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0/199)

181화

홍해처럼 갈라진 능력자들을 뚫고 그 사이를 걷는 건 지안에게도 많은 긴장을 요구했다. 시선이 잔뜩 집중되어 있는 만큼, 이쪽에서도 그에 압도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구에서도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에스퍼를 다루는 건 몹시 까다로운 일이다. 하물며 그게 집단이기까지 하다면, 난장판이 벌어지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더욱더 만만치 않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몬스터 무리를 폭탄으로 날려 버리는 걸 보여 줘서일까. 오밀조밀 등 뒤로 따라붙는 능력자들은 말귀를 알아먹은 군중처럼 얌전했다. 누구에게서도 처음의 기세와 불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운을 퍼뜨리며 힘껏 몰아세운 게 훌륭히 먹혀들어 간 거다.

허세가 통해서 몹시 다행이었다. 만일 능력자들이 순순히 굽혀오지 않고 계속해서 소요사태를 일으켰다면…… 이븐이 촘촘히 묻어두고 간 지뢰를 터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리를 날려 버리는 지뢰가 아닌, 최루액을 분수처럼 뿜어내는 시위 진압용 지뢰지만, 어쨌건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거다. 그것만으로도 지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찌어찌 제압을 하게 된다 해도 머릿수가 워낙 많아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진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제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상자가 발생할 테니, 전력 저하도 무시할 수 없다. 지뢰를 고스란히 회수할 수 있게 된 것도 소소한 소득 중 하나다.

‘무력 대신 대화로 상황을 봉합했으니 조금은 뿌듯해해도 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런 대비책까지 세워가며 제도에 입성해야 하다니. 기막히다면 기막힌 일이다. 모두 자신이 가이드란 이유로 인해 불거진 번거로움이었다.

그러나 어떤 불가피한 상황이 생겨도, 이젠 그게 뭐든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

‘채찍을 줬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인가.’

지안은 몇몇 북부의 능력자들이 흥분한 얼굴로 제도의 능력자들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걸 눈여겨보았다. 모두들 미리 언질해 둔 대로 바람잡이 역할을 성실히 해 주고 있었다. 열띤 설명을 들은 제도의 능력자들이 흥분과 불만을 가라앉히는 게 자신의 눈에도 보였다.

무리 사이에선 간간이 이런 말도 들려왔다.

“미친 새끼야. 사고 치지 마. 바람의 이능력자들처럼 학살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말대로, 제도의 능력자들은 몹시 조바심을 내면서도 성질대로 성급하게 굴지 못했다. 누군가 돌발행동을 할 낌새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달하며 즉시 저지당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지안을 안심시키는 건, 이동 능력자의 파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만약 그놈이 있더라도 일리아스의 불길이 자신을 감싸고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막상 파장이 감지되지 않으니 확실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지안은 산맥의 초입을 떠나 무사히 제도에 당도할 수 있었다. 폭격으로 움푹움푹 땅이 꺼진 평야와 그 위에 즐비한 몬스터의 사체를 가로지르는 건 썩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었지만, 제도의 성벽에 가까워질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환호성이 이를 상쇄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활짝 열린 제도의 성벽에 다다르자 귀가 멍멍할 정도로 열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에다의 성녀 만세―!

대지를 뒤흔들 듯한 압도적인 함성에 지안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능력자와 일반인 구분할 것 없이 다들 성벽 근처로 몰려나와 있었다. 성벽 너머 평원에서 일어난 일을 적지 않은 제국민들이 목격하고 또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었다.

심지어 성문 바로 앞에는 황녀 전하가 능력자들을 대동한 채 마중 나와 있었다. 지안은 반색하며 이비엔에게 다가갔다.

“전하, 왜 여기 계세요? 황성에 있지 않으시고.”

“가 봤는데, 제대로 된 병력이 없어서 딱히 점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고. 너도 보면 놀랄 거야.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더라. 그래서 적당히 정리만 하고 너를 기다렸지. 너와 함께 들어가려고.”

성큼 다가온 이비엔은 웃는 얼굴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런데 이 하녀는 누구야?”

“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성 별관 소속의 엠마 하슬러입니다.”

“흐응. 얼굴을 본 기억이 나. 근데 너는 황태자궁 책임 시녀 아니었나? 하녀장 아래 소속되어 있던.”

“그게, 능력자로 발현한 뒤 별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렇군. 고생이 많았겠어.”

이비엔의 말에 엠마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뒤이어 지안의 등 뒤로 몰려든 능력자들을 바라본 황녀는 놀란 얼굴로 휙 휘파람을 불었다.

“다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널 따라왔네. 최루액 냄새도 안 나고. 딱히 제압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도 없는 것 같군. 오라버니가 능력자들을 다 불태워 죽일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다행히 말이 잘 통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음. 폭주하고 싶지 않다면 예의를 지키라고 했죠.”

“고작 그런 말로 이렇게 얌전해졌다고?”

의아해하는 이비엔에게 엠마가 얼른 설명했다.

