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그 답을 알려 주듯 황태후가 말했다.
“티타니아는 너처럼 욕심이 많았지. 그만큼 분노도 많았지만, 대신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했어. 그 애가 이미 짝을 둔 북부의 공작에게 홀려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면, 아마 너와 같은 딸을 낳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모두 근거 없는 망상이지만, 뭐 어떠니. 늙은이의 상심이 낳은 무해한 상상에 불과한걸.”
“…….”
“그래서 나는 그냥 착각하기로 했다. 티타니아가 날 위해 널 보내 준 거라고 여기면서 널 보살폈고, 지금처럼 황후로 만들어 주었지.”
“……저를,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널 폐위시키고 싶구나. 애초에 본인부터가 황후의 자리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이거야말로 네게도 나쁘지 않은 결과잖니?”
이멜다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황태후 폐하의 손에 처분되는 건가.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한참의 침묵 끝에 노쇠한 황태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알레인이 격렬히 반대하더구나. 네가 아닌 황후는 있을 수 없다 했던가?”
“…….”
“알레인이 네 기준에 미치지 못할 만큼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그 애만큼 널 아끼는 사람도 없다. 넌 그걸 알아야 했어. 잊지 말렴. 알레인의 멍청한 고집이 너를 살렸다.”
관대한 양 말하는 황태후의 모습에 이멜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멍하게 그녀를 마주 보다가, 뒤늦게 그녀의 처분이 자신을 피해 갔음을 깨달았다. 그런 이멜다에게 황태후가 말했다.
“알레인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이제 테리온의 황제야. 지금까진 그 아이를 이용하는 네 태도를 묵인했지만, 더는 그러지 말렴. 이젠 너도 테리온의 황족이니, 마음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에 걸맞는 책임감을 보여라.”
준엄한 말이었으나 정작 이멜다는 그 말에 비죽 웃고 말았다.
“사랑? 고작 그런 이유로 도망치려 할 만큼 제가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던가요?”
“다른 이유가 있더냐?”
“폐하. 제가 제도를 버리려 한 건 사랑 같은 얄팍한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전 그저, 무능한 그와 최후를 같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최후라니?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제도가 무너지기까지 앞으로 엿새나마 남아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저를 염탐하고 감시할 인력으로 북부의 근황이나 살펴봐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허탈해하며 이멜다는 고개를 숙였다.
* * *
제도를 버리자고 했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번을 계산해 봐도 승산이 없었기에 나온 결론이다.
제도를 지키는 병사를 모조리 희생시키는 걸 감수하며 전략을 꾸려도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그 틈을 메워 줄 능력자들이 협조적으로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계획을 세워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승리하기 위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빠져 있었다.
북부 공작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성녀. 삼황자와 황녀의 호감을 손쉽게 훔친 그녀가 없다.
게다가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만에 하나 성녀가 제도에 멀쩡히 있다 해도,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당장 제국민들에게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는 사실부터 알려야 했다. 지금이라도 피난을 위한 짐을 꾸려야 했다. 아니, 살고 싶다면 가재도구고 뭐고 다 내다 버리고 몸만 챙겨 제도를 내빼야 한다. 그것이 이멜다가 본 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알레인의 선택은 달랐다. 황실의 체면이 손상될 것을 염려한 그는 북부에서 시작된 몬스터 웨이브를 알리는 대신, 황실의 일원들만 챙겼다. 휴양을 명분 삼아 동부로 피신하기 위한 준비가 이미 한창이었다.
덕분에 이멜다는 손톱을 깨물며 하인들이 분주히 마차에 짐을 실어나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당장 며칠 뒤 제국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 나갈 게 뻔히 보였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꼼짝없이 궁 안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그뿐인가. 카리나는 황태후의 수중에 떨어졌고, 알레인이 붙인 기사들은 아예 침실 안에 상주한 채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뭔가를 시도해 볼 여력도,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결국 이멜다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기사의 말과 함께, 동부로 향하는 마차에 반강제로 올라타야 했다. 이 모든 일이 고작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마침 기사의 채근에 의해 강제로 올라탄 마차에는 알레인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틀 만에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이멜다는 멈칫 얼굴을 굳혔다. 그에게 폭언한 걸 사과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머뭇거리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인근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사를 알리고. 동부의 영주들에게 협조를 구해 밀려드는 몬스터를 막을 저지선을 만들어야 해요.”
“걱정 마. 제도에 능력자들을 남겨 뒀어. 일리아스의 기사단 전원에게 수성을 명해 두었으니 그들이 제도를 지켜 낼 거야.”
“폭주를 앞둔 능력자들이 힘을 써 봤자 얼마나 쓰겠나요? 그걸론 부족해요. 게다가 능력자들이 모두 폭주해 버리면 이후의 일은 또 어떻게 하고요? 대책 없이 능력자들을 소모해선 안 돼요.”
“부족한지 어떤지는 해 보고 난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는 건 같은 괴물이어야 해. 네 말대로 어차피 폭주해 죽을 놈들, 이렇게나마 써먹는 게 옳은 일이야.”
“그렇지만…….”
“그만! 대체 무슨 자격으로 참견을 일삼지? 황후로서도, 책사로서도 무엇 하나 책임지지 않은 채 도망치려 한 주제에!”
