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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189/199)

190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아론은 말간 지안의 얼굴과 희미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허겁지겁 눈에 담았다. 당장이라도 닿고 싶다는 듯 손이 움찔거렸다. 입술 역시 저절로 열렸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절히 다시 만나기만을 여태 바라 왔던 주제에, 막상 지안과 마주치고 나니 말문이 턱 막혔다. 언어를 배우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마냥 모든 생각이 달아났다.

“…….”

충격을 받은 건 지안도 매한가지였다. 아론의 꼴이 너무 처참해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린 지안이 본 것은 눈에 띌 만큼 헐렁한 바짓단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발이 있어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을, 이 꼴로…….”

“이동 능력자라서 그 정도 조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옆에 선 이비엔이 다급히 변명했지만, 그 말은 조금도 지하의 참상을 가려 주지 못했다. 지안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최대한 흐린 눈으로 보려 했는데도 목도하기가 힘들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어?”

아론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말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그야…… 도망치기 싫었으니까. 미련한 짓인 걸 알면서도, 기다리고 싶었으니까. 가능성이란 거짓에 스스로를 속여도 좋을 만큼, 이 순간을 기다려 왔으니까.

하지만 막상 기대했던 순간이 찾아왔음에도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니, 됐어. 이유가 뭐든 궁금하지도 않아.”

지안이 묻는 걸 관두자 아론은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이제 그만하자. 각인해 줄 테니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멀리 사라져서 살아.”

멀리 사라져서 살라니. 어떻게? 눈에 띄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사라져 주는 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할 수 있고 없는 것의 유무를 묻는 게 아니었다. 아론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근처를 배회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지안의 손이 이마를 덮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 몸을 굳힌 아론은 다음 순간 밀려오는 환희에 떨었다. 실컷 비웃고 떠나도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 한대도 별수 없다고 여겼는데, 드디어 자신에게도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천천히 스미는 지안의 기운을 느끼며 아론은 그제야 제 속마음의 일부를 토해 놓을 수 있었다. 지안에게 각인을 받은 능력자들이 멋모르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 또한 차올라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

“난 아냐.”

가차 없는 부정에 후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러나 이해 못 할 분노는 아니었다. 아론은 기다렸다. 모든 능력자들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자신에게도 던져지기를. 좀 전엔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으나, 어떤 미래를 꿈꾸냐는 바로 그 질문에 꺼내놓을 대답만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인이 다 끝나는 순간까지 지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아론은 그냥 제가 말하기로 했다.

“네게 한 짓들을 후회해. 이 지경이 돼서야 하는 말이라고 비웃겠지만, 진심이야.”

그 말에 곧장 뒤돌아 나가려던 지안의 발걸음이 멈칫 굳어졌다.

“너와 처음 만난 장소가 노예시장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바다 위에서 네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네가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으니 모두 잊어버려.”

“뭐라는 거야? 지안. 듣지 마.”

이비엔이 만류했으나 딱 하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지안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날, 왜 나를 파리온으로 이동시켜 준 거야?”

“……바다 위에 네가 홀로 남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기막힌 대답이었다. 각인이 파괴되는 와중에 그런 걸 생각했다고? 도무지 곧이곧대로 믿어 줄 수가 없었다.

파장만 아니었다면 그냥 거짓말이라고 믿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동 능력자는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납치범 주제에 그런 걸 다 걱정했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못될 거면 끝까지 못돼먹은 놈으로 남을 것이지, 왜 그런 짓을 해서…….

“널 독차지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았어.”

“흥. 멍청하긴. 그걸 이제 알았나?”

이비엔이 지안을 대신해 아론을 비웃었다. 정작 아론은 황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그는 꽤 절박했다. 지금이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지안에게 말을 붙일 기회가 올 터였다.

“네가 능력자들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냐고 묻는 걸 봤어. 나는…… 너와 다시 만나고 싶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 더 이상 내게 분노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 그때 다시 만나.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론은 지안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공간을 갈랐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는 단언을 듣고 싶지 않아 도망치는 신세였으나, 그는 기대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당연한 일이지만, 아론의 행태에 이비엔은 몹시 분노했다.

“저게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틀림없이 날 열 받아 죽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

“진정하세요, 폐하.”

“지안, 넌 화도 안 나?”

