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혹시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질투로 당혹스러워하는 알레인의 모습을 빠르게 뜯어 살핀 이멜다는 심드렁한 기색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누가 봐도 건성으로 알은척하는 태도였다. 시선은 여전히 기사들을 향해 슬쩍슬쩍 내돌리는 채였다. 알레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멜다의 시야를 가로막아 섰다.
“먼지가 날리잖아! 기사들더러 오늘 오전 훈련은 쉬라고 전달해.”
때아닌 신경질적인 명령에 황제의 시종은 어쩔 줄 몰라 하다 기사단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알레인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뭐, 기껏 동부에 왔는데. 잠자코 군영에만 있자니 나도 좀이 쑤시긴 하는군.”
똑같이 숙취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멀쩡한 척 목과 어깨를 돌려대는 게 웃겼다. 몇 걸음 달리다 말고 토해 버릴 거면서 왜 저러는 거람. 게다가 이 와중에도 장미를 챙겨오다니……. 한숨이 나올지언정 근성만은 대단했다.
“받아 줘, 이멜다.”
늘 그랬듯 불쑥 내밀어지는 꽃다발을, 이멜다는 대충 챙겨 들었다. 가다가 적당한 곳에 버리면 될 것이다.
그렇게 그대로 알레인을 지나치려는데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아침은 먹었어? 어제 술 마시다 말고 쓰러졌잖아. 해장에 좋은 수프를 만들어 두라고 했으니 같이 아침이라도……. 바쁘면 점심때라도 좋아.”
“한가롭게 스푼을 들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요. 그리고 사령관이 저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예정에 없는 일정까지 줄줄 읊은 이멜다는 손쉽게 알레인을 실의에 빠뜨린 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숙취로 속이 욱신거렸지만, 엉망이 된 속을 달래는 것보단 알스페트 후작의 사생아를 만나는 일이 더 급했다.
* * *
분수대 하나 없는 중앙 광장에서 화려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몇몇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꺄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대놓고 이능을 사용 중인 물 능력자의 모습에 이비엔은 새삼스레 바뀐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능은 고작 어린애 환심을 사기 위해 사용되는 능력이 아니었다. 아무리 편리하고 강력하다 해도 쓰면 쓸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힘을 누가 아낌없이 사용하겠는가? 하여 능력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일에만 조금씩 이능을 사용하며 삶을 연명해 나갔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는 그러지 않아도 좋으리라. 이제 더 이상은 이능을 사용한 대가로 폭주할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능력자들을 차별하는 분위기 역시 하루가 다르게 개선되어 가고 있었다.
제국민들은 능력자들의 이능을 여전히 낯설어했지만, 더는 예전처럼 이들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위험인물로 낙인찍히는 것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 저 물 능력자도 그런 분위기를 알기에 광장에서 대놓고 저러는 것이리라. 어쨌든 보기 좋았다.
하늘로 치솟아 오른 물방울들이 햇살을 튕겨내며 반짝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재주가 좋은 이능력자였다.
“예쁘네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잠자코 동의하며 마차의 커튼을 좀 더 걷어 주었다. 지안이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안은 가만히 창밖을 감상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풍경을.
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건 햇살을 튕겨내는 물줄기만은 아니었다. 몬스터의 침략으로 위태롭고 불안정해졌던 제도가 어느새 활기찬 모습을 되찾은 것이 보였다. 문을 연 대장간과 상점들,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바삐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 자신의 삶을 제도에 뿌리내린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예뻐요. 정말.”
점점 멀어지는 광장을 뒤로하며 달려 나간 마차는 곧 목적지인 힉스에 도착했다. 이비엔은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려는 지안의 손을 잡아 주었다. 지안이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이런 에스코트는 폐하가 하시면 안 되는 일 아녜요? 위엄 있어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시면서……. 그리고 저도 다리 있어요. 알아서 내릴 수 있다구요.”
살가운 핀잔에 이비엔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아. 근데 잘못해서 네가 발목을 삐기라도 하면 일주일 내내 공작이 나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볼걸. 오라버니는 내게 말도 못 할 정도로 잔소리를 해 댈 거고.”
“설마요. 발목을 삐면 그건 발을 헛디딘 제 잘못이지, 폐하의 잘못이 아닌데 왜 그러겠어요?”
“설마는 무슨, 내 말 믿어. 진짜 그럴 거야. 그보다, 힉스는 오랜만이지? 머리도 식힐 겸. 즉위식 전에 너와 같이 여길 다시 오고 싶었어. 네가 좋아해서 그런가, 나도 힉스의 올리브 절임이 전보다 더 좋아졌거든.”
“그거 정말 맛있죠. 우리 샴페인도 마셔요.”
“그리고 양고기도 시키자.”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메뉴에 지안은 짐짓 군침을 삼켰다. 오전부터 점점 더 가까워지는 알레인의 군대를 어떻게 해산시켜 버릴지에 대해 한참 논의하던 차라, 그만 점심시간을 훌쩍 놓쳐 버린 참이었다. 이런 와중에 힉스에서의 식사라니. 두 팔 벌려 환영해야 마땅했다.
