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7/199)

188화

짐짓 가벼운 어투였으나. 이길 도리 없이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앓는 소리를 몇 차례 낸 이비엔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하. 알겠어. 알겠다고. 오늘 밤에 나랑 같이 지하 감옥으로 가자.”

“감사해요 전하.”

이비엔은 배시시 웃는 지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전까지 한참 정책을 논의 중이었으나, 더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온실에 갈 건데 같이 가.”

아예 서류를 정리해 버리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이 되물었다.

“갑자기요?”

“기분전환이 필요해. 마침 식물을 성장시키는 이능을 가진 능력자를 황성 정원사로 뽑았거든. 겨울에 피지 않는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들었어. 구경하러 가자.”

“좋아요.”

그렇게 온실로 이동한 지안은, 도중에 투덜대는 이비엔을 몇 번이고 달래야 했다.

* * *

이비엔의 장담대로 온실은 기막힐 정도로 화려했다. 지구의 식물원도 이처럼 다채롭거나 아름답진 못할 것이다. 향긋한 이끼와 화려한 장미의 조화가 절묘했다. 온갖 꽃향기에 폐가 다 향기로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갖는 티타임 역시 나쁘지 않았다. 한숨 돌리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겠다 싶을 만큼 좋았다.

“정원사를 정말 잘 뽑으신 것 같아요.”

“후후. 사실 뽑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 자원한 거니까. 아마 저 꽃들 모두 너 보라고 피어있는 걸걸.”

이비엔이 사실에 가까운 유추를 하는 사이, 온실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병력의 움직임을 살피려 정찰병으로 뽑힌 능력자들을 이끌고 잠시 제도를 떠났던 시온이 돌아온 것이다. 지안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악시온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지안을 껴안은 악시온은 부드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다녀왔다.”

담백한 인사를 마친 악시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로브 안에 감춰둔 작은 다발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선 워터 다프네라 불리는 들꽃이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지안이 화색 어린 표정을 짓자 악시온은 머쓱해하며 슬며시 덧붙였다.

“오는 길에 보이기에…… 그대가 생각났다.”

한 송이 한 송이가 화려하진 않지만, 별꽃같이 촘촘한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한껏 피어나 있었다. 온실의 향기와는 결이 다른 서늘하고 은은한 향취였다. 마치 북부의 눈 냄새 같았다. 눈보라에도 향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냄새가 아닐까.

“고마워요, 시온.”

간지러운 설렘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그래도 지안은 사정이 나았다. 악시온은 발가락이 아닌 심장이 오므라들고 있었으니까. 숨 죽여 반응을 살피느라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지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자, 악시온은 홀린 듯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철철 흘러넘치는 마음이 금방이라도 형태를 갖춰 툭 떨어지는 심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래서일까, 그가 준 들꽃이 방금 봤던 온실의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게다가 지난 3일 동안 그가 떠나 있어서 그런지,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절로 샘솟았다. 생각하기 무섭게 몸이 움직였다.

쪽.

지안의 입술이 아랫입술 위로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악시온은 자신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계속 기다렸어요. 언제 돌아오는지 궁금했…… 흡!”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악시온은 지안의 허리를 끌어안고 작은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읍. 응. 작게 항의하는 소리를 연신 집어삼키며 샅샅이 핥고, 문지르고, 삼켰다.

예고 없는 입맞춤에 지안은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달콤했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이끌렸다. 더없이 갑작스러운 데도, 싫지 않았다. 아니, 황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호흡이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악시온은 지안의 숨이 할딱할딱 넘어갈 즈음이 돼서야 느릿느릿 입술을 떼 주었다. 숨을 들이켜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과 입술의 간격이 손가락 한 뼘도 안 될 정도로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실제로 악시온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출 기회만을 엿보는 중이었다. 지안이 뭐라든 무시하고 다시 한번 저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한 번으론 부족했다. 단순히 아쉬운 것에 그치는 부족함이 아니었다. 모든 게 턱없이 부족했다. 입맞춤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욕망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안이 밀어낸다면 곧바로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악시온은 잠시 놓아 버린 이성의 끈을 다시 부여잡은 채 눈치를 살폈다.

때맞춰 흐려진 지안의 눈동자 위로 천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반짝이기 시작한 눈빛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살짝 벌어져 반들거리는 입술은 석류보다 더 예뻤다.