“고작이 아닙니다. 무척… 무척 위엄 넘치셨어요. 다들 꼼짝없이 성녀님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전하.”

엠마의 말에 이비엔이 웃으며 말했다.

“누구 말인데 당연히 경청해야지. 그렇다고 해도 신기하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능력자가 아니라 에다를 따르는 신관인 줄 알겠어.”

기막힌 비유에 지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쓴웃음 짓는 지안의 말간 얼굴 위로 별 조각 같은 햇살이 뿌려졌다.

* * *

제국민들은 대로의 양옆에 몰려들어 황녀와 나란히 발을 맞추며 걷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기쁨이 가득했다. 꼼짝없이 몬스터의 밥이 될 줄로만 알았는데, 더는 겁먹지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흩날리는 꽃잎 하나 없는데도 좌중은 이미 무르익은 축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무시무시한 폭발음을 듣고 집 안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소문이란 언제나 화살보다 빠른 법이었다. 지안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열 사람이 성녀의 생환과 업적을 새롭게 들었다.

특히 신이 난 건 음유시인과 신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니더라도 입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죽음을 딛고 살아 돌아온 에다의 성녀와 그녀에게 구원을 약속받은 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리고 거기엔 밀려오는 몬스터에 맞서지 않고 도망친 황제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다들 입을 벌린 채 성녀를 뒤따르는 능력자들을 구경했다. 밀려오는 몬스터에 벌벌 떨었던 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두가 호기심과 궁금증을 폭발시켰다. 살았다는 당장의 커다란 기쁨만큼이나 수십 가지의 질문과 의혹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뭐야 대체? 습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전부 거짓이었던 거야?”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잖아. 설마 거짓이겠어? 그런 게 아니라 에다께서 보살피신 거지! 부활이야. 부활이 틀림없어! 그렇잖아. 에다께서 성녀님을 되살려 낸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

“그건 그래. 그리고 들어보니 앞으로 능력자들이 더는 폭주할 일 없을 거라던데……. 사실일까?”

“잘은 모르지만…… 헛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봐 봐. 저 망나니 같은 놈들이 저렇게 얌전한 거 나 처음 봐.”

“근데 삼황자 전하는 반역자로 쫓기던 것 아니었어? 어떻게 성녀님을 보필하고 있는 거야?”

“야야.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전하가 성녀님을 모시고 다시 나타났다는 거야, 바보야!”

지안은 웃으며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나 질문들보다 더 많았던 건 감사의 목소리였다. 발치로 엉성한 풀꽃더미가 연거푸 던져지고, 살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저 봤어요! 모두 봤어요! 성녀님이야말로 제도를 구한 영웅이세요!”

“맞아! 다들 땅이 흔들리는 거 느꼈지? 그거 능력자들이 한 거 아니야! 성녀님이 하셨어!”

모두 가슴 뿌듯한 말들이었다. 차원을 넘지 않았다면, 돌아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듣지 못했을 말이기도 했다. 지안은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대로와 광장을 차례로 거쳤다.

그렇게 활짝 문이 열린 황성에 당도했다.

황성의 입구를 지키고 선 사람은 이븐이었다.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 나온 이븐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성녀님! 이쪽으로 오세요. 중앙 홀로 안내해 드릴게요. 제가 싹 정리해 놨어요.”

잔뜩 신이 난 이븐을 따라나선 지안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자들이 보였다. 이미 각인을 받아 여유로운 북부의 능력자들과 달리, 제도의 능력자들은 애가 닳아 없어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비엔은 뒤돌아선 지안을 얼른 잡아끌었다.

“한눈팔지 마.”

맞는 말이다. 목표로 했던 황성이 코앞이었다.

그대로 황녀의 손에 이끌려 황성의 홀에 위치한 단상에 오른 지안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황금 의자를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있던 날, 이 황금 의자에 착석한 황제를 마주했다. 그때와 달리, 하나뿐이었던 의자가 둘로 늘어나 있었다.

‘하나는 황제의 것, 다른 하나는 황후의 것인 것 같은데….’

그러나 미처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녀 전하가 자신을 끌어다 앉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로 옆 좌석에 착석한 이비엔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종을 불러 황관을 가져오라 명했다.

난데없는 지시가 영 신경 쓰였다.

“황관은 왜……. 전하께서 쓰실 걸 가져오라 하신 거죠?”

“아니. 너한테 씌워 주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황족이 아니에요. 전하의 인형은 더더욱 아니고.”

단호한 지안의 말에 이비엔이 울상을 지었다. 게다가 인형이라니? 이비엔은 절대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며 항변했다.

물론 그 항변은 아주 잠깐이었다. 지안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반 장난 반 농담으로 굴었던 게 컸지, 황관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고작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비엔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황관을 가져오던 시종을 물렸다.

단상 위에서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황성의 홀에 밀려든 능력자들은 일리아스의 지시에 따라 얌전히 줄을 섰다. 그중 제일 앞에 서 있는 건 엠마였다. 다들 기대에 찬 얼굴로 지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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