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이에 화들짝 놀란 악시온은 까무룩 잠들어 버린 지안을 샅샅이 살폈다. 안색이 창백하진 않은지, 호흡은 정상인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러길 십여 분, 악시온은 일리아스의 지적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은근슬쩍 그만 주물거려. 그냥 피곤해서 잠든 거잖아. 내놔. 너같이 얼빠진 놈한테 지안을 맡길 순 없으니.”
악시온은 대답 대신 지안을 좀 더 안정적으로 받쳐 안았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걸 본 일리아스가 씨근덕거리며 따라붙었다.
“내놓으라고.”
“그랬다간 지안이 깰 겁니다. 그러고 싶습니까?”
비난 어린 말에 일리아스는 악시온의 어깨를 잡으려던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공작이 안아들자마자 안심한 듯 쓰러져 잠들고 만 지안의 모습을 목격한 탓이었다.
“젠장.”
분해하며 물러선 일리아스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 기막힌 말을 꺼내 이븐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같이 가. 넌 침대를 데우지도 못하잖아. 지안은 전기장판 없이는 깊이 못 자.”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며 복도로 사라졌다.
남은 건 입을 떡 벌린 이븐뿐이었다. 침대를 데운다니.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잖은가! 세상에, 피로에 지쳐 기절한 성녀를 상대로 그러고 싶을까? 그 전에, 당사자의 동의는 받은 것인가? 아무리 상대가 삼황자에 공작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저질스럽고 무례했다. 중간에 미처 알아듣지 못한 단어는 아마 그들만의 암구호나 은어일지도 모른다.
뒤따라가서 말려야 할까? 현장을 덮쳐야 하나? 하지만 그러기엔 삼황자 전하나 공작이나 너무 강한 능력자였다. 그녀는 에스퍼 간 등급에 대한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누가 더 강력한 이능력자인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븐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앞섰으나, 마냥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뭘 시도하든 승산이 없을 거야. 어쩌지? 어떡하면 좋아? 그래. 고발! 황녀께 고발해야 해!’
이븐은 그 즉시 이비엔을 찾았다.
마침 이비엔은 잔뜩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와 제도의 귀족들을 조용히 모아 놓고 회유와 겁박을 반복하고 있었다. 허탕을 친 짜증을 여기에 푸는 것이었지만, 다들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븐은, 날 듯이 달려 황녀가 있다는 회의장으로 난입했다. 황녀의 편에 선 능력자들과 기사 몇몇이 삼엄하게 회의장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쯤이야 아무 문제 없었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꼭 입구 하나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땅굴을 파 회의장의 바닥 아래서 튀어나온 이븐은 앞뒤 생각 없이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황녀 전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난입이 엄숙한 회의장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비엔은 호통을 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단 이븐의 말이 더 빨랐다.
“성녀님의 일입니다!”
그 말에 이비엔은 즉시 호통을 뒤로 미뤘다. 제도의 귀족들 앞에서 협박과 보상을 열심히 흔들어 대던 중이었으나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지. 다만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이비엔과 함께 회의장에 딸린 티룸으로 이동한 이븐은 황녀가 문을 걸어 잠그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께서 잠든 성녀님께 몹쓸 짓을 하시려는 것 같아요.”
“뭐? 말도 안 돼.”
“정말이에요. 삼황자 전하가 침대를 데우겠다고 하셨어요. 제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어서 막아야 해요. 저와 같이 가 주세요, 전하. 전하께선 그러실 수 있잖아요.”
“우선 진정해. 두 사람 다 지안에게 미쳐 있긴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이성이 없진 않아. 혹시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잘못 들은 거면 이렇게 달려오지도 않았어요.”
안절부절못하는 이븐의 모습에 이비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알겠어. 몰래 가 보자. 땅굴 좀 파 봐.”
이비엔의 지시에 이븐은 서둘러 성녀의 침실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굴을 뚫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지하 통로에 발을 디디며 이비엔은 골치 아프단 듯 중얼댔다.
“황성에 지하 통로가 너무 많이 생기는 기분이야. 쯧. 이런 건 다 기밀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이걸 메울 수도 없고.”
“제가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을게요. 지금은 우선 달려요!”
이븐의 성화에 이비엔은 별수 없이 지하를 달리기 시작했다.
침실까지 도착하는 건 몹시 쉬웠다. 거의 일직선으로 땅굴이 파인 덕분이었다. 다만, 지안의 침실은 3층이었다. 졸지에 암살자처럼 몰래 황성 등반을 하게 된 이비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문을 훔쳐보았다. 무작정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수상한 기척을 느낀 공작이 던진 검에 맞아 죽기 딱 좋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방법은 있는 법이다.
“드론을 좀 띄워 보자.”
“드론이라면, 성녀님의 성물 말인가요?”
“지안이 나한테 무소음 미니 드론을 선물로 줬어. 여기 이 네모난 건 영상석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데, 이걸 통해서 침실 안을 몰래 엿볼 수 있지.”
