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못 해도 하루는 지난 것 같았다. 거듭 지하로 끌려오던 능력자들도 더는 없었다. 아론은 텅 비어 버린 눈동자로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지안이 어둠을 뚫고 나타날 것 같았다.
단지 희망 사항일 뿐,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바로 그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남아 있는 건 분명 바보 같은 짓인데…….’
하지만 도무지.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다.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안 덕분에 간신히 진정된 폭주가 다시 시작될까 두려워. 이동 능력조차 다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 따위를 고려해 보며 아론은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신의 자비와 용서를 찾는지를 뒤늦게 이해해 나갔다.
쓰레기같이 여겼던 그것들이 처음으로 간절히 필요했다. 지안이 내뱉은 서늘한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놈은 이동 능력자야. 다시 널 납치하려 들 수도 있어.’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다시 제 앞에 나타나면 죽게 될 거란 걸 이젠 알 테니까.’
제게 들으라는 듯 경고성 짙은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과를 받아들여 줄 것이란 어설픈 기대를 한 건 아니었으나 뼈아픈 통증만은 분명하게 남았다. 손쓸 도리 없이 망가진 희망이 발치를 덩그러니 뒹굴었다. 심장이 물 먹은 종잇조각처럼 너덜너덜했다.
아론은 천천히 지안의 말을 곱씹었다.
‘그때 널 제대로 죽였어야 했어.’
알아. 그래야 했겠지. 내가 널 화나게 하고, 미치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그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얼마나 막막했는지 알아? 너는, 너는 벌레만도 못한 새끼야.’
비열해지지 않는 법을 나는 몰라. 늘 위협을 통해 원하는 걸 얻어왔고 그게 내 방식이었어.
홀로 문답하며, 아론은 닿지도 않을 변명을 지껄였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퍽 어처구니없는 항변이었다. 여태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의 이기심이 이제야 겨우 인식될 정도였다.
어렴풋한 자각과 그것이 불러들이는 객관성이 야속했다. 억울해할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밀려드는 서러움을 도무지 소화해 낼 수가 없었다.
뒤이어, 제도의 뒷골목을 장악하며 제가 짓밟은 이들에게서 무수히 들어왔던 저주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너는 세상에 다시 없을 사악한 새끼야.’
‘넌 죽어서 지옥에 갈 거다. 장담하지. 악마도 널 보면 혀를 내두르며 침을 뱉을 거야.’
‘더러운 새끼. 너처럼 몹쓸 종자는 처음 봤어. 저주받아 칵 뒈져 버려라!’
그 저주가 통하기라도 한 걸까.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마침내 되돌아온 걸까.
그러나 굳이 저주가 아니더라도, 대륙의 모든 능력자들이 구원받는 와중에 자신만 제외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악하다는 말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론은 어둠을 뚫고 이비엔이 나타났을 때,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꼴 보기 싫다는 듯한 표정과 악담에 그친 지안과 달리, 황녀는 무자비했다. 예고도 없이 가장 먼저 두 다리가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아론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꼴 좋네.”
뚜벅뚜벅 어둠을 가르며 걸어온 이비엔의 입가엔 잔혹한 비웃음이 내걸렸다.
“더는 걷지도 뛰지도 못하게 된 소감이 어때? 바닥을 기는 네 모습이 잘 어울리기에 좀 더 쉽게 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줬는데. 마음에 드니?”
대답 대신 힘겹게 숨을 들이켠 아론은 충혈된 눈으로 이비엔을 노려보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느릿한 폭주상태에 놓여진 채 공간을 가르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한 번은 성공했으나 두 번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다.
아니, 사실 그런 보장을 다 떠나서, 여기서 기다리고 싶었다. 모든 능력자들의 각인이 다 끝난 후엔 내게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아론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두었다.
‘황녀가 분풀이를 끝내고 나면, 그러고 나면 그녀를 볼 수 있게 해 주지 않을까.’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아론은 기막혀했다. 어쩌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스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뻔뻔하고 대책 없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매달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아론은 부릅뜬 눈에서 힘을 풀며 이비엔에게 애원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부탁을 주워섬겼다. 자존심을 버려서 동정을 살 수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뭐든 못 할 짓이 없었다.
“원하는 만큼 분풀이해.”
“하아?”
“죽으라면 기꺼이 죽어 주지. 몸이 조각나도, 묘비 하나 없이 산채로 파묻힌대도 원망하지 않겠어. 맘대로 해. 다만, 부탁이니 한 번만, 한 번만…… 그녀를 만나게 해 줘.”
“누구를? 지안을? 너 다리가 날아가는 걸로는 부족했구나? 너처럼 분수를 모르는 놈은 처음 봐. 귀 똑똑히 열고 들어. 장담하는데, 넌 오늘 여기서 죽게 될 거야. 그러니 가당찮은 희망 품지 마. 아. 혹시 이거 날 더 화나게 만들려는 수작이니? 그렇다면 축하해. 완벽하게 성공했어.”
“제발…….”
들어줄 가치 없는 애원이었다. 이비엔은 아론의 손톱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비명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이븐조차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슥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각인을 받은 수많은 능력자들이 행복한 단꿈에 한참 빠져 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홀로 비참한 상황에 처한 아론이 가진 것이라곤, 각오 하나뿐이었다.
