기도 전에 다 해 주니까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더라구요. 그랬는데 그걸 시온이 오해한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었다.
“……정말로, 나 때문이 아닌 거지?”
“그럼요. 전부 오해예요.”
그렇지 않다. 사실이 아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이고 새롭게 말한 뒤에야 일리아스는 안심했다. 천천히 납득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지안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곁들였다.
“일리아스. 아무리 멋진 남자도 귀여운 남자는 못 이긴다는 말 들어 봤어요?”
“아니.”
“멋진 건 한순간이지만, 귀여움은 영원히 남는다는 말은?”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일리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본 적 없어. 근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 질투하는 거 되게 귀엽다고요. 자주 보고 싶을 정도로.”
기막힌 말에 일리아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안이 웃으니까, 그걸로 족했다.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중요한 건 지안이 웃고 있고, 그녀의 머리에 화관이 씌워져 있고, 죄책감이 지나간 자리에 황홀감이 잔뜩 남았단 거다.
“그럼 난 너한테 영원히 귀여운 건가? 평생?”
“아마도? 전하는 귀엽고, 저는 귀여운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반 장난식의 고백인데도 좋았다. 솔직히 귀엽다는 말과 자신은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귀여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지안의 주장이 그것보다 더 중요했다.
“난 그거면 됐어.”
덤덤하기까지 한 수긍에 지안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 * *
알스페트 후작은 이비엔이 황권을 잡은 후 매일 밤 초조함에 잠들지 못했다.
제도로 몬스터가 몰려온 일이나 황제가 제도를 버리고 내빼 버린 일 모두 감당하기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지만, 설마 실종되었던 황녀가 돌아와 대놓고 황좌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
명백한 반역이었으나, 수백의 능력자들과 성녀의 지지를 거느린 황녀에게 반발하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는 일과 같았다. 하다못해 성녀와 황녀의 친분이 얄팍했다면 파고들 틈이라도 엿보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제 와선 과거 오티스와 황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실이 몹시도 뼈아플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살길은 남아 있었다. 이제 막 황권을 잡은 황녀가 후작가를 날려 버리진 못할 터였다. 합의 없이 강제로 황좌를 차지하고 앉은 것을 의식하듯 황녀는 귀족들을 회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나라가 굴러가려면 행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러 가문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후작가를 없애 버리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다. 황녀의 성격상 사소한 보복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나, 이에 전전긍긍할지언정 후작가의 존립이 위태롭지는 않았다.
후작이 이같이 장담한 이유는 단순했다. 막상 황권을 잡은 황녀의 정치적 감각과 활용력은 간혹 후작도 감탄할 정도로 빼어났던 것이다. 제도의 귀족 절반 이상이 하루아침에 황녀의 편으로 돌아선 것부터가 이미 걸출한 치세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뒤로 황녀의 힘이 되어준 존재.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는 성녀와 그녀가 지닌 성물이었다. 몬스터를 일거에 정리해 버린 신의 힘. 그 앞에서 누군들 엎드리지 않을 수 있으랴. 땅과 하늘을 뒤흔들어 버리던 성물의 위력을 떠올리며 후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후회하는 중이었다.
“황후와 손을 잡은 게 과연 잘한 일인지…….”
알스페트 후작은 이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 없이, 황후와 손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문을 두드리는 죽음을 환영하는 일과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끝이 뻔히 보이지 않나. 황제가 이끌고 떠난 군대가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성녀가 지닌 성물을 상대할 순 없었다. 버려지듯 제도에 남게 된 대다수의 귀족들이 황녀의 휘하로 돌아선 것만 봐도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이 도박은 사실상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후작으로선, 도무지 이 거래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작은 괴로움 가득한 얼굴로 가슴 깊숙이 묻어 둔 이름을 꺼내 중얼거렸다.
“로살린드….”
젊은 날 사고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옛 연인이, 남몰래 죽음을 가장한 뒤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녀의 목숨이 황후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알스페트 후작은 불안으로 날뛰는 심정을 어쩌지 못한 채 이멜다가 보내온 영상석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한 그녀와, 낯설지만 어딘가 자신을 닮은 소년이 황제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위협받고 있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거래에 응한 건 그래서였다. 로살린드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내밀어진 손을 잡아야만 했다.
‘무능력한 황태자를 황좌에 올린 여자니, 아무 생각 없이 황성을 급습하진 않을 테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건 고작 그뿐이었다. 확률 낮은 도박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책사여서일까, 제도에 잠입하기 위해 그녀가 제시한 장소와 방법은 놀랍도록 뜻밖이면서도 적절했다. 접근이 눈에 띄는 평야 대신, 제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이용해 남몰래 제도 안으로 침투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녀가 지정한 운하의 수로 관리감독관을 매수하거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매수 작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약속된 당일 밤, 알스페트 후작은 최측근인 기사들을 이끈 채 미리 갑문 옆 창고에 대기했다. 수로는 모두 열고 비워 둔 채였다.
마침내 으슥한 새벽이 되었을 즈음, 배 한 척 떠 있지 않던 운하 위로 가벼운 복장을 한 기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의 호흡을 도울 물 능력자를 동행시킨 것이 분명했다. 지금에 이르러 모든 능력자들이 성녀에게 혼이라도 빼줄 것처럼 군다는 걸 생각하면, 소문과 물정에 어두운 능력자를 운 좋게 매수한 것이리라.
물 위로 올라온 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후작은 횃불을 켜 창가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자 신호를 알아본 자들이 창고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창고에 들어선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하던 후작은, 다음 순간 익숙한 얼굴을 목도하고서 헛숨을 들이켜야 했다.
“화, 황제 폐하!?”
고작 이런 기습 작전에 황제가 직접 움직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황제가 검술에 능하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후작이 알기로 알레인의 실력은 범부보다 조금 더 뛰어난 수준에 불과했다.
살아온 내내 실리와 계산에 능하다는 평을 들었던 후작답게, 그는 곧바로 이 모든 것이 잘 꾸며진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운하를 관리하는 기사들이 쉽게 매수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건만!”
욕설과 함께 속마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멜다 에를랑겐. 그 간악한 여자가 황제를 버리기로 결정한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자리에 황제가 등장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