“글쎄요. 근래 다시 나타날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덤덤한 소감을 마무리한 지안은 후회스러운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를 곧장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당장은 그가 순순히 사라져 준 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번 크게 데여 보았으니 어지간해선 다시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각인이 파괴되는 걸 바라는 능력자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아론이 말한 다시 만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 * *

황태후 폐하가 근심한 이유가 있긴 있었다. 알레인은 아무 계획도 전략도 없이 그대로 제도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다울 만큼 단순하디단순한 결론이었다.

“아무리 능력자라고 해도 이만한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많지는 않아. 들어 봐, 이멜다. 놈들은 우리가 제도 앞 평원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성문을 열고 항복해 올 거야.”

우스꽝스러운 주장에 이멜다는 피식피식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항복이요? 폐하. 저희가 평원에 당도한다 해도 성문은 열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성녀가 지닌, 몬스터를 쓸어 버린 성물에 대한 대책도 없이 제도로 향할 순 없어요.”

“하아. 황태후 폐하와 입이라도 맞췄나? 아주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는군. 제발. 이멜다. 그놈의 대책 좀 그만 따질 수 없어? 황제는 나야. 내 군을 어떻게 움직일지는 내가 결정해. 그렇게 나쁜 계획도 아니잖아.”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엔 폐하께서 말씀하신 전략의 성패가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아서요.”

“해보지도 않고 성패 운운하지 마. 넌 그냥, 내가 아니라 황태후 폐하의 결정에 따르는 것뿐이잖아. 황태후께서 널 앞세워 날 가로막으시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분이 제 행동반경을 다시 넓혀 주신 건 맞지만, 저는 딱히 황태후 폐하와 뜻을 같이하지 않아요. 저는 제 판단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제 의견을 따를지 거절할지 판단하는 게 바로 폐하의 몫이고요.”

“그렇담 더는 반대하지 마. 넌 황태후 폐하가 아닌 내 사람이야. 네가 지지하고 따라야 하는 건 나라고!”

한동안 씩씩거린 알레인은, 무료한 얼굴을 한 이멜다를 보고선 씁쓸하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더는 이런 시시한 일로 말다툼 벌이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많은데 왜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고 싸워야 하나?

무엇보다 알레인은, 진심으로 이멜다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그는 버럭 소리친 걸 만회해 보려는 듯 우물쭈물 항변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제도로 행군을 명한 건 아니야. 성녀가 지닌 성물? 그 점에 대해선 나도 충분히 염려하고 있어. 정예 기사를 제도로 보내서 탈취를 시도할 생각도 해 봤고. 하지만 그랬다간 괜히 민심만 더 나빠지잖아. 가뜩이나 제도를 버린 황제라고 말이 많은데. 상황이 더 악화될 거야.”

어설플지언정 그 항변은 효과적이었다. 이멜다는 뜻밖이라 여기며 슬며시 감탄했다. 그래도 위기가 온 것을 알긴 알았는지 굳은 머리를 굴려보긴 했구나. 잠자코 경청하는 이멜다의 모습에 알레인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이어 말했다.

“성녀는 제도를 지켜냈기에 성녀라고 추앙받는 거야. 제도를 위협하는 몬스터를 해결해 주었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지. 그렇기에 더욱 제도로 돌아온 군대를 몬스터처럼 쓸어 버릴 수 없을 거야. 그랬다간 성녀가 아닌 마녀가 되어 버리니까. 설혹 성물을 쓴다 하더라도 제국의 군대를 몬스터 처리하는 것마냥 학살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지. 민심이 우리에게로 돌아설 테니. 어찌되든 성녀는 우리가 제도로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나쁘지 않네요.”

드문 이멜다의 긍정에 알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너무 정공법이에요.”

“무슨 말이야?”

“아무 성과 없이 대치 상황만 길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성녀가 문도 안 열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요? 당장 우리는 지금의 군영을 유지하는 데만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소모하고 있어요.”

“그건 동부에서 세금을 걷어 해결하면…….”

“세금? 현재 동부의 귀족들은 저희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 자체를 불만스러워하고 있어요. 제도를 버리고 도망쳐 온 폐하를 어떻게 반길 수 있냐는 게 현재 동부인들의 입장이죠.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엔 저도 동의해요. 동부인들도 내심 그걸 바랄 테니. 잘하면 군비를 뜯어낼 빌미로 써먹을 수도 있겠죠.”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알레인은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이멜다는 그 한심한 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요점은, 정공법 외의 대안이 더 필요하다는 겁니다. 적어도 두세 가지 이상의 전략을 동시에 취해야 해요. 저라면 겉으로는 제도로 진격하는 척하며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무너뜨릴 거예요. 결국 문을 열 수밖에 없도록.”

“뭘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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