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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193/199)

194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무섭도록 경각심이 생겨났다. 듣고 나니 짐작 가는 게 있긴 했다. 떨어져 있더라도 지안의 음성에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평소 지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일리아스도 아주 모르진 않았던 것이다. 그게 만약 제 얘기였다면.

새삼스럽게 넘겼던 말들을 되짚은 일리아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간의 제 행적을 돌이켜 보았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난처한 얼굴을 한 지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상기하고 나자, 주제넘은 것 같던 이븐의 충고가 갑자기 몹시 고마워졌다.

“알려줘서 고맙다.”

이븐에게 눈인사를 남긴 일리아스는 곧바로 지안을 찾아 테라스로 향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은 것이 애석하게도 지안은 공작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린 듯 다정한 남녀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공작과 함께 있다는 건 들어서 알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다가가야 할지, 못 본 척 돌아서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가물가물 눈을 감던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으음…… 일리아스?”

졸다 말고 파장을 느낀 모양이었다. 앞뒤 생각할 여유 없이 성큼 가까이 다가선 일리아스는 얼른 손바닥을 들어 지안의 두 눈을 가려 주었다.

“괜찮아. 더 자. 나 딱히 용건도 없어. 그냥 찾아온 것뿐이야.”

그 말에 안심했는지 지안은 몇 번 뒤척이더니 금세 잠들어 버렸다. 그러고서도 일리아스는 한참 동안 지안의 눈을 가린 손바닥을 치워 내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뒤. 일리아스는 지안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대충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안에게 주기 위해 만든 화관은 보여 주지도 못한 채였다.

“기껏 만들었는데 시들어 버리겠군.”

아쉬워하는 일리아스의 기색에 그가 찾아온 이유를 대충 눈치챈 악시온이 말했다.

“아직 각인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대꾸하며 일리아스는 멍한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운도 기운이지만,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이윽고 살짝 내려간 시선이 지안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를 눈에 담았다. 프러포즈를 받고서 펑펑 우는 지안의 모습에 당황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넋을 놓고 지안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일리아스는 지안을 독차지하고 있는 악시온을 노려보았다. 타이밍 좋게 지안을 찾은 공작이 부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관 말고 대충 꽃다발만 엮은 다음 지안을 찾았을 텐데. 제가 늦어놓고선 괜히 성질이 났다. 공작이 제 것인 양 지안을 답삭 껴안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작과 많은 것을 합의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영 따라 주질 않았다. 이븐이 남긴 충고는 진작 새까맣게 잊은 뒤였다.

지안을 껴안은 채 가만히 그 꼴을 보고 있던 악시온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볼일이 있어서 지안을 침대에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랬다간 지안이 깰 것 같군요. 전하가 좀 안고 있으십시오.”

뜻밖의 기회를 일리아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거절하지 못했다. 강아지가 뼈다귀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일리아스는 반색하며 냉큼 지안을 받아 안았다.

잠든 지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빼앗긴 물건을 되찾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런 일리아스를 향해 악시온이 말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긴 뭐가? 그보다,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건성으로 대꾸하는 모습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악시온은 마냥 차분했다. 픽 웃기까지 했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황녀 전하, 아니, 폐하께서 알려 준 옛 신들과 능력자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마인 어쩌고 하던 이야기 말이군. 대충 알아. 아니까 쓸데없이 말 걸지 말고 볼일이나 보러 가.”

악시온은 축객령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북부의 오래된 민요에는 별의 여신이 등장하는데, 저는 그동안 노래 속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안이 태어난 지구란 곳은 신들의 거주지라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한 곳이었고…….”

말하다 말고 악시온은 지안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지구에서의 짧았던 며칠을 상기하는 듯했다.

“저는 겁이 납니다. 지안이 지구를 떠나 대륙을 선택한 걸 후회할까 봐. 그래서 더더욱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지안이 땅에 발을 디딜 일조차 없도록 매일 안고 다니고 싶습니다.”

“흥. 해도 내가 해. 네가 그러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일리아스의 핀잔에 악시온의 얼굴 위로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 제가 필요로 하는 건 전하의 허락이 아닙니다. 지안의 허락이지.”

일리아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전하의 처지는 제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런 게 가능할 턱이 없었다. 그새 잊고 있던 이븐의 말이 되살아나 마구 머리를 후려쳤다.

‘폐하가 답답해 죽으려 하세요. 애써 결혼까지 성사시켜 놓았는데 나중에 이혼당하면 어쩌냐고요.’

그 말을 상기하며 반성하는 일리아스에게 악시온이 마지막 타격을 가했다.

