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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183/199)

184화

황녀 전하는 대체 어딜 가신 걸까. 지안은 각인을 해 주는 틈틈이 여유가 날 때마다 일리아스와 악시온에게 황녀 전하의 행방을 캐물었다.

하지만 세 번이나 되물었음에도 두 사람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파장이 영 수상쩍어 부러 언짢아하는 티를 내며 압박했지만 무엇 하나 들을 수 없었다.

악시온은 섭섭해하는 지안을 달래며 말했다.

“그대가 알아서 좋을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모른 척해 줄 수 없겠나?”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정말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을 셈인 모양이다.

“설마 황녀 전하가 소수의 능력자들만 이끌고 제도를 떠난 황제를 죽이러 갔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렇지 않다. 전하께선 다른 용건으로 잠시 황성을 비운 것뿐이다.”

“그 용건이 뭔지는 말해줄 수 없는 거고요?”

악시온은 난처한 얼굴로 지안의 시선을 피했다. 지안은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까. 내게 뭘 숨기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나 캐묻는데도 대답해 주지 않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것일 테다.

“그럼 이것만 대답해 줘요. 황녀 전하가 위험한 일을 하러 간 건가요?”

“아니다.”

그렇다니 안심이다. 숨기는 일이 뭔진 몰라도 해결된 후에는 말해 주겠지. 대충 납득을 마친 지안은 더 묻지 않고 각인을 이어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알아내려 했을 테지만, 지금은 미심쩍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지안이 더는 언짢은 티를 내지 않자 악시온은 크게 안도했다.

입을 꾹 닫고 흘끔거리기만 하던 일리아스도 내심 지안의 추궁이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가 한 번만 더 물었다간, 이비엔이 이동 능력자를 죽이러 갔노라고 바른대로 고해바치고 말았을 것이다.

지안이 알았더라도 딱히 반대하진 않을 것 같지만, 사형제도조차 없는 나라에서 자라온 지안이 쓸데없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면 어쩌나?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지안이 이동 능력자에게 조그만 동정심조차 가지지 않길 바랐다. 다만, 섭섭해하는 지안의 눈빛을 견디는 것만은 퍽 어려웠다.

‘그래도 더 묻지 않아 다행이야.’

그렇게 고요히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로부터 딱 10분이 더 지났을 때였다. 대략 여든 몇 번째 능력자의 각인이 끝났을 무렵이기도 했다.

털썩―!

허공이 길쭉하게 갈라지더니 지안의 앞에 사람 하나를 토해 놓았다. 그와 동시에 아주 익숙하고 위태로운 파장이 홀 안을 순식간에 채웠다. 수백의 능력자들이 밀집해 있음에도 특유의 파장을 선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필 바로 코앞의 발치에 나타나 모를 수도 없었다.

“지안!”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화르륵, 잠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지안을 둘러싼 불이 강하게 솟구쳤다.

옆에 선 악시온이 칼을 뽑아 든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지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공간을 가르며 나타난 이동 능력자를 바라보았다. 형편없이 쓰러진 상태인 걸 뻔히 보고서도 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올랐다.

무섭거나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의 파장은, 가파른 얼음 절벽 아래서 황녀 전하가 내뿜던 것과 완벽히 똑같았다. 완전히 파괴되지 못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각인 덕분에 그가 느리게 폭주하는 중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황녀 전하가 그랬던 것보다 더 상태가 심각하다는 데 있었다.

‘폭주까지 고작 1분도 안 남았어!’

지안은 다급히 황성의 홀에 밀집해 있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 폭주하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애꿎은 사람이 휘말려 다칠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임산부가 있다. 아이들이 있다.

“비켜요!”

이를 악문 지안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걸어가 쓰러진 아론을 발로 뒤집어 눕혔다. 친절하게 두 손을 사용하기엔, 그에게 남아있는 악감정이 아직 많았다.

바로 그 악감정을 뒤로한 채, 지안은 서둘러 가이딩을 펼쳤다. 그리고 불완전한 각인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악시온은 물론이고, 아론을 산 채로 불태우려 했던 일리아스 역시 크게 당황하며 멈칫하고 말았다. 지안이 그를 가리고 선 탓에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산 채로 불태우면 지안이 끔찍한 몰골을 보게 될 것이다.

“지안!”

“지금 뭘 하는 거야! 그놈한테서 당장 떨어져!”

“안 돼요. 내버려두면 여기서 폭주할 거예요. 지금 당장 수습해야 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폭주하게 놔둬!”

“저도 그러고 싶어요!”

버럭 소리 지르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죽건 말건 상관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요? 폭주에 애꿎은 사람들이 휩쓸려 다칠 수도 있어요. 아직 어린 아이들도 있고요.”

“애들만 모아서 좀 피해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모두 능력자들이니 큰 피해는 없을 거야.”

그렇지 않다. 피해는 필연적이다. 지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시간도 없어서 이러는 거예요.”

서둘러 기운을 쏟아내며 지안은 이를 갈았다. 때맞춰 아론이 반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성공……했나.”

떨리는 시선이 느릿하게 지안의 얼굴을 쓸었다. 안도감 어린 표정에 잔뜩 화가 난 지안은 아론을 향해 바짝 얼굴을 들이민 채 비아냥댔다.