“어. 그런데 어째 입구 주변이 한산하네요. 예전엔 이 주변에 마차가 엄청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나 힉스가 문을 닫은 것일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능청을 떨었다.
“겉보기엔 이래도 문을 닫은 건 아니니 걱정 마.”
그 말대로 힉스의 지배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손님 하나 없는데도 진작부터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방문을 환영하듯 카펫까지 깔려 있다. 북부의 설원마냥 밟기가 무서울 정도로 새하얀 카펫이었다.
그새 새롭게 인테리어를 한 걸까?
궁금해하며 들어선 힉스의 내부는, 언제 화사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냐는 듯 겨울의 진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가져온 건지 궁금해지는 전나무가 통째로 한 구획을 차지한 채 장식되어 있었고, 심지어 레스토랑 내부에 함박눈까지 펑펑 내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차갑거나 춥지 않았다.
“이게 무슨?”
“환상이야. 아무래도 힉스에서 마법사를 고용한 것 같은데?”
이비엔은 설명과 함께 지안을 이끌고 예약석이라고 표시된 테이블에 착석했다. 입구 인근에 손님이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대강 짐작하긴 했지만…… 통째로 대여라도 한 듯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힉스의 내부를 채운 건 은은한 음악 소리와 서빙을 위해 조용히 대기 중인 직원들의 기척뿐이었다.
다만,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것이 하나 있긴 했다. 힉스에 도착하자마자 느꼈던 파장.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파장이 테이블 옆 가벽 너머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그 파장에 무언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간 자주 보았던 이비엔의 호위 기사가 요란한 뜀박질 소리와 함께 힉스로 달려들어 왔다.
가볍게 목례해 보인 기사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듯 곧장 이비엔에게 다가가 뭐라 뭐라 속삭였다.
“이런, 지안. 잠시 보고를 받으러 다녀올게. 기사단장이 급한 일로 날 찾는데 그가 지금 힉스 앞에 있다는군.”
거짓말이라기엔 진실을 말하고 있고.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고 있다기엔 뭔가 수상쩍은 이비엔의 파장에 지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기사단장이 직접 힉스까지 찾아온 걸 보면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긴 건 확실했다. 그새 알레인의 군대가 더 가까워진 걸까?
“그렇게 하세요.”
이비엔은 대답을 듣자마자 기사와 함께 급히 자리를 비웠다. 지안은 홀로 남겨진 채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듯 분주한 분위기. 벽을 타고 전해지는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경직된 파장. 힉스의 입구 언저리에서 멈춰선 이비엔의 기척. 그리고……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숨을 죽이는 듯한 분위기.
‘대체 뭐지?’
막 몇 가지 가정을 떠올리려던 순간. 조명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더니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지안이 아는 멜로디였다. 프로포즈 고백송으로 유명한 지구의 노래.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테이블 옆 가벽이 움직였다. 고정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벽면이 커튼마냥 좌우로 열린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벽 너머의 광경에 지안은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뺨을 붉혀야 했다. 지구에서의 프러포즈를 흉내 낸 듯 바닥을 밝힌 촛불에, 잘게 뿌려져 있는 꽃잎들. 이것들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지안은 그제야 이비엔이 일부러 자신을 힉스로 데려왔다는 걸,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단 걸 깨달았다.
깜짝 프러포즈라기엔 힉스에 들어선 순간부터 두 사람의 파장을 알아차렸지만… 그거야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 호위로 따라온 줄로만 알았지, 이런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린 것인 줄 몰랐다.
놀라움과 함께 해안가의 파도처럼 감동이 몰려왔다. 지안은 미소 띤 얼굴로 촛불이 밝혀진 길 끝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준비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향해 걸어가자, 허공에 날리던 함박눈이 형형색색의 종잇조각과 워터 다프네로 변해 흩날리기 시작했다.
천장을 장식한 풍선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현수막, 그리고 반짝이는 꼬마전구까지. 그야말로 세심한 준비에 잠시 지구로 돌아온 게 아닐까 착각했을 정도다.
종종 각성자 센터 로비에서 벌어지곤 했던 공개 프러포즈들이 절로 떠올랐다. 늘 남의 일이라 생각해 지나쳤지만, 어쩐지 부러운 마음으로 흘긋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스쳐 지나갔다. 프러포즈의 주인공은커녕, 평생 지나가는 구경꾼으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내게도 프러포즈를 해 주는 에스퍼가 둘이나 생겼다.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난다더니 정말이었다.
감동을 못 이기고 입가에 손을 올린 지안은, 벅차오르는 전율에 그대로 얼굴을 가린 채 찔끔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 * *
제도로 돌아가는 내내, 알레인은 암담한 얼굴로 이멜다를 흘끔거렸다. 마차의 덧창을 통해 기사들을 바라보는 이멜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도에선 이렇지 않았다. 황태자라는 신분과 지위를 내세워 이멜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대관식과 함께 조촐하나마 꿈에 그리던 결혼도 마쳤다.
하지만 황후의 관을 쓴 이멜다를 바라보며 뿌듯해한 것도 잠시, 이멜다는 제도에서 떠나는 걸 택했다. 그리고 지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사람마냥 기사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알레인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