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여든 번째로 각인을 받게 된 소녀는,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게 이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해 준 사람은 성녀님이 처음이세요. 지금까진 모두가 이능을 쓰라고 요구하기만 했거든요. 제가 그로 인해 폭주하게 되리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요. 능력자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너무하네요. 저라면 화가 났을 거예요.”
“맞아요. 전 늘 화가 나 있었어요. 돈 몇 푼을 벌려고 제 생명을 팔아치워야 한다는 게 너무 비참했거든요. 심지어 그렇게 번 돈을 버는 족족 다 써 버렸어요. 어차피 오래 못 살 거니까 돈이라도 펑펑 쓰고 싶었어요. 근데, 이젠 안 그러려고요. 저 부자가 될 거예요. 누구도 무시 못 할 거부가 될래요.”
듣는 사람의 가슴마저 덩달아 벅차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모든 능력자들이 이런 건 아니었다. 아직 각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손이 닿자마자 사랑을 고백하는 능력자가 더 많았다.
“아아. 성녀님. 제 미래는 당신과 함께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한 이들은 곧바로 지하행이었다. 이븐은 앞뒤 없이 사랑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능력자들을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땅 아래 마련한 공간으로 치워 버렸다.
그렇게 지하로 끌려간 능력자들은 비좁은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와야 했다. 각인 순서도 제일 뒤로 밀렸다. 기껏 줄을 섰음에도 다시 맨 뒷줄에 가서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지켜주고 싶다는 말,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러다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 고백을 모조리 다 들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개중엔 기상천외한 것도 꽤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름은 레이나가 좋겠습니다. 아들이면 게롤드로 짓고요.”
화가 난 일리아스는 그 말을 한 능력자의 머리통을 태울 뻔했다. 악시온 역시 검을 반쯤 검집에서 빼 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븐은 어느 때보다 더 신속하게 바닥을 꺼뜨려 바보 같은 능력자가 공작과 삼황자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이비엔이 말했다.
“세상에 저렇게 눈치 없는 놈은 처음 보는군. 저놈은 다시 제 차례가 오면 또 고백할 것 같아. 그만큼 멍청해 보여.”
이비엔의 말은 곧 사실이 되었다. 고백을 거절당했음에도, 그래서 순서가 뒤로 밀리고 다시 차례를 맞이하게 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백을 하는 능력자들이 속출했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 * *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지치지도 않고 같은 질문을 던지는 지안의 물음은 몹시 다정했다. 이비엔은 질문을 받은 능력자가 감동을 숨기지 못하고 주절주절 미래에 대한 계획을 털어놓는 걸 지켜보았다. 지안은 여전히 오라버니의 이능을 숄처럼 어깨에 두른 채 능력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냥 각인만 하고 치워도 모두가 떠받들 텐데, 굳이 질문을 던져 대답을 유도하고 친밀감을 끌어낸다. 지안이 자신을 위해 그러는 거란 걸 이비엔은 모르지 않았다. 능력자들에게서 호감을 이끌어내어 직접적으로는 끈끈한 호응 세력을 만들고, 간접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을 지지하게끔 초석을 쌓고 있단 걸 왜 모르겠나.
은근슬쩍 지안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흘릴 땐 의도를 뻔히 알고 듣는데도 귀가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북부에서부터 지안은 많은 공로와 영광을 스스로가 아닌 자신에게로 돌렸다. 반역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에 가담하는 것인데도 그 선택을 물리지 않았다. 이비엔은 그런 지안이 신기했다.
그럴 만했다. 지구에서 돌아온 지안이 가져온 것들은 기실 반역보다 더 엄청났으니까.
그 신무기들만 있다면 누구든 병사 하나 없이도 얼마든지 황위에 오를 수 있다. 만일 지안이 그러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직접 제위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력이 지안에겐 있다.
그러나 권력은 지안에게 그리 매력적인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지안이 뭘 욕심내는지도 이비엔은 통 알 수가 없었다.
욕망의 대상이 선명한 사람을 대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가 바라는 걸 주거나, 그걸 위한 거래에 끌어들이면 되니까. 하지만 지안은…… 딱히 욕심내는 게 없다.
그래서 더욱 지안에게 묻고 싶었다. 지안이 능력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을 되돌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묻고 싶다.
‘그렇게 물으면, 지안은 뭐라고 대답할까.’
무례한 자에겐 무례하게. 주저하는 사람에겐 조심스럽게.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약한 지안의 모습을 이비엔은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 둔 품속의 파장 감지기를 한 번 확인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어.”
속삭이는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가 물었다.
“어딜 가려고?”
이비엔은 조끼를 들추어 파장 감지기를 슬쩍 보여 주었다.