“그래. 성공했어. 능력자들 모두 차례를 지켜 각인을 받는데, 넌 이런 순간에도 범죄자답게 새치기를 하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게 확인된 덕분일까.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죽이려고 했고, 죽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살아 있었다는 건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으나…….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를 죽여야 했어.

순간순간 떠올랐던 자기변명을, 끔찍한 죄책감을 이젠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다. 명분도 있었다. 그리하여 다 죽어가는 병자의 몰골을 하고 있었음에도 아론은 조금도 지안에게서 동정심을 끌어내지 못했다. 두려움에 떨며 도주했던 기억들, 바다 한가운데서 절망했던 시간들이 여전히 생생했다. 지안은 버럭 성을 냈다.

“그때 널 제대로 죽였어야 했어.”

“…….”

“내가 그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얼마나 막막했는지 알아? 너는, 너는 벌레만도 못한 새끼야.”

말하는 사이 각인이 절반쯤 진행되었다. 망가졌던 각인이 다소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만큼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최소한 이 자리에서 폭주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잘 들어. 지금 널 살려 주는 건, 널 동정해서가 아니라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야. 이후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 그땐 남은 연결까지 완전히 다 깨 버릴 거야. 한 번도 했는데 두 번은 못 할까.”

지안은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마냥 손을 털어냈다.

“정신 차렸으면 당장 꺼져.”

그렇게 말한 지안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아론에게 차례를 빼앗긴 능력자에게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갔다.

철저히 외면당하는 아론을 보며, 일리아스는 지안에게 그냥 사실대로 말해 줘도 괜찮았을 거란 걸 직감했다. 이제 보니 이비엔이 헛수고를 했다. 그는 곧장 지안에게 속삭였다.

“저놈, 불태울까?”

일리아스의 물음에 지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불태운다니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보복은 각인을 불완전한 상태로 내버려둔 걸로 충분하다.

“됐어요. 말로만 죽이니 마니 한 거예요. 그냥 쫓아내는 걸로 충분해요.”

“뭐? 저놈은 이동 능력자야. 다시 널 납치하려 들 수도 있어.”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보복이라면 지금도 하고 있다. 폭주를 방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안은 그사이 비척비척 일어나 앉은 아론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또렷해진 눈동자를 보니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 아론을 향해 지안이 들으란 듯 말했다.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다시 제 앞에 나타나면 죽게 될 거란 걸 이젠 알 테니까.”

차갑다 못해 가혹한 음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입을 열다 말고 꾹 다물어야 했다. 지안에게 지목당하지 않은 죄 없는 다수의 능력자마저 흠칫 몸을 굳혔다. 아론은 열리지 않는 입술을 열어 사과했다.

“미안해.”

지안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마냥 각인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철저한 무시에 애가 닳는 건 아론뿐이었다.

“미안…….”

아론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시온의 주먹이 얼굴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퍽―!

험악한 타격음과 함께 경고가 날아왔다.

“그만 닥쳐라. 듣기 싫다잖나.”

아론은 저항 대신 악시온의 어깨 너머로 지안을 건너다보았다. 그녀가 제 앞의 능력자에게 다정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우악스럽게 포박당하고 이븐에 의해 강제로 지하에 빨려들어가는 내내 아론은 생각했다. 공간을 갈라서 다시 지안의 앞에 서면, 그러면 사과를 받아 줄까? 실수로라도 내게 어떤 미래를 꿈꾸냐는 질문을 던져 줄까?

아니, 아니다. 그렇게 해 봤자 볼 수 있는 건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과 차가운 침묵뿐일 것이다.

* * *

모든 능력자들의 각인이 끝났다. 지안은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하루였다.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지안은 작게 하품했다. 폭격에 연설에 각인까지,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게다가 능력자들을 한 명 한 명 상대한 덕분에 평생 사용할 가이드 정신 및 서비스 정신을 모조리 다 끌어 쓴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차곡차곡 누적된 탈력과 졸음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만 들어가 쉬는 게 좋겠다.”

악시온이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뒤이어 다정한 키스가 빰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물 먹은 것처럼 무겁던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얼마 없는 기운을 끌어모아 막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이븐의 말이 지안을 멈춰세웠다.

“저어, 이동 능력자는 어떻게 할까요? 빠져나오는 길까지 만들어 줬는데도 계속 지하에 있는데.”

대답은 일리아스에게서 나왔다.

“내버려둬. 이비엔이 알아서 처벌할 거다.”

지안은 그 대화를 얼핏 알아들었으나 곧 잊어버렸다. 이븐의 말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몸이 가벼워진 건 기절의 마지막 징조였던 걸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몽롱했고 반쯤 눈이 감겨 왔다. 이대로 졸면서 침실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만큼 피곤했다. 악시온이 금세 지안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지안. 내가 그대를 안아도…….”

지안은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졸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안은 악시온이 자신을 안아들자마자 즉시 잠들어 버렸다. 좀 전에 들었던 대화 역시 그 순간 완벽히 휘발되어 버렸다. 각인으로 모든 기운을 소진한 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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