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황제가 떠나자 제도의 민심은 즉시 흉흉해졌다. 소문을 통제하고 있던 이멜다마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전해진 인근 영지들의 궤멸 소식은 제도에 남겨진 이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재산깨나 있는 자산가들은 가산을 챙겨 재빨리 동부행을 택했고. 그나마 남겨진 귀족들은 황제의 무능과 대책 없음에 기막혀하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황제마저 도망쳐 버린 와중이다.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낼 방도가 있을 턱이 없었다. 먼 고대에나 존재했다던 몬스터들이 당장 오늘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그나마 제도에 상주하던 병력마저 황제가 싹 긁어가 버렸다.
덕분에 제도의 치안은 고작 3일 만에 무너졌다. 빈 건물을 차지한 도적과 범죄자들은 때를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렸다.
제도의 성벽을 지키고 있던 에이든은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적놈들이 약탈을 일삼다 말고 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당장 치안대가 출동해야 할 일이었으나, 황제가 병사에 이어 제도의 치안대까지 전부 끌고 가 버린 마당이라 마땅히 제지할 사람이 없었다. 현재 제도에 남아 있는 건 황제에게 밉보인 관료들과, 삼황자 전하의 휘하에 있던 능력자들이 전부였다.
제도의 질서 유지에 온 힘을 다했던 일리아스의 모습을 떠올린 에이든은 코털만 한 책임감을 느끼며 게일에게 말했다.
“저거, 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 말에 게일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 하러? 바로 내일 몬스터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불이 났는데 내버려 둘 순 없잖아. 큰불로 번질지도 모르고. 그리고 게일 넌 물을 다루는 이능력자잖냐. 가서 불 좀 꺼.”
“흥. 불길을 잡는 족족 다른 곳에서 방화가 일어나는데 뭣 하러 힘을 빼? 전투에 앞서 괜히 폭주만 앞당기고 싶지 않다. 가려면 너나 가.”
게일이 그렇게 말하니 에이든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후우. 이러다간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보다 사람들이 일으킨 방화가 제도를 불태우는 게 더 빠를지도.”
시무룩한 에이든의 모습에 게일은 얼굴을 구겼다. 한때 삼황자 휘하 기사단에서 집행자 노릇을 해 왔던 동기인 만큼, 그의 착잡함을 모르지 않았다.
“젠장. 알았어. 알겠다고. 갔다 오면 될 거 아니야.”
투덜거리며 게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뻐근한 목을 돌리며 막 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는, 문득 상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새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잠깐, 저거. 그냥 새가 아닌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린 게일은 얼마 안 가 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의 입에서 욕설과 비명이 튀어나왔다.
“제, 젠장! 전투준비! 다들 무기 들라고 해!”
“뭐야. 왜 그래 게일.”
“모, 몬스터! 몬스터야! 저거 그냥 새가 아니라고!”
먹잇감이 눈치를 챘다는 걸 알아차린 건 조용히 상공을 배회하고 있던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게일이 본 건 지구의 에스퍼들도 상대하길 꺼리는 헬플레어였다.
키르르륵―! 키르륵!
먹잇감의 실력을 가늠하듯 눈을 굴린 헬플레어는, 이윽고 날개를 퍼덕이던 걸 멈추고 그대로 하강을 시작했다.
쐐액―! 허공을 무섭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헬플레어가 뿜어낸 산성 독액이 제도의 외벽을 녹여 냈다.
치이이익―!
가까스로 첫 공격을 피해 낸 게일과 에이든은 산성액으로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는 성벽의 모습에 기겁하며 종을 울렸다.
뎅뎅뎅―! 뎅뎅뎅뎅―!
요란한 종소리에 맞춰 헬플레어의 날개가 길게 펄럭였다. 붉은 눈동자가 아쉽게 놓친 먹잇감을 찾아 번들거렸다. 하필 종을 울리고 있던 참이라 두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한 채 표적이 되고 말았다.
산성 독액을 질질 흘리며 헬플레어가 에이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쫙 펼친 날개의 끝과 끝이 거의 20m에 육박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체였으나, 날개를 접은 헬플레어의 속도는 몸집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속력을 자랑했다.
“조심해!”
게일이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쫙 펼쳐진 날카로운 발톱이 에이든을 겨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에이든을 낚아채려던 순간. 게일은 더는 보지 못하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바로 그 때, 누군가 에이든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어억!”
가까스로 헬플레어의 발톱에 당하지 않은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구해 준 이를 바라보았다.
“아. 아르킨 단장님?!”