저 입술로 내게 무슨 말을 할까. 폐하께서 보고 계신데 무슨 짓이냐는 쓴소리를 듣게 될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안은 발개진 얼굴로 흘겨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로 그녀의 손이 조용히 올라왔다. 살짝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악시온은 그들이 침실이 아닌 온실에 있음을 애석해하며, 그리고 그 불온한 애석함을 지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느긋하게 지안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보다 노골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그 애정 행각에, 이비엔은 어처구니없어하며 지안에게서 받은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나야. 나 지금 지안과 함께 온실에 있는데, 시간 있으면 와서 차라도 마시고 가.”

반은 심술로, 나머지 절반은 질투와 언짢음으로 일리아스에게 무전을 보낸 이비엔은 곧 돌아올 공작의 반응을 기다렸다. 들으란 듯 말했으니 뭐라도 반응이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정신이 팔리기엔 악시온은 너무나 열중해 있었다. 정신이 없는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깨물릴 때마다 생소한 전율이 일어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 사람의 키스는 일리아스의 파장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온실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 * *

일리아스는 온실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지안의 입술이 살짝 부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작이 돌아와 있었다. 녀석이 어딘가 징그러운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지안은 시선조차 마주쳐 주지 않은 채 손에 든 꽃을 감상하는 중인데. 눈이라도 맞춰 보려 열심히 헛수고를 하는군.

그러나 이어진 악시온의 말이 무섭도록 경각심을 일깨웠다.

“지안. 워터 다프네의 꽃말을 아나?”

“잘 몰라요. 뭔데요?”

“……꿈속의 사랑.”

암만 봐도 같잖은 수작질인데. 지안은 그 말에 넙죽 넘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덧없는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늘 가이드가 나타나길 꿈꿨다.”

더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부러 크게 인기척을 내면서 지안에게 향했다. 단단히 훼방을 놓아 주마.

하지만 지안이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마주치자 찬물을 맞은 것처럼 흥분이 가라앉았다. 가이드 앞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 센터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조언과 주의사항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뭣보다 지안이 난처해하는 건 자신도 바라지 않았다.

“흥. 내가 알기론 그런 간질거리는 꽃말이 아니던데? 워터 다프네의 정식 꽃말은 불멸이야. 도감이나 좀 찾아보고 말해.”

다소 고의적인 핀잔과 함께 일리아스는 반질거리는 지안의 입술을 모른 체하며 지안의 볼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동시에 공작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견제의 현장을 눈앞에서 보게 된 이비엔은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괜히 불렀나…….”

중얼거리며 이비엔은 괜스레 헛헛해했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물고 빠는 거야 이상한 일도 아닌데, 뭔가 억울하고 분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분하다는 게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이븐의 말이 맞았다.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한 번도 불만을 품어본 적 없는 스스로의 성별에 최초의 불만을 가지며, 이비엔은 자신이 분명한 이성애자임을 애석해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이비엔이 어처구니없는 불만을 소화시키는 와중에도 일리아스는 연신 지안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과시하는 게 빤한 그 행위를 참다못한 지안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내내 어딘지 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비엔은, 세 사람이 착석을 마치자마자 내내 의논을 미뤄두고 있던 화두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지안. 앞으로의 거취는 어떻게 할 셈이야? 혹시 생각해둔 게 있나 해서.”

“거취요?”

“응. 성녀라는 직함을 평생 지킬 건 아니잖아. 그랬다간 신전 세력이 너무 강해지기도 하고……. 네가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네 신분을 정확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이비엔의 에두른 화법을, 지안은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이비엔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난, 공작과 오라버니 중 누구와 결혼할 건지를 묻는 거야.”

“네? 결혼이요?”

“그래. 결혼. 참고로 선택지는 두 개야. 공식적으로 북부의 공작 부인이 되는 것, 황자비로 황성에서 머무는 것. 개인적으로는 네가 황성에 머물러 주길 바라지만……. 나는 정부라도 좋다고, 누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으니 공작 부인 자리도 나쁘지 않다고 봐. 다만, 이건 지안이 제도의 공작저에 거주하는 걸 조건으로 하는 말이야.”

마지막 말은 자신이 아닌 시온에게로 향해 있었다. 주말 부부도 아니고 아예 기러기 부부로 만들어 버리는 이비엔의 발언에 지안은 기함했다. 반면 악시온은 이비엔의 막무가내 조건에도 불구하고 몹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무려 지안의 공식적인 남편이 되는 거다. 눈에 불을 켜고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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