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행보가 엇갈린 모양이군.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바라는 것이 있나? 뭐든 말하라. 들어주지.”
처음부터 대화에 동참하고 있던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끼어든 그는 짐짓 지안을 가리고 섰다. 그쯤 되자 악시온과 일리아스가 아르킨을 경계하고 있단 걸 지안도 모를 수가 없게 됐다.
하지만 그는 경계받아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처럼 반듯한 기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지안은 아르킨이 자신을 두 번씩이나 구해 주었단 걸 결코 잊은 적 없었다. 제도의 황성에서 한 번, 남부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또 한 번. 그가 준 도움은 언제나 가장 위급한 순간에 빛을 발했다.
게다가 무릇 감사란,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다. 지안은 악시온을 슬쩍 밀어내며 아르킨에게 말했다.
“돌아오실 줄 알았다면 그대로 배에서 기다렸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때 이동 능력자를 위협하지 말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엇갈리지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괜한 고생만 하시고…….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한 아르킨은, 그 자리에 못처럼 붙박였다. 그 모습에 지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사 가이딩을 하고 있으니 냉큼 코앞으로 달려와야 정상인데 왜 가까이 오질 않는 걸까.
시온이 가로막고 있어서? 아니면 일리아스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기사님을 노려보고 있어서인가?
아마 둘 다인 것 같았다. 고등급 에스퍼 특유의 파장이 주는 압박감이 제게도 간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안은 짧게 반성했다.
‘내가 기사님을 너무 환대한 모양이야.’
두 사람이 경계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막 전투를 마치고 달려온 능력자를, 심지어 은인 중의 은인인 사람을 어떻게 반기지 않겠는가?
게다가 아직 이야기를 다 끝마치지 못했다. 지안은 악시온의 손을 꾹 잡아 그를 진정시켜 놓은 뒤, 그를 지나쳐 성큼 아르킨에게 다가갔다.
“간단히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그날 전 무사히 파리온에 도착했어요. 제대로 알리지도 못한 채 저만 빠져나가서 죄송해요. 살아계신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수소문을 했을 텐데. 제가 미처…….”
면목 없어 하는 지안의 모습에 아르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사하신 걸 알았으니 이제 됐습니다.”
고지식하고 형식적인 대답에 지안은 난처히 웃었다. 충분히 화내거나 퉁명스럽게 대할 수도 있는 일인데, 어떻게 이런 변함없는 대답이 나오나?
죄책감도 죄책감이지만, 그간 기사님을 잊고 있었단 사실이 떠올라 특히 미안했다. 짙어지는 자책과 책망에 절로 손가락이 꼼질거렸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제 와 보답이라 하기도 우습지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방사 가이딩을 멈춘 지안은 조심스레 아르킨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각인을 시작하자 굳어 있던 아르킨의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각인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지안은 얼른 부축해 주었다. 그 탓에 필요 이상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바로 뒤에 선 일리아스는 속이 뒤틀리는 걸 참아야 했다.
마음 같아선 앞뒤 생각 않고 당장 지안과 아르킨을 떼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각인을 방해할 순 없었다. 각인이 상당한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화를 못 참아 지안의 각인을 헛수고로 만드는 것보단, 각인을 받은 아르킨을 지안의 시야에서 치워 버리는 게 더 좋았다. 일리아스는 이를 갈며 눈앞이 하얘지는 분노를 견뎠다. 악시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마냥 각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르킨이 지안을 바라보며 고백하자 그들에게 한 줌 남아 있던 인내심도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경애하고 있습니다.”
“네?”
“사랑합니다.”
십 대 소년이나 던질 법한 돌직구식 고백에 지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걸 잠시 잊어버릴 만큼 놀랐다.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상황도, 분위기도, 여건도, 뭐 하나 적절하지 않았다. 돌변하듯 험악해진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파장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무시무시한 밤바다를 홀로 헤엄쳐 기어코 배를 찾아 되돌아왔다고 말할 때부터 영 이상하다 싶긴 했다. 평범한 기사도만으로는 그런 집념과 의지를 낼 수 없단 걸 왜 모르겠는가.
그에 더해, 이어지는 그의 말과 눈빛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애꿎은 능력자를 또 한 명 홀려 버렸다는 걸. 굳이 아는 척해 보았자 좋을 것 없으니 이대로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고백을 할 줄이야.’
지안은 침착히 각인을 이어나가며 머리를 굴렸다. 사실 굴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눈앞의 기사를 납득시키고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언짢음을 잠재울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니까.
“제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그 고백은 거절하겠습니다.”
퍽 차분하고도 담담한 어조였다.
사실,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싶긴 했다. 북부에서부터 능력자들을 하나하나 각인해 주며 제도에 당도한 참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각인과 동시에 제게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능력자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그들을 칼같이 쳐내는 건 정말이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대뜸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하는 능력자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 감흥도 없을 정도였다. 가이딩 한 번에도 불붙은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게 에스퍼인데 하물며 가이딩이 아닌 각인이라면…… 더는 말할 것도 없다.