설마 이걸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중얼거린 이비엔은 곧장 드론을 가동시켰다.
수직으로 쭉 상승한 드론이 곧 침실 안을 비췄다. 마침 삼황자가 무방비하게 잠든 성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저…!”
소리를 치려는 이븐의 입을 이비엔이 틀어막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븐이 예상한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븐은 얼빠진 얼굴로 물수건을 든 삼황자를 응시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성녀의 얼굴을 닦아 내고 있었다. 뒤이어 신발을 벗긴 뒤 발도 닦기 시작했다. 어디로 봐도 잠든 애인의 수발을 들어 주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물수건으로 발을 닦아내다 말고 발등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는 일리아스의 행동에 이비엔은 잔뜩 미간을 구기며 드론을 회수했다.
“내가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제가 오해한 것 같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죄하는 이븐의 모습에 이비엔은 하, 한숨을 내쉬었다.
“봤지? 앞으론 적당히 모른 척해. 북부에서부터 동행했으니 이만하면 눈치껏 알 때도 되었잖아. 저 세 사람은 연인관계야. 침대를 덥히건 밤을 함께 보내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이라고.”
“그치만, 셋이잖아요. 전 난잡한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눈치는 저도 있어요. 곧 성녀님께서 누구 한 사람을 선택하실 줄 알았다고요. 근데 셋이라니, 그게 가능해요? 특히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을 서로를 무척 싫어하시잖아요. 하루에도 몇십 번씩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요.”
“그러니까 지안이 대단한 거지. 세상에는 꼭 필요한 공존도 있는 법이야. 지안과 접촉했을 때를 생각해 봐. 네가 남자라면 반하지 않고 배기겠니?”
“……이상할 만큼 호감이 샘솟아 당황스러웠죠. 생각해 보니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좀 아쉽네요.”
두 명도 된다면 세 명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표정에 이비엔이 코웃음을 쳤다.
“흥. 내내 고백을 거절당하는 능력자들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여태 지안에게 퇴짜맞은 능력자들이 족히 백 명은 넘을 거야. 그에 반해 지안은 은근히 여성 능력자들에게 약하지. 그리고 내 오라버니와 공작은 질투심이 강해.”
“윽, 그렇긴 하죠….”
이븐으로선 두 사람을 이길 만한 자신이 전혀 없었다. 아마 전 대륙적으로도 더 없지 않을까.
“지안의 곁에 있으려면 연인 말고 다른 자리를 찾아. 이를테면… 두 사람이 이능력자를 골라 지안의 호위로 두게 된다면 성별은 당연히 여자가 될 테지.”
몹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븐은 화색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언제 호위를 뽑으시나요? 자원할 수 있나요?”
들뜬 얼굴로 묻는 말에 이비엔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되쏘았다.
“하. 오늘 네가 저지른 호들갑스럽고 멍청한 행동을 좀 돌이켜 봐. 네가 호위로 뽑히는 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고한 건 죄송해요. 하지만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잘했단 거야?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꼬박꼬박 말대꾸하지 마.”
그 말대로 계급이 깡패이긴 했다. 이븐은 입술을 깨물다가, 곧 항의 섞인 어조로 제 장점을 피력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저만큼 성녀님을 피신시키기 좋은 이능을 가진 능력자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 제가 호위를 맡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인선을 검증하느라 번거로울 일도 없고, 성녀님께서도 더 안심하실 거예요.”
“그건 네 생각이지. 잘 찾아보면 너보다 더 실력 있는 능력자가 있을지도 몰라. 알았으면 더는 귀찮게 굴지 마. 너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어.”
팩 돌아선 이비엔은 이븐이 만든 지하 통로로 뛰어들며 중얼거렸다.
“다만, 네가 내게 쓸모 있는 이라는 걸 증명한다면 호위가 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하진 않겠지.”
한마디로 내 맘에 들게 잘 처신하면 꽂아 주겠다는 소리였다. 여지를 남기는 말에 이븐은 반색하며 황녀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어떻게 실수를 만회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황녀 전하의 신임을 받을 수 있지?
조급한 그 마음을 읽어낸 듯 앞서 걷던 이비엔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중앙 홀을 지키지 못하는 동안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겠지?”
“딱히 없었어요. 아참, 삼황자 전하께서 명하신 건 있었어요. 이동 능력자가 아직 지하에 있는데, 황녀 전하께서 처벌하실 거라고…….”
이븐은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이비엔과 충돌하고 말았다. 황녀가 갑자기 우뚝 멈춰선 탓이었다. 엉겁결에 황녀의 뒤통수에 코를 박고 만 이븐은 앓는 소리를 내며 코를 부여잡았다.
“전하. 갑자기 왜 멈춰 서신…….”
묻다 말고 이븐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돌아본 이비엔의 시선이 소름 돋을 만큼 서늘했다.
“누가 지하에 있다고?”
어쩐지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뭔가 달랐다. 이븐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좋은 종류의 반가움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