“정신 차려. 다시 온다.”
그 말대로였다. 잔뜩 약이 오른 헬플레어가 다시 급하강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 날카로운 발톱에 붙잡히면 그대로 몸이 으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론 몸이 아무리 망가져도 재생할 수 있는 이능을 가진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침 헬플레어가 입을 쩍 벌린 채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르킨은 에이든과 게일을 물러서게 한 다음 힘껏 도약해 헬플레어의 아가리 속에 뛰어들었다. 산성액이 무섭게 피부를 녹여 냈지만, 그보단 재생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대로 헬플레어의 혓바닥 위에 올라선 아르킨은, 헬플레어가 막 입을 닫으려던 순간 검을 뽑아 산성액이 흘러나오는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키아아악! 크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상공을 날던 거체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려면 멀었다. 그는 헬플레어의 송곳니를 단단히 붙잡은 뒤, 검을 뽑아내 그대로 입천장을 길게 갈랐다. 산성액으로 검이 부식되기 전에 끝을 볼 생각이었다.
몬스터가 날뛰어 겨냥이 어려웠지만, 오랫동안 기사로 살아온 실력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아르킨은 뇌가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아 위로 힘껏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자 헬플레어의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쓰러트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추락이 남아 있었다. 아르킨은 이어질 충격에 대비해 몸을 웅크렸다.
쿵! 소리와 함께 헬플레어의 거체가 건물을 무너뜨리며 쓰러지자 아르킨은 그제야 닫힌 주둥이를 열고 괴수의 입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혀를 차며 제 상태를 파악했다. 산성액으로 옷은 죄다 녹았고, 검 역시 부식된 상태였다.
“검을 새로 장만해야겠군.”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제도의 외벽이 무너져 내렸다. 놀라 고개를 든 아르킨이 목격한 건, 높이가 거진 5m에 육박하는 또 다른 몬스터였다. 늑대의 얼굴과 뱀의 비늘이 돋은 몸을 한 웨프와이트가 세 개의 뿔을 뽐내며 녹아내린 제도의 성벽을 부수며 넘어오는 중이었다.
크르르릉-! 커헝!
웨프와이트 특유의 포효 소리가 귀를 세차게 긁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이든과 게일은 창백해진 얼굴로 굳어 버렸다. 인근 영지들이 어떻게 몰살당했는지 들으면서도 믿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미친. 기껏해야 돌연변이 몬스터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 하나가 아니야!”
에이든의 외침에 게일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 성벽 저 멀리서 듣도 보도 못한 괴수들이 줄지어 제도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제도 안으로 침입한 웨프와이트의 숫자도 하나가 아니었다.
“……망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게일은, 이후에 있을 일을 떠올리며 사색이 되었다. 몬스터들이 제도를 짓밟고 사람들을 먹어 치울 게 불 보듯 뻔했다. 도망칠 기회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게일은 으득― 이를 갈았다.
“젠장. 황제가 병사들을 끌고 동부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말대로, 제도에 병력이 남아 있었다면 조금쯤은 희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의 방비는 어느 때보다 더 허술해진 상태였다. 몬스터를 상대할 여력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하물며 제도에 나타난 건 모두가 다 아는 일반적인 몬스터조차 아니었다.
“에다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에이든이 수없이 되뇌었던 기도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때였다. 저 멀리 하늘에서 회색 물체가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제도로 향하고 있는 몬스터들의 허리를 끊어 놓았다.
치솟아 오른 구름과 함께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대지가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뒤집히고, 지진이 난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에이든과 게일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빼 들었다.
폭발음은 하나가 아니었다.
콰앙! 콰아아앙―! 쾅!
하늘에서 떨어진 물체가 몬스터를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폭발음이 연쇄적으로 울렸다. 땅이 움푹움푹 패였고, 몬스터들의 사체가 그 위에 흩어졌다. 몰려오던 괴물들이 차례로 케르륵 소리를 내며 숨을 거뒀다.
시야에 들어오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쿠아아아앙―!
바람이 압축되고 터져나가는 소음이 요란했다. 그야말로 창공과 대지를 함께 찢어발기는 대대적인 폭격이었다.
아예 폭격 자체를 처음 본 두 사람은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도륙과 학살의 현장을 눈에 담았다.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능력자들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쩍 벌리거나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마법사? 아니야. 대마법사라 해도 이런 위력은 못 내. 이건,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기막힌 광경에 그들이 잠시 넋을 뺀 사이, 폭격당한 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며 제도의 무너진 성벽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