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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186/199)

187화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인 건 잠깐이었다. 황태후는 이내 한 번도 쓸쓸함이나 허탈함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형형히 눈을 빛냈다.

“호사가들과 만담꾼들이 말하길, 에다의 성녀가 잊혀진 성물과 함께 돌아와 몬스터를 쓸어 버렸다는구나. 심지어 피해가 전무하다는 얼토당토않은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두꺼비가 몸을 부풀리듯 허세를 부리는 게지.”

픽 비웃은 황태후는 서늘히 일갈했다.

“제아무리 황성을 장악해 봤자 체계 없는 오합지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 늦지 않게 그녀가 지닌 성물을 빼앗으면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다. 반발과 오명이 뒤따르겠지만, 무력이라면 우리도 충분하다. 몇십만의 병력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어떤 위험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터.”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찬 병력이자 병약한 무력에 불과합니다. 제도를 떠난 순간부터 저희는 명분을 잃었어요.”

“명분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어떤 오명이 따르든 뒤집어쓰지 못할 것도 없다. 모든 불명예는 알레인이 짊어질 거다.”

“저와 대책을 논의하러 온 게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오신 거군요.”

“거절할 테냐? 내 수중에는 네가 그토록 각별히 여기는 치유 능력자가 있다.”

둘러 말하지 않는 협박에 이멜다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반응은 그걸로 충분했다. 우아하게 미소와 함께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너라면 방도를 알 거라고 믿는다.”

“폐하께서 절 찾으신 걸 알레인도 아나요?”

“알아야 할 자격이 그 애에게 있나?”

“없죠. 하지만 그는 황제예요. 그 자체만으로 모든 명분과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죠. 그리고 알레인은 더 이상 제 말을 따르지 않아요. 제가 나서는 걸 그가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덩달아 반발하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고.”

이멜다의 말에 황태후의 얼굴 위로 시린 비웃음이 내려앉았다.

“이멜다. 내가 널 찾아서 의기양양했느냐? 잠자코 들어 주려 했더니. 답지 않게 투정을 부리는구나.”

그 말을, 이멜다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와 부정적인 확률을 죄 거론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반발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심리를 대놓고 지적한 데 이어 투정이라 매도당하다니. 퍽 굴욕적이었다. 황태후는 이멜다의 창백한 낯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언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냐는 듯 다정히 웃어 보였다.

“날 상대로 어쭙잖은 논리를 펼치지 말렴. 알레인도, 그 아이에게 아첨하며 흥분하는 머저리들도 네겐 전혀 방해물이 아니잖니. 게다가 군사력 전체를 가리켜 병약한 무력이라 운운한 네 말대로, 지금 이 상황에 불안해하고 반감을 느끼는 자들이 더 많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이멜다. 나는 네가 다시 너의 쓸모를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거다.”

기회라는 탈을 쓴 이용이었으나, 황태후가 방문한 시점에서 이미 정해진 결론이다. 이멜다는 주저하지 않았다.

“우선, 정보가 필요해요.”

“당장 오늘 밤부터 군영 회의에 참석하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요구해라.”

“그렇다니 말씀드리죠. 제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카리나를 풀어주세요.”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러겠다고 약속하지.”

“그걸로는 부족해요. 제가 안심하고 타개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카리나를 제도로 보내 주셔야겠어요.”

“그럴 순 없다. 치유 능력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기를 올려. 병사들이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근거가 되고 유사시엔 여벌의 목숨이 된다. 쓰임새가 많은 패야. 활약이 두드러지는 기사들을 몇 되살려 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전세를 뒤집을 수…….”

“그랬다간 반드시 폭주할 겁니다. 카리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요.”

고요한 음성 아래 분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멜다의 분노와 절박함은 황태후에겐 나비의 날갯짓처럼 하찮고 무용했다.

“혹사하진 않도록 하마.”

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용건을 마친 황태후가 자리를 떠나자. 이멜다는 곧바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카리나가 이능을 사용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걸 전제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불가능해.’

명분은 이미 빛이 바랬고, 성물을 빼앗는 일도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설혹 빼앗는 데 성공한다 해도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무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제국민들은 제도로 돌아온 황제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 카리나는 이용당할 대로 당하다 폭주해 버릴 테고.

‘그렇다면 차라리…….’

이멜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감옥과 다름없었던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매번 제지를 가해 오던 기사들이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며 이멜다는 펄럭이는 테리온의 깃발을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한때는 에를랑겐 후작저의 깃발을 올려다보며 자랐었다.

‘깃발의 문양만 달라졌을 뿐이야.’

평생을 주어진 환경에서 도망치려 노력하며 살아왔는데도, 그렇게나 발버둥을 쳤는데도 매번 도망칠 곳이 없다. 피난처로 나아갈 길이 계속해서 사라진다. 꺾이려는 마음을 다잡아 일으키는 것도 이젠 힘에 부쳤다.

마음 깊숙이 엉겨 붙은 설움 위로 기름이 끼얹어진 것 같았다.