* * *
군영이 시끌시끌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한 것도 잠시, 이멜다는 곧 관심을 끊었다. 소란을 알아 봤자 알레인이 제 말을 듣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혹 알게 된다 하더라도 호기심이 해소되는 것 외엔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기보단, 그사이 황태후 폐하께 잡혀 있는 카리나를 어떻게 빼돌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더 현명했다.
하지만 수중에 돈도 없고, 손발처럼 쓰던 간자들도 모두 잃었다. 제도에서부터 내내 낮에는 마차에, 밤에는 막사에 갇혀 밤낮으로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하….”
이멜다는 조소했다. 개 같은 아비에게 실컷 얻어맞던 날에도 행동력 하나만은 잃지 않았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돌아가는 상황이 영 기막히고 수상쩍은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진창에 빠진 것처럼 갑갑했다. 매일 아침 장미꽃다발이나 가져와 화병에 꽂아다 놓는 알레인의 행동에도 신물이 났다.
그러나 변화는 깊숙한 진창에서도, 차디찬 빙하 속에서도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다. 이멜다는 개입의 여지가 생길 사건이 일어나기를, 제게 주어진 기회를 때맞춰 포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점점 더 부족해져 가는 인내심을 다졌다.
바로 그 인내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차 한잔을 비울 시간이 지났을 즈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와 이멜다에게 군영을 뒤집어 놓은 소식을 알려 주었다.
“제도로 몰려오던 몬스터가…… 궤멸되었다고요?”
이멜다의 반문에 황태후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북부에서부터 제도 인근의 영지들을 파괴하며 밀려들던 몬스터가 하루아침에 궤멸될 리 없다. 게다가 소식을 전하는 황태후의 낯빛이 특히 어두웠다. 뭔가 더 있구나.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인근 영지의 군대를 총동원한대도 전혀 승산이 없었을 텐데요. 대체 누가 그런 업적을 이뤘단 말이죠?”
업적. 바로 그 단어가 황태후의 심기를 뒤집어 놓았다.
“에다의 성녀가 죽음을 딛고 돌아왔다더구나.”
아무리 찾아도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했던 지안의 소식에 이멜다의 동공이 떨리며 팽창했다. 황태후가 거슬려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활짝 웃으며 반색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멜다는 곧장 카리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성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카리나를 살릴 수 있어!’
거센 흥분이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가 심장을 뛰게 했다. 이멜다는 이성의 고삐를 죄며 짐짓 표정을 굳혔다. 한때 조력자였던 황태후는 이제 자신의 적이었다. 어떤 조그만 반응도 단서도 내비쳐선 안 됐다.
“이 사실을 제게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알레인이 주도하는 회의를 엿보고 왔다.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골치 아프단 얼굴로 이마를 짚어내는 황태후의 손바닥 너머로 깊게 패인 주름이 보였다. 기세등등하던 평소의 위엄과 고귀함은 어디로 갔는지. 잠깐 사이 몇 년은 더 늙어 버린 듯했다.
무리도 아니다. 알레인, 황태후 폐하의 황태손이자 황제인 그는 일개 평민이 아닌 테리온의 군주였다. 그리고 지도자의 무능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황태후 폐하는, 바로 그것을 보고 온 것이리라. 그의 무능이 어떻게 죄악으로 재탄생하는지를 목격한 게 틀림없다.
이멜다는 그녀가 받았을 충격을 이해했다. 성군으로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선황제는 황제로서 훌륭했다. 결단력과 정치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었고, 부족한 지혜를 타인에게서 구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런 선황제를, 황태후는 퍽 자랑스럽단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물줄기처럼 알레인에게도 공평히 흘렀을 것이다. 녹빛 눈을 지그시 눌러 감은 황태후가 말했다.
“나라고 알레인의 부족함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한데, 이제 보니 네가 알레인을 지나치게 잘 보필했구나. 내가 알았던 알레인의 모든 장점은 모두 네가 만들고 전시한 거였어.”
“과찬이십니다.”
“지식은 돈과 시간이 있으면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배움에서 지혜를 함양하지 못하는 것도 괜찮다. 언제든 타인의 지혜를 빼앗아오면 되니까. 하지만 타고난 인성이 게으르고 무력한 건 뭘 어찌해도 고칠 수 없지.”
언제나 알레인을 옹호하던 황태후 폐하답지 않은 신랄한 말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음성엔 희미한 후회마저 섞여 있었다.
“카디스를 엄격하게 대하는 건 쉬웠다. 목표가 분명했거든.”
선황제를 거론하는 황태후의 눈가로 옅은 물기가 내비쳤다.
“하지만 카디스의 아들인 알레인에게마저 그러는 건 어려운 일이었어. 남들은 이상적인 황제와 황태후의 관계라고 보았을지도 모르겠다만, 겉으로만 그럴 뿐 정상적인 모자관계는 아니었지. 나는 늘 후회했다. 카디스를 다그치고 몰아붙이다 결국 소원해졌으니까. 그래서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알레인을 대했다.”
“…….”
“그랬는데, 내가 또 일을 그르쳤군.”
강철과 같은 근엄함이 그 토로에 모두 녹아내렸다. 바로 코앞에서 마차가 질주해 와도 이렇게 놀라진 못할 것이다. 이멜다는 반쯤 아연해진 기분으로 황태후의 후회를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