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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179/199)

180화

그의 각인을 완전히 파괴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지만, 내내 그날의 일을 의도적으로 잊으려 노력한 탓인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술에 취해 기억이 토막 난 것처럼 몹시 단편적인 기억과 끔찍한 기분만이 토사물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확인을 위해 지안은 곧장 아르킨에게 물었다.

“기사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배를 찾아 돌아왔을 때, 혹시 이동 능력자의 시신을 확인하셨나요? 그가…… 죽어 있던가요?”

주저하면서도 분명히 묻는 질문에 아르킨은 제도의 어느 치료사 집에 던져두고 온 아론을 떠올렸다.

그자는 분명히 폭주하고 있으면서도 가시적인 폭주 현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괴이쩍은 상태였다. 독이라도 마신 듯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으나, 상태가 그렇게나 불안정한데도 이상하리만큼 완전히 폭주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 아니, 성녀님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살려 두었습니다.”

지안은 놀라 두 눈을 홉떴다. 악시온과 일리아스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스라쳤다. 일리아스는 곧장 지안을 자신의 이능으로 감싸 안았다. 화르륵 예고 없이 타오른 불꽃이 순식간에 발목을 타고 올라 지안을 안심시켰다.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지안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딱딱하게 굳힌 얼굴에 서린 건 차갑게 정제된 분노였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능력자들 중에 그 이동 능력자도 있을까요?”

느릿한 물음에 아르킨은 반 시체나 다름없던 아론의 모습을 떠올렸다.

“없을 겁니다. 제 발로 움직이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지안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런 말론 안심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해 주세요. 그놈이 이능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멀쩡한지 어떤지 알아야겠어요.”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능력자라기보단, 병자에 가깝습니다.”

오늘내일하는 상태라니 반갑다면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경계심이 늦춰지지 않았다.

은은히 퍼뜨리던 방사 가이딩에 날을 세운 지안은 구르듯 제 앞에 당도한 능력자들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만에 하나 저들 중에 이동 능력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절로 차갑게 식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갑작스럽게 머리 위에서, 또는 발밑에서 파장이 감지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신의 감각이 바짝 일어섰다.

지안은 내내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워냈다. 살뜰하고 다정한 성녀 노릇은 그만둬야 할 듯싶었다.

* * *

한편, 몬스터의 사체가 즐비한 평원을 가로질러 온 능력자들은 일리아스의 화염에 둘러싸인 지안을 보고서 몹시 당황했다. 물을 다루는 몇몇 능력자들은 기함하며 불길을 두른 지안을 향해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그들이 앞다투어 이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일리아스의 화염이 더 강했다. 강한 수압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치이이이익―!

불과 물은 거친 반응을 일으키며 충돌하더니 곧장 수증기로 화해 버렸다.

물을 전부 날려 버리고도 흔들림 없는 불꽃을 확인한 지안은 그만두라고 외치는 대신 축축한 습기를 천천히 들이켰다. 잔뜩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지척에 몰려든 능력자들의 파장을 하나하나 감지해 나갔다. 혹시나 제도로 향하는 도중에 누군가 폭주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당장 혼란을 잠재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곧 폭주할 파장을 캐치해 내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게다가 파장 감지는 아주 잠깐이면 된다. 그래서 지안은 일대의 혼란을 잠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짧은 사이에도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요사태로 번지고 있었다. 일리아스와 악시온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능력자들을 가차 없이 가로막고 기절시켜 버렸음에도 능력자들은 전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시온이 목소리를 높여 거듭 거리를 유지해라, 뒤로 물러서라고 말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다.

“물러서라고 하지 않았나!”

잔뜩 화가 난 일리아스의 외침 역시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험악한 타격음과 타오르는 불의 장벽은 능력자들을 잠시 멈춰 세울 수 있을 뿐, 물러서게 만들 순 없었다.

지안을 가리고 선 공작과 삼황자를 향해 능력자 중 하나가 핏대를 세웠다.

“왜 가로막는 거야! 같은 능력자이니 알 것 아냐! 우리는 생으로 죽어가는데 네놈들은! 네놈들은 여태 성녀를 죽음으로 위장하고 독차지해 왔어!”

“맞아! 성녀를 내놔! 난 살고 싶어!”

“나도야. 나도 다시 축복을 받을 거야. 다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공격해!”

거센 항의와 질타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황실이 우리를 속였다는 외침과, 모든 게 저 권력자들의 음모였다는 원성과, 제발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혼탁하게 섞여들었다. 특히 일리아스와 악시온을 향한 비난이 가장 거셌다.

이 와중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당장 폭주할 만큼 위험한 상태에 처한 능력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능력을 쓰지 않고 제도 안에 숨어 있었으니 당연하겠지.’

파장 감지를 마친 지안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사이를 비집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막 달려들려던 일군의 능력자 무리가 움찔 걸음을 멈췄다.

지안은 어느새 검까지 빼든 그들을 노려보며 곧장 확성기를 집어 들었다.