각인을 받은 능력자들이 고작해야 십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가이드를 향해 숙명 같은 열병에 빠지고 만 건, 정말이지 불가항력 같은 일이었다.
지안은 한숨과 함께 그간 무수히 내뱉었던 말을 다시 한번 입 밖에 꺼내놓았다.
“그리고 잘 들으세요, 기사님. 지금 느끼는 감정은 딱 오늘 하루만 강렬한 감정이니 매몰되지 마세요. 동요하지 말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마세요. 각인이란 게 원래 마약 같은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아시겠죠? 지금 뭘 느끼시든, 다 순간의 감정이고 착각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
“제 마음을 받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들어만 주셨으면 합니다. 여태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습니다.”
여태 말하지 못했다는 건 예전부터 날 좋아했단 말이구나. 지안이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아르킨은 미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궜다. 뻔히 짐작하고 있던 대답인데도 몸 어딘가가 찢어진 것만 같았다. 폐가 구멍이 뚫려 공기가 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잠시 발끝을 응시한 아르킨은 의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곤란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알면 떨어져.”
버럭 소리친 일리아스는 그대로 아르킨에게 손을 뻗었다. 지안은 그의 손이 아르킨을 붙잡기 전에 입을 열었다.
“멈춰요. 아직 각인이 끝나지 않았어요.”
그 말에 멈칫한 일리아스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지안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일리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정하고, 조금 떨어져 있어요.”
“진정? 웃기는 소리 마.”
“스읍. 일리아스.”
지안의 호명에 일리아스는 잠시 움찔하더니 잔뜩 씨근거리며 돌아섰다. 그답지 않은 얌전한 태도에 아르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흠씬 두들겨 맞거나, 산 채로 불탈 각오를 마치고 한 고백이었다. 그랬는데, 삼황자 전하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알기론 잔뜩 화가 난 삼황자를 저지시키는 건 황태자도 황제 폐하마저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리아스의 온순한 태도가 완전히 이해되기도 했다. 저 또한 지안이 바란다면 그것이 재산이든 심장이든 가리지 않고 다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짓 한 번에 무릎을 꿇고 손짓 한 번에 춤출 수 있었다. 잘 찾아 보면 자존심이 땅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아르킨은 지안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고 희망에 차고 좌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이한 정도로 짙은 맹목성이었다.
그러나 아르킨의 앞으로 돌아온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기사님의 고백을 받아주지 못해 유감이에요.”
그 말과 함께 각인이 끝났다. 손 안에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스르르 지안의 손이 손바닥에서 빠져나갔다. 부축을 위해 가까워졌던 물리적인 거리가 벌어지고. 넘실거리며 쏟아졌던 기운 역시 뚝 멎었다.
더는 폭주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킨은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도무지 기뻐할 수 없었다. 지안의 기운에 감싸여 있을 때 느꼈던 안온하고도 안락한 감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녀에게 내쳐진 것처럼.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그랬다. 아르킨은 지안의 눈빛을 보며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다. 무너지려는 자신을 끊임없이 추슬렀다.
그런 아르킨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던 지안이 물었다.
“기사님과 함께 온 저 능력자들은 누구죠? 아는 사람들인가요?”
“…몇몇은 저와 같은 삼황자 전하 휘하의 기사입니다만, 대부분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제도의 능력자들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앞서 출발한 북부의 능력자들과 황녀 전하가 평원에 널린 몬스터를 얼추 정리했겠네요. 맞나요?”
아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던 도중 황녀 전하를 따르던 능력자들이 몬스터를 확인 사살하는 걸 보았습니다.”
“시온. 일리아스. 우리도 뒤따라 출발해요. 미적거리는 건 충분히 했으니 그만 제도에 입성해야겠어요.”
악시온은 대답 대신 몬스터의 사체가 즐비한 평원을 응시했다. 눈앞의 평원은 폭발이 남긴 화약 냄새와 함께 몬스터의 피와 살점이 작은 실개천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능력자들이 개떼처럼 달려오는 중이었다.
“조금 더 상황이 정리되고 난 뒤 제도에 입성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아니, 각인 장면의 목격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기껏 여기까지 달려와 준 제도의 능력자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당장 급한 불만 끄고 나머지 각인은 전부 황성 앞에서 진행할 거예요. 원래부터 그런 계획이었잖아요? 보여 줄 거예요. 제가 돌아왔다는 걸.”
“폭발로 노면이 고르지 않다. 정 가야겠다면 내게 업히는 게 좋겠다.”
“아니지. 보호라면 내가 지안을 불로 감싸는 게 제일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지안은 쓸데없이 다투기 시작하는 시온과 일리아스를 내버려 둔 채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황녀 전하가 황성의 홀을 장악하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기사님의 등 뒤로 능력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지만, 상관없다.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그러나 문득, 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황녀 전하는 불완전한 각인으로도 며칠을 버텼다. 만에 하나 그 이동 능력자, 아론 베르그만 역시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