* * *

축제와도 같은 하루와 3일, 일주일,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동부에서 주둔 중인 황제군이 제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충분히 들려오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제도의 제국민들은 무슨 염치로 돌아오는 거냐며 알레인과 휘하 황족들을 비난하는 동시에 불안해했다. 곧 전쟁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축복을 받은 능력자들이야 성녀의 권유에 따라 황녀를 황제로 지지한다지만, 힘없는 평민들은 달랐다. 밀려드는 몬스터로부터 제도를 구해 준 것은 고맙지만, 영웅이자 성인으로 떠받든 사람이 불러온 전쟁의 북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서진 벌집과 제도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이비엔은 최대한 혼란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준비된 군주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만큼, 더욱더 노력해서 최대한 그럴싸한 군주처럼 보여야 했다.

하지만 이비엔이 열심히 갈고 닦은 위엄과 권세, 몇백 번의 연습 끝에 연출할 수 있게 된 근엄한 황제의 표정은, 현재 지안의 한마디 말로 인해 손쓸 도리 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폐하. 아론은 어디 있어요?”

함께 능력자들의 등급 분류와 활용 정책을 논의하던 중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지안이 이름을 거론하는 걸 보아 꽤 고등급의 능력자인 모양인데. 왜 나는 그 이름이 낯설지? 이비엔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아론? 그게 누군데?”

“……이동 능력자 말이에요.”

고뇌하듯 두 손을 모아 턱 앞으로 끌어당기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본능과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놈은 왜 찾아?”

“얼마간 살아 있을 정도로 기운만 불어넣고 각인은 해 주지 않았거든요. 사람 목숨 가지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제가 화가 나서 속 좁게 굴었어요. 이븐에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전하께선 아시는가 해서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끝까지 입을 다문 이븐을 속으로 칭찬하며 냉큼 대답했다.

“나도 몰라.”

다급히 그 말을 뱉어놓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지안에겐 거짓말이 안 통하지.’

이비엔은 서둘러 제 말을 정정했다.

“사실 알고 있는데. 알려주고 싶지 않아.”

그러나 눈매를 좁힌 지안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폐하. 저는 능력자의 파장을 감지해요. 이동 능력자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요.”

“…….”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저를 기사들이 막아섰는데, 왠지 낯이 익었어요. 시녀 생활을 할 때 폐하의 궁에서 몇 번 마주쳤던 기사들이었거든요.”

벌써 갔다 왔구나. 이비엔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이마를 짚었다. 난관에 봉착한 것마냥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유가 뭐야. 갑자기 왜 그놈을 만나려 하는 건데.”

내키지 않아 하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새벽에 잠시 깼는데, 폐하의 파장과 아론의 파장이 같은 위치에서 느껴지는 걸 알게 되었다고?

고민하는 잠깐의 틈을 타, 이비엔은 얼른 지안을 설득했다.

“그놈은 죽어도 싸! 네가 그렇게 관대하게 굴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고! 널 노예시장에서 사려고 한 데다 아르킨의 말로는 죄 없는 선주까지 죽였다던걸!”

“구제하기 꺼려지는 악인이긴 하죠.”

이비엔은 공감을 끌어낸 즉시, 열렬히 주장했다.

“들어 봐, 지안. 세상엔 쓰레기가 많아. 죽을죄를 지은 놈이 사형당하는 건 마땅한 일이고.”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는 지켜져야 해요.”

“권리? 지금 권리라고 했어? 지안! 범죄자의 권리는 어디에도 없어! 있어서도 안 되고!”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으나. 거기에 넘어가 줄 순 없었다.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제가 사는 곳의 가이드법은, 신변의 안전이 확보되는 상황에 한해 폭주에 이른 에스퍼를 외면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어요. 지금의 전 무척 안전하고, 호위도……”

“그건 지구의 법이야. 더는 따를 필요 없다고. 이곳의 황제는 나야.”

극심한 반대에 지안은 난처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게 주장을 굽히겠단 신호는 아니었다. 이비엔이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린 지안은 조심스럽게 설득의 방향을 바꾸었다.

“폐하께선, 절 위해 폭주를 선택하셨죠.”

그것이 설득의 전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만큼 화가 났다.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비엔은 그를 진작 죽여 버리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려 아껴둘 게 아니라, 첫날 그 자리에서 사형했어야 했다. 그렇게 후회하는 사이, 지안의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감당할 만한 고통이었던가요? 범죄자라면, 악인이라면 마땅히 겪어도 좋을 고통이었나요?”

할 말이 없었다. 원수라 해도 이런 고통은 겪지 않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끔찍했다. 육신이 망가지고 영혼이 쪼개지는 고통이었다.

“폐하.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남잖아요. 저는 그 후회를 조금 줄이고 싶은 것뿐이에요. 악몽을 꾸게 되진 않을까 조금 뒤숭숭하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이건, 절 위해 내린 결정이에요. 설마 제가 악몽을 꾸길 바라시는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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