―아아. 여러분, 지금 당장 무력시위를 멈추시길 바랍니다. 모두 무기 집어넣고 질서를 지켜 주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당장 무력시위를 멈춰 주시길 바랍니다.

드론을 통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우왕좌왕하던 좌중의 시선이 단번에 지안에게 집중됐다. 애초에 능력자들의 목표 자체가 성녀였던 만큼, 지안이 앞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도 혼란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지안은 자신을 지키듯 뻗어진 악시온의 팔에 자신을 팔을 겹쳐 두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지금 자세히 보니 성축일날 뵀던 분들도 몇 보이네요. 경고합니다.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 질서를 저해하는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가이딩…… 아니, 축복을 받게 될 겁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적정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그리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은 아예 축복을 받지 못하리란 점, 미리 밝혀 두겠습니다.

최대한 딱딱하고 사무적인 발성을 내며 지안은 잠시 거두어들였던 기운을 은근히 풀어냈다. 이제까지의 양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은 결코 아니었다. 예민한 몇몇 능력자들은 사무적인 목소리 뒤에 깔려 있는 분노를 포착하고서 얼른 무기를 내던졌다.

눈치가 있다면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에야 다들 군중심리에 흥분해서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웠지만, 정작 공작과 삼황자는 성녀를 호위하려 한 것뿐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경고를 못 알아듣는 어리석은 사람도 더러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수의 머릿수를 믿고, 흥분을 놓지 못한 능력자 하나가 씨근대며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마! 축복을 하지 않겠다니 무슨 말이야 그게! 당신은 성녀잖아! 우리를 구해 줘야 하잖아!”

성난 멧돼지 같은 외침에 지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내가 왜?

“뭐?”

―내가 왜 나를 위협하는 사람을 구해 줘야 하지?

싸늘한 일갈에 대거리를 한 능력자는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말았다. 그는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소리쳤다.

“위, 위협이 아냐!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절박함 하나만 쥐고 달려온…….”

―한꺼번에 몰려와서 다짜고짜 검부터 빼 들고 달려드는 집단을, 사람들은 보통 도적이라고 부르지. 지금 같은 경우엔 납치범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

“젠장, 아니라니까! 아무도 그럴 생각 없어. 나는, 단지…!”

―당신 입장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아. 알고 싶지도 않고.

서슬 퍼런 목소리에 칼날 같은 기운이 더해지자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숄처럼 어깨에 두른 지안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폭주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예의를 지켜.

지안은 그 한마디로 좌중을 찍어눌렀다. 삽시간에 흥분을 걷어낸 분위기가 고요했다. 내내 항의하던 능력자 역시 예외 없이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지안의 행동에 가장 놀란 건 단연 일리아스와 악시온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지안의 오만하기까지 한 일면을 목격하고 있자니 당혹스럽다 못해 절로 두려움이 솟았다. 지안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잘 아는데도 그랬다. 덩달아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에 악시온은 지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흥. 콧방귀를 뀐 지안은 유보하듯 잠시 침묵한 뒤, 몰려든 능력자들을 향해 말했다.

―질서만 잘 지키면 누구든 예외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그 누구도 폭주할 염려 없는 삶을 살게 될 거란 걸 약속드리죠. 다만, 모든 일은 황성의 홀에서 이행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지안이 눈짓하자 붉은 머리의 능력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타났다.

앞으로 나선 건 한눈에 봐도 남들보다 덩치가 더 작은, 로브 차림의 여자였다. 떨리는 손을 맞잡고 나타난 그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절박한 행동이 너무 재빨라 말릴 새도 없었다.

“서, 성녀님. 저희는 오래 기다릴 수 없습니다. 단 며칠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폭주할 겁니다. 저는, 저는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기도 전에 폭주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서….”

그녀는 채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흐윽… 아이만이라도 좋습니다. 저의, 제 아이를 살려 주세요.”

흘러나오는 파장에 거짓은 없었다. 애끓는 호소에 지안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뭔가 오해가 있네요. 오래 기다릴 필요 없어요. 오늘 하루가 가기 전에 폭주에서 벗어나게 될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여자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낸 지안은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마주 잡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함께 제도로 갈까요.”

보란 듯 앞으로 걸어 나가자 능력자들은 우물쭈물 당황하면서도 얼른 길을 터 주었다. 그중 가장 당황한 건 지안에게 이끌려 걷게 된 임산부였다.

잔뜩 긴장한 채 발맞춰 걷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안은 간단한 대화를 시도했다.

“이름이 뭐예요? 전 지안이에요.”

“저, 저는 엠마 하슬러입니다.”

마침 그녀의 로브 차림 안으로 하녀복이 비쳐 보였다. 지안의 시선을 눈치챈 엠마는 더듬더듬 몇 가지 정보를 더 늘어놓았다.

“복장을 보셔서 알겠지만, 황성 별관의 시녀로 종사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황태자궁의 시녀였는데 발현을 한 뒤로 별관에 배속되었어요.”

능력자가 되었단 이유로 좌천됐단 말이구나.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엠마의 기구한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두 여자의 뒤로 수백의 능력자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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