“지안의 말수가 부쩍 줄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전하께선 멀리서도 지안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요. 지안 역시 파장을 통해 능력자의 감정을 알아채고요. 저는 지안이 자주 인사를 생략하고,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말수를 점점 줄이는 것 모두 전하의 탓이라 생각합니다.”

“뭐?”

“감정을 좀 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놓고 드러내는 질투에 난처해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반복되면 지안도 지겨워할 겁니다.”

본격적으로 성질을 긁는 말에 일리아스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지안을 껴안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 벌떡 일어나 주먹질했을 것이다. 악시온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일리아스를 유유히 지나치며 말했다.

“지안이 아예 입을 다무는 불상사는 전하께서도 바라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그 말에 일리아스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분노를 퍼부어야 할 대상은 유유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대로 공작이 떠나자 뒤늦은 위기감이 미칠 듯이 몰려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공작의 말이 옳았다. 그래, 제 딴엔 지안의 말수가 줄어들어 화가 났겠지. 만약 공작으로 인해 지안이 점점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자신도 그처럼 화를 냈을 것이다.

잔뜩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지적하려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일리아스는 제 성격의 결함과 한계를 떠올리며 반성했다. 언젠가 지안이 진절머리를 내며 지적한 적도 있었다.

‘그 불같은 성질머리, 정말 넌더리 난다고요.’

한 번도 그 지적을 잊은 적 없었고 고치려 노력도 했지만, 타고난 성격을 바꾸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공작의 언행이 분노를 들쑤신 것에 더해 스스로에 대한 분노까지 더해지자, 손쓸 도리 없이 파장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 탓에 심상치 않은 파장을 감지한 지안이 퍼뜩 깨어나고 말았다. 분노에 차 어쩔 줄 몰라 하던 일리아스는 이번엔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놀란 지안의 표정을 보건대, 자신의 파장 때문에 깨어난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에요?”

졸음이 다 가신 목소리로 물어오는 질문에 일리아스는 지안의 두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아냐. 더 자.”

“저 깼어요.”

손을 치워내며 지안이 물었다.

“파장이 엄청나게 요동치던데. 지금도 떨리고 있고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어.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났다. 거짓으로 둘러대는 건 지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혀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지안이 무슨 말이든, 뭔가 다른 화제라도 꺼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안은 미동없이 가만히 안긴 채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그는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을 끄집어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꼭 묻고 싶었다.

“나 때문에 네 말수가 줄었다고 들었어.”

“네?”

“내가 질투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내가 고칠게. 내 문제잖아. 네가 입을 다물 필요는 없어.”

“잠깐, 잠깐만 일리아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고자질을 하는 것 같아 일리아스는 차마 공작이 그랬다고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치가 있지, 누가 범인인지 모를 턱이 없었다. 원래 있던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없어진 것도 그렇고. 대강 사정 파악을 하는 데는 침묵으로도 충분했다.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일리아스의 등을 토닥였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전 딱히 말수 줄인 적 없어요. 진짜예요.”

그 말이 위로가 된 건 사실이지만, 배려 섞인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공작이었다면 단번에 지안의 마음을 알아차렸겠으나 자신은 달랐다. 일리아스는 부러움과 시기심을 어쩌지 못하며 지안을 끌어안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미안해. 내가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해서 널 깨웠군.”

정말로 크게 상심한 듯한 모습에 맥을 못 추고 동요하는 파장까지, 영 말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지안은 일리아스의 얼굴을 잡아 돌려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 주었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에 재차 입 맞추며 살짝 혀도 밀어 넣었다. 점막 가이딩으로 불안정해진 파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좋은데…… 얽힌 혀가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요령 좋게 잡아채는 혀 놀림과 흡입에 지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아, 읍!”

밭은 숨을 내쉬며 호흡하려 고개를 튼 지안의 턱을 일리아스가 잡아 고정했다. 속절없이 잡아먹히는 키스에 다시 한번 호흡이 먹혔다. 어깨를 두드려 그만두라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몇 번 더 용을 써보던 지안은 결국 체념하며 받아들였다.

일리아스는 말캉한 살점을 정신없이 물고 빤 뒤에야 지안의 혀를 놓아 주었다. 어찌나 집요한지 욕심 그득한 키스에 혀뿌리가 은은하게 아파 올 정도였다. 그러고서도 모자라 자잘한 입맞춤이 연신 입술과 뺨을 오가며 지분거렸다. 반쯤 감긴 몽롱한 눈을 보아하니 불시에 맛본 점막 가이딩에 완전히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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