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사실, 알레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멜다가 자신과 결혼한 건 그저 에를랑겐이라는 성을 버리고 싶어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일 뿐이었단 걸.
그땐 무리해서라도 에를랑겐 후작만 처리하면 이멜다가 자신을 돌아봐 줄 줄 알았다. 결혼을 이용해 속박해 놓은 뒤, 매일같이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면 이멜다도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예전에는 실망스러움을 감추려는 노력이라도 하던 그녀였건만, 더는 그러지도 않았다. 황후라는 지위마저 내팽개치며 떠날 만큼 내가 싫은 건가? 내가 그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사내답거나 용맹하지 않아서?
알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창밖을 내다보는 이멜다에게 한눈팔지 말라 호통을 치고 싶었다. 여건만 된다면 제도로 행군할 게 아니라, 사냥용 활과 검을 챙겨 야산과 들판을 달리며 사냥감을 물색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멜다의 앞에 서면 작아지는 건 늘 자신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호통을 친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넘치는 재치와 지혜로 부족한 자신을 기어이 황제로 만들어 준 사람 아닌가. 말싸움이건 뭐건, 그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진심을 다해 애원하고 서러움을 토로해 본들 한심하단 시선만 받을 게 뻔했다. 그뿐일까. 이멜다가 듣는 시늉이라도 해 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위기에 빠지면 곤충도 머리를 쓰게 된다 했던가. 알레인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미련스레 되짚어가다가 마침내 오랜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언제나 이멜다에게 진심이었던 자신과는 달리, 이멜다는 그저 그녀 나름의 이득을 위해 자신을 제위에 올려 준 것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서일까. 이멜다가 취중에 한 고백이 잊혀지지 않았다.
‘폐하께서 잡아온 사냥감이 참새였대도 전 좋았을 거예요.’
‘폐하. 폐하께서 조금만 용맹하셨다면……. 폐하께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거나 앞장설 만큼 용기 있다면, 그랬다면 알레인. 나도 조금은 당신을 조금은 좋아했을 텐데…….’
알레인은 기운 없는 얼굴로 그 말을 곱씹었다. 시종의 조언을 따라 매일 아침 이멜다에게 장미꽃을 챙겨 갈 게 아니라, 차라리 기사들과 대련을 했어야 했다.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대련에 패배한다고 해도 차라리 이멜다는 그걸 더 기꺼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검술 실력은 기사들을 이길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승부를 조작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이멜다가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끙끙 고민하던 알레인에게 기사단장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 알스페트 후작이 협조하겠노란 의사를 밝혀 왔다고 합니다.”
기사단장의 보고에, 알레인은 바로 어제 알스페트 후작이 보내온 측근과 이멜다가 비밀 회동을 가졌었단 걸 기억해 냈다.
“제도까지 남은 거리가 약 3일인 점을 고려하여, 이틀 뒤 바로 기습대대를 이용해 제도로 침투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작전의 승인을 요청하셨습니다.”
말이 좋아 승인이지, 일종의 통보와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토를 달아 그녀의 작전을 방해할 수도 없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알레인은 기막힌 생각을 떠올려 냈다.
‘그래. 그 기습 작전을 내가 직접 지휘하는 거야!’
이멜다는 분명, 직접 작전을 지휘하거나 앞장서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그것도 충분히 용기 있고 멋지다고 했다.
이멜다가 유도한 함정에 그대로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알레인은 조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되찾은 알레인은 순식간에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나는 황제야. 기사들과 대련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 기사들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게 내 일이잖아. 급습에 성공해 돌아오면 이멜다도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딱 이멜다가 바란 그대로의 생각을 하며, 알레인은 제도를 기습하는 작전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리라 마음먹었다.
세상에 테리온의 황제가 이런 결정을 내리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야말로 철부지 소년이나 할 법한 선택이었다.
* * *
이비엔은 발그레해진 지안의 뺨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눈가를 보니 몹시 감동한 듯해 보여 다행이었다. 오라버니와 공작의 프러포즈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계획에 협조해 지안을 힉스로 데리고 간 보람이 있었다.
집무실에서 능청스럽게 지안을 반긴 이비엔은 지안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두 개의 반지를 스리슬쩍 확인하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내가 인근에 있는 고급 여관도 통째로 대여해 놨는데.”
능글맞은 물음에 지안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폐, 폐하!”
“농담이야.”
농담은 무슨. 그 말만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다 아는데. 하지만 지안은 이를 알면서도 차마 지적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여관까지 잡아 놨을 줄이야.
진심으로 제가 황성에 돌아온 걸 애석해하는 이비엔의 내심을 파장으로 고스란히 느낀 탓인지, 좀처럼 붉어진 뺨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안이 동요를 가라앉히길 기다린 이비엔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물었다.
“그래서 프러포즈는 어땠어?”
“……좋았어요.”
“흐응. 좋기만 했어?”
“행복했고요.”
“다행이네. 이제 반지도 받았겠다, 결혼식은 언제가 좋을까?”
당사자보다 더 서두르며 앞서나가는 질문에 지안은 싫지 않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결혼이라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당장 제도를 떠난 군대가 돌아오고 있는데. 우선 그것부터…….”
“아. 그거 말인데. 해결됐어.”
“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지안의 물음에 이비엔은 황성의 시녀가 남몰래 전달한 서신을 들어 보였다. 황성에 들어오자마자 막 건네받은 편지였다.
“읽어 봐. 이멜다가 보낸 서신이야.”