알레인의 노성에 이멜다는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새 초췌해진 걸 보고 마음이 다소 불편했건만,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사과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간 폐하께 누누이 말했었죠. 제 계획에 동참은 못 하더라도 제 일을 망치진 말라고. 무능한 건 용서할 수 있지만, 제 말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그냥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도 말했어요.”
“내가 언제 네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있었어? 없잖아!”
“있었어요. 매번 그러셨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제게 이렇게 변명하셨죠. 미안해, 이멜다. 내가 듣고 잊었나 봐. 기억나지 않아. 까먹었어!”
“…….”
이멜다는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가감 없이 쏟아 냈다.
“제가 당신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꾸라뜨리고 독살하고 목 졸랐는지 기억은 하시나요? 모르겠죠. 맘 편히 잊었겠지요.”
전부 맞는 말이라 알레인은 우물쭈물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꼴을 본 이멜다는 픽 실소를 터뜨리며 오랜 비밀마저 끄집어내 가며 그를 조롱했다.
“하. 오죽했으면 선황제 폐하께서도 당신을 폐태자로 끌어내릴 생각을 다 하셨을까!”
“뭐? 무슨 말이야.”
얼이 빠진 알레인의 모습에 이멜다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후후. 생각해 보세요, 폐하. 제가 왜 황녀 전하가 주최하는 파티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겠어요? 황녀 전하가 능력자로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왜 그렇게 기뻐했겠어요! 아하하! 이제 와 생각하니 조금도 기뻐할 일이 아니었는데…….”
자조를 마친 이멜다는 눈을 부릅뜬 채 알레인을 마구 몰아붙였다.
“폐하. 나의 폐하. 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든 좀 해 보세요.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어야 넘어가지. 제가 뭘 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요? 아랫것들이 힘들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정보를 취합하고 보고서를 써 봤자 다 무슨 소용이죠? 정작 지도자가 아무것도 이해를 못 하는데. 지금도 보세요. 대처는커녕 뒷일마저 죄다 떠넘긴 채 도망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네가 나와 뭐가 그리 다른데. 너도 나와 똑같이 도망치려 한 주제에. 지금 나를 나무라는 거야?”
“제 말이 그렇게 듣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절 폐위시키면 되겠군요. 절 폐위시켜 폐하의 권위를 세우세요. 황태후 폐하께서 고른 영애를 황후로 삼고, 전 그만 놓아달라고요.”
충격적인 말에 알레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싫어. 난 그렇겐 못 해!”
그는 와락 이멜다를 붙잡았다. 황제라는 사실조차 다 잊은 채 마차 바닥에 무릎 꿇고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앞으론 잊었다는 말 다시는 하지 않을게. 네가 가르쳐 주면 뭐든 배울게. 알잖아, 이멜다. 나는 너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옛날부터 쭉 그래 왔어. 날 봐. 네가 나를 이렇게 길들였잖아. 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이게 무슨……. 일어나세요, 폐하. 기사들이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보라고 해! 난 상관없어! 위엄 따위, 너 없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애초에 황제가 되려고 한 것도 모두 네게 황후의 자리를 주기 위해서였는데!”
“…….”
“네가 없었다면 굳이 세력을 늘리려는 노력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만나 보라던 귀족들이랑 시간을 보낼 일도 없었어! 나라고 황위에 아무 욕심 없던 건 아니지만……. 제발. 들어 봐, 이멜다. 가장 큰 이유는 너였어. 네가 날 황제로 만들었어. 그래 놓고서, 날 떠나겠다고? 절대 용납 못 해.”
나름 절절한 고백이었으나 이멜다는 파리한 얼굴로 알레인을 쏘아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한 만큼 당황스러웠다. 알레인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선황제 폐하께서 그를 폐위시킬 생각이었단 걸 밝힌 뒤, 그게 사실일 리 없다며 불같이 부정할 알레인의 입에서 자신의 폐위를 운운하는 말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랬는데….
여태 죄책감 없이 주물렀던 그의 애정이 처음으로 피부에 닿아 왔다. 알레인이 꽉 잡아 온 팔이 아팠다.
그대로 한참 이멜다를 바라본 알레인은 비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게 가장 고귀한 자리를 주고 싶었어. 후작가에서 널 탈출시킨 뒤에, 네가 누구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황제는, 체념한 얼굴로 단단히 붙잡고 있던 이멜다의 팔을 놓았다.
“황제가 되면 모두 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동부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멜다는 알레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착석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옆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왜 이런 위화감이 느껴지는 거지?
이멜다는 언제나처럼 곧바로 답을 찾아냈다.
언제 어디서든, 알레인은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국제의 웅장한 행사가 있을 때도, 신년제가 시작될 때에도. 그는 늘 한눈을 팔았다. 흘끔거리며 언제나 날 훔쳐보았다.
그래서 시선을 다른 곳에 둔 그가 낯선 거다.
‘하지만 이제 와 알레인이 상심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람.’
속절없이 제도를 뒤로하며 이멜다는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필두로, 성녀를 황후 삼으려 했던 귀족들의 선택이…… 이번만큼은 옳았다고.
‘어쩌면, 에다의 성녀가 황후가 되었더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을지도.’
뒤늦은 가정을 하며 이멜다는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