“계속 지안을 이능으로 감싸고 있을 순 없잖아? 이동 능력자를 찾아 처단할 거야. 아르킨을 대기시켜 놓았어. 그가 말하길, 이동 능력자가 치료사의 집에 있다더군.”
“곱게 죽이지 마.”
“당연한 말을. 그놈이 감히 내 눈앞에서 지안을 납치했어. 기다려 봐. 목을 잘라서 가져올 테니.”
이를 갈며 대답한 이비엔은 아르킨과 함께 은밀히 홀에서 벗어났다.
각인에 열중하고 있던 지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비엔의 파장이 황성 바깥에서 느껴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일리아스. 황녀 전하가 어딜 가시는 거죠?”
“그게, 급히 만나서 회유할 귀족이 있다는군.”
뻔히 들킬 걸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아스는 안절부절못했지만, 결코 사실대로 대답하진 않았다. 진실을 안 지안이 심란해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뭐가 됐든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별일 아니야.”
“제게 거짓말을 하시네요.”
톡 쏘아붙인 지안은 시선을 돌려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대신 알려 달라는 뜻이었다. 악시온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쓸데없이 뛰어난 청력 탓에 황녀와 삼황자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긴 했지만…… 지안이 알아서 좋을 내용이 아니었다.
“이러기예요?”
화가 났지만, 지안은 무언가를 숨기는 두 사람을 이어서 추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이유없이 입을 다물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각인이 필요한 능력자들이 여전히 넘쳐났다. 평생 가이딩에 목말랐을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이비엔은 아르킨이 알려 준 치료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러나 아론의 침대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를 본 치료사는 몹시 당황했다.
“아니,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대체 어떻게…….”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 이비엔은 콧방귀를 꼈다.
“흥. 이럴 줄 알고 파장 감지기를 챙겨 왔지.”
기기를 작동시킨 이비엔은 멀지 않은 위치에서 이동 능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파장을 찾았다. 마침 대부분의 능력자들이 황성의 홀에 몰려 있어서 특정하기가 더 쉬웠다.
이를 갈며 추적을 시작한 이비엔은 얼마 안 가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를 발견하는 건 허무하리만큼 쉬웠다.
다만, 다 죽어가는 몰골로 바닥을 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익― 턱. 지익 ―턱.
더러운 흙바닥 위에 벌레처럼 엎드려 두 팔로 간신히 기어나가는 그는, 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비엔은 아론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폭주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힘의 폭발로 온갖 피해를 야기하며 단숨에 죽어야 할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사소한 의문이다. 이비엔은 의문을 뒤로 한 채 아론의 옆을 지나쳐 그의 진로를 막으며 멈춰 섰다. 해를 등지고 선 황녀가 만들어낸 짙은 그림자가 아론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짙은 음영이 이비엔의 얼굴을 일순간 베일처럼 가렸다.
“헉. 허억…… 비, 비켜…….”
“어딜 가려고?”
이비엔의 목소리에 아론은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잔뜩 분노한 황녀의 얼굴이 잡혔다.
“기어서 황성의 홀까지 갈 셈인가? 이거 재미있는 구경이 되겠군. 잠깐 내버려 두고 구경해도 좋겠어. 근데 어쩌지? 지안이 널 무서워해. 그리고 나는, 널 죽여 지안을 안심시키고 싶어.”
“…….”
“안됐구나. 모든 능력자들이 지안의 손 아래서 구제받는데 너만은 예외라서.”
“…전해 줘.”
“무엇을? 네 마지막 말을? 내가 그래 줄 성싶으냐? 웃기는 소리 마라!”
외침과 함께 이비엔은 그대로 아론의 머리를 공처럼 걷어찼다. 그 충격으로 아론은 데굴 옆으로 굴렀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피 섞인 침을 뱉어낸 아론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윽. 허억. 미, 미안하다고 전해 줘.”
“흥. 나쁘지 않은 유언이군.”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에 아론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삼켰다. 닿지는 못하더라도, 먼발치에서나마 다시 한번 그녀를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루지 못할 듯싶었다.
끝인가.
정말 이렇게 끝인가.
‘기왕이면 직접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안 되는 건가.’
아. 분노조차 사라지고 만 무표정한 얼굴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얼굴이라니. 느릿하게 감긴 아론의 눈꺼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이라도 좋다. 한 번만 그 얼굴을 다시 본 뒤 죽고 싶었다.
바로 그러한 희망을 품은 채, 아론은 이능을 사용해 제가 드러누운 바닥의 공간을 갈랐다. 폭주 중인 상태라 자칫하면 공간과 공간 사이에 갇히거나, 사지 중의 하나가 제대로 이동되지 못한 채 잘려 나갈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그것도 이능이 실현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간 수없이 실패했던 마지막 시도를 하며 아론은 생각했다. 이능이 실현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이대로 황녀의 검에 목숨을 잃어도 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