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좋습니다.”
“잠깐, 이렇게 멋대로 정하는 게 어디 있어!”
거칠게 항의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이비엔의 눈이 샐쭉하게 찢어졌다.
“뭐야? 왜 항의하는 거지? 정부라도 좋다던 사람은 어디 갔어?”
부정할 수 없는 지적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빠르게 심상찮아지는 모습을 본 이비엔은 언제 비아냥댔냐는 듯 답삭 입을 다물었다. 더 놀려먹었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자칫하면 머리카락이 죄다 불타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일리아스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짧게 반성한 이비엔은 크게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 이건 지안을 위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문제야. 생각해 봐. 공작부인으로 불렸다가, 황자비 전하로 불렸다가, 그럴 순 없잖아. 두 개의 호칭이 공존하는 건 가뜩이나 말 많은 사교계에선 책잡히기 딱 좋아. 공식적인 남편은 한 명인 게 낫다고.”
그쯤은 일리아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설득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본인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 있는데도 그랬다. 일리아스는 꾸깃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지안과 악시온 역시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인 탓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진 탓이었다. 다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입을 다문 걸 확인한 이비엔은 슬슬 당근을 꺼낼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며 콧대를 높였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봤지. 선례에 따르면 공적을 쌓은 황자는 간혹 대공으로 임명되기도 하더라고.”
“…아, 그러면……!”
“그래. 공작의 작위를 대공으로 높이고, 오라버니에게도 대공의 작위를 내리면 지안의 호칭을 ‘대공비 전하’로 통일할 수 있어. 남편이 누구인지 명확히 하지 않아도 되고. 사실 명확히 할 필요도 없지. 둘 다 남편이니까.”
그 말에 이야기는 곧바로 급물살을 탔다. 아니, 사실은 그조차 필요 없었다.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맞췄다.
협상이란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기에 협상이라 했던가. 대화는 불필요했다. 눈 깜짝할 사이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지구에서부터 암묵적인 공존을 이루고 있었기에 가능한 합의였다.
“나쁘지 않군요.”
“동감이다.”
미리 의논을 마치기라도 한 걸까. 동시에 나온 발언이 기가 막혔다.
“뭐야. 이렇게 빨리? 쉽게 결론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미리 논의라도 해 뒀던 거야?”
떨떠름한 얼굴로 물은 이비엔은 곧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쓸데없는 다툼이 없어 다행이긴 하군. 근데 알다시피 난 지금 임기 초임인 데다 정식 대관식도 못 치른 껍데기만 황제라서 대공의 작위를 당장 하사하는 건 조금 어려워. 그러니 빼도 박도 못할 공적 좀 세워 줘. 기왕이면 황권이 강화될 만한 거로. 빠른 시일 내에 그래 주면 더 좋고.”
물 흐르듯 도달한 결론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다.
다만, 지안에겐 조금도 완벽하지 않았다. 지안은 신이 난 이비엔과 그런 이비엔에게 완전히 설득되고 만 두 남자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어째 기가 막혔다.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이상하다 못해 멋대로 결론까지 내 버렸다.
훈훈한 설렘이 떠도는 협상 테이블 위로 지안의 질문이 던져졌다.
“제 의사는 어디 갔어요?”
“응? 그야 당연히…….”
“전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온실의 온도가 뚝뚝 영하로 떨어져 내렸다. 싱그럽게 피어난 온실의 장미들이 때아닌 서늘함에 화들짝 놀라며 잎사귀를 오므렸다.
곧 싸늘한 침묵이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악시온은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했다. 일리아스 역시 주먹을 쥔 채 굳어 버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비엔이 물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다는 말이지?”
조심히 질문했으나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지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다 보니 너무 오래 쉰 것 같아요. 휴식도 좋지만, 그만 집무실로 돌아갈까요, 폐하? 이제 겨우 능력자법 초안을 만들었잖아요. 다듬어야 할 세부 사항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대놓고 대답을 피한 지안은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런 지안의 손목을 악시온이 덥석 붙잡아 왔다.
“내가, 내가 부족해서 그러나?”
“네?”
“부족함이 있다면 메꾸겠다.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러나? 말해주는 즉시 고치겠다. 정말이다.”
간절한 음성에 뻣뻣이 굳어 있던 일리아스 역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발 뒤늦게 지안의 곁으로 다가간 일리아스는 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는 것도 몰랐다.
“대답해 줘. 갑자기 왜? 이유가 뭐야? 갑자기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아니면, 내가 귀찮게 굴어서 그래? 계속 치근거려서 화가 났나? 더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네가 싫다는 건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도 않은 잘못을 만들어 사과할 것 같았다. 지안은 손바닥을 들어 일리아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만. 두 분 다 진정하세요.”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에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안은 언짢음과 서운함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대체, 제 앞에서 결혼을 운운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건 다 어디로 간 거예요?”