굳은 얼굴로 편지를 받아든 지안은, 서신의 내용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사실인가요? 정말 그 여자가 보낸 거예요? 명색이 황후인 사람이 왜 우리에게 협력을……. 어째서 황제를 배신하려는 거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곧 제도에 당도할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지뢰를 파묻거나 드론으로 폭격을 가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지안은 얼떨떨해하며 이비엔과 서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뭘까요. 이 서신, 믿어도 좋은 걸까요? 손을 내미는 척 함정에 빠뜨리려는 걸 수도 있잖아요.”
“받아 본 즉시 알스페트 후작가의 동태를 살펴보라 명했는데……. 사실인 것 같아. 서신과 함께 영상석도 동봉되어 있었는데. 확인해 보니 이멜다가 후작의 측근인 올리언스 남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더군. 제보는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 같아. 우리로선 좋은 일이지. 덕분에 배신자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만…….”
“일종의 빚이로군요.”
“맞아. 봐서 알겠지만, 그녀의 제안엔 조건이 달려 있어. 카리나인지 뭔지 하는 치유 능력자에게 각인해 줄 것. 이 부분은 네 동의가 필요한 것 같아서 기다렸어.”
“먼저 손을 내민 데다 내부의 위험까지 대놓고 알려 주었으니……. 별수 없네요. 피해 없이 황태자를 사로잡게 될 기회잖아요. 잘하면 전쟁은커녕 아무런 충돌 없이 대치를 끝낼 수 있으니. 당연히 동의해야죠. 마음에 안 들지만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네요.”
내심 지안이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이비엔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답신하도록 할게.”
“그런데 왜 이런 서신을 보내온 걸까요? 사실상 황후인 사람이.”
“글쎄. 아마 알레인이 마음에 안 들었겠지. 하녀들이 하는 말을 엿들은 거긴 한데, 이멜다가 몰래 황성에서 도망치려 한 적도 있었다나 봐. 뜬소문 정도라서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로선 잘된 일이지.”
그 말을 끝으로 이비엔은 더는 볼 일 없다는 듯 서신을 불태웠다.
* * *
일리아스는 서투른 손짓으로 얼기설기 화관을 엮었다. 어릴 적에도 하지 않던 짓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오전에 정원에서 이비엔이 만들어 준 화관을 쓰고 환하게 웃는 지안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로도 그렇게 좋아했으니, 둘이면 더 좋아하겠지.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
이런 쪽으로는 손재주가 다소 모자랐지만, 별수 없었다. 먼저 반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가이드에게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되어선 안 된다는 지안의 경고를 매번 무시한 것도 자신이다.
덕분에 공작과 지안을 공유하게 되어 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도리어 그렇게 많은 이들과 각인을 했음에도 자신을 선택해 준 지안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일리아스는 엉성한 실패작을 대여섯 개 만들어 낸 후에야 마침내 그럴싸한 화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고작 화관 하나 만드느라 반나절을 소비해 버렸지만, 기껏 피워 낸 꽃을 죄 쥐어뜯긴 화원이 듬성듬성해졌지만,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았다.
서둘러 지안이 머무는 궁으로 향한 일리아스는 그새 특별 호위 자리를 꿰찬 이븐에게 지안의 행방을 물었다.
“지안은 어디 있지?”
“공작님과 함께 테라스에 계세요.”
공작이 방문했단 말에 일리아스는 잠시 멈칫했다. 화관을 만드는 틈틈이 지안의 음성에 귀 기울였는데, 내가 미처 못 듣고 지나쳤나?
“쳇. 이걸 만드는 데 너무 열중하느라 지안이 공작을 반기는 걸 못 들었군.”
못마땅해하는 기색에 이븐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알았더라도 뭘 어쩌시게요? 성녀님이 혼자 남을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방문한다든가, 뭐 그러시려고요?”
“…….”
“세상에. 진짜 그러려고 했어요?”
“호위 주제에 네가 무슨 상관이야.”
“뭐? 호위 주제에? 하! 전하, 그거 아세요? 공작님은 성녀님이 전하와 같이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은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굴어요. 전하도 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이럴수록 전하만 손해란 걸 왜 모르세요? 자꾸 그러시니까 성녀님이 괜히 신경 쓰시잖아요.”
“참견 마.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이븐은 발끈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제 말은, 성녀님이 전하의 눈치를 본단 말이에요. 공작님과도 곧 한 식구가 될 텐데 계속 그러실 셈이세요? 폐하께서 아무 말 안 하시던가요? 폐하가 답답해 죽으려 하세요. 애써 결혼까지 성사시켜 놓았는데 나중에 이혼당하면 어쩌냐고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일리아스는 선 채로 굳어 버렸다.
“뭐?”
“화관 구겨져요. 그리고 표정 관리 좀 하세요.”
이븐의 충고에 일리아스는 화들짝 놀라며 구겨진 화관을 다시 매만졌다. 그 꼴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이븐은 이비엔의 부탁과 당부를 떠올리며 재차 충고했다.
“공작님은 평소 무심한 듯 보여도 은근히 능수능란한 데가 있으세요. 전하처럼 툭툭 사납게 말하지도 않으시고, 질투로 동요하는 일도 없으세요. 반면 전하는…… 파장부터가 대놓고 직설적이라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고 했던가? 하여간 전 그렇게 들었어요.”
얼떨떨한 얼굴을 한 일리아스에게 이븐은 마지막 한 방을 먹였다.
“폐하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냥 모른 척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