그것은 명백한 항의였다. 다만 지안이 왜 화가 났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창백한 얼굴로 수십, 수백의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배려가 부족해서? 결혼이란 중대사가 너무 갑작스럽고 빠르게 거론돼서? 따지고 들자면 원인도 이유도 다양했으나, 지안의 심사가 비틀려 버린 결정적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지안의 입에서 그 이유가 튀어나왔다.
“……반지 하나 없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겐 벼락보다 더 큰 소리였다. 뒤늦은 깨달음이 두 남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걸 본 지안은 작게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온실을 벗어났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도 지안을 붙잡지 못했다.
* * *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잠을 깨웠다. 황녀의 이능에 당해 손상을 입었던 청력이 다소나마 돌아온 것이다. 회복은 청력에만 적용된 게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손가락 끝도 어느새 다시 형태를 회복하고 있었고, 멎지 않을 것 같았던 다리의 출혈도 그새 멈춰 있었다.
‘이만큼이나 몸이 회복된 걸 보면…… 꽤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나.’
아론은 처음으로 제가 타고난 능력자로서의 치유력을 원망했다. 수십 가지의 고문 앞에서 능력자 특유의 회복력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딱히 황녀의 고문이 특출나거나 지독한 건 아니었다. 고귀하신 황녀께서 고문에 재주가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어떤 면에선 스스로를 벌주는 마음이 충족될 때도 있었다. 비록 손톱이 날아가고. 귀 옆에서 종종 폭발이 일어나 이명으로 괴롭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론의 기준에서 정직한 고문에 속했다. 각오했던 것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한달까.
고문보다 더 지독한 건 따로 있었다. 시시각각 숨통을 죄여 오는 폭주의 고통. 불완전한 각인이 시간의 흐름을 못 이기며 조금씩 허물어질 때마다 아론은 초조해졌다.
황녀가 가한 고문의 상흔은 하루 이틀 사이 금세 아물어 가는데 폭주의 고통만은 점점 더 지극해졌다.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이기에, 한 번 겪은 흐름이기에 도무지 폭주에 다다르는 과정을 다시 견딜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공간의 틈새에 몸을 내던져 단숨에 죽어 버리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게 더 현명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마음 역시 점점 빛이 바래 갔다. 바로 어젯밤, 실컷 화풀이를 마친 황녀가 남겨 두고 간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네가 내내 물었던 대답. 지금 해 줄게. 능력자들의 각인은 모두 끝났어. 서부와 남부 끄트머리에서 출발해 뒤늦게 제도에 도착한 능력자들도 죄다 각인을 받았지. 그마저도 최근부터는 뜸해져서, 이젠 이쪽에서 능력자를 찾아내야 하는 판국이야. 왠 줄 알아? 지난 3일간, 각인이 필요하다며 지안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널 제외하고 이 나라의 모든 능력자가 각인을 다 받은 거지.’
‘…….’
‘그렇지만 이후로도 네 차례는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지안이 널 두고 했던 말, 기억하지? 그렇게 순하고 소심하던 사람이, 생쥐 하나 못 죽이는 지안이 너만은 예외로 뒀어. 그만큼 네가 싫은 거지.’
차라리 듣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말을 듣기 전에 청력이 손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미 들어 버린 건 어쩔 순 없었다. 못 들은 척 잊어버릴 수도 없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조차 기만이었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처음의 각오가 얼마나 허망했던 것인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통렬히 깨달으며 아론은 명백히 미쳐 갔다.
그러는 사이 벌컥 문이 열렸다. 보나마나 황녀일 것이 뻔해서 그는 몸을 뒤척이지도, 눈자위를 굴리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아론이 지안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황녀가 재미 삼아 던져 댔던 단검 하나가 벽에 박힌 채 지안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던 것이다.
유령을 만나도 이렇게 놀랄 순 없을 것 같았다. 아론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아주 잘못 본 건 아닌 것도 같았다. 죽음의 순간에는 언제나 후회가 함께 한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환상이라도 보기 좋았다. 기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딱 그만큼 죄책감이 일었다. 검면으로 그녀를 훔쳐볼 면목조차 없게 만드는 과오들이 심장의 박동에 발맞추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론은 지안이 어둡고 스산한 지하 감옥에 직접 방문한 것이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스며드는 지안의 기운이 반쯤 망가진 정신을 차갑게 일깨웠다. 아론은 그제야 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말 지안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을 서둘러 일으켜 앉았다.
“아…….”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