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이멜다가 왜 그렇게 말하는 건지 궁금했으나 카리나는 굳이 궁금증을 해소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는 그녀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군말 없이 이멜다를 따라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후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경비가 삼엄할 텐데. 괜찮을까요?”
“걱정 마. 매수해 뒀어.”
매사 준비를 철저히 하는 아가씨다웠다. 마침 저 멀리 수풀 너머로 창대를 든 병사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거 보세요. 매수한 병사가 마중을 나왔나 봐요.”
그 말과 함께 이멜다를 돌아본 카리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멜다의 얼굴을 보고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왜 그러세요?”
“……들켰어. 왜지? 어째서 병사들이?”
그 말대로 병사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리나는 뒤늦게 자신들이 포위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검과 창을 든 병사들이 그물처럼 사방을 좁혀들어오는 가운데, 길이 열리며 알레인이 나타났다. 카리나는 사색이 된 채로 서로를 노려보는 이멜다와 알레인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소스라칠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침묵 끝에 알레인이 말했다.
“이멜다. 그만 황후궁으로 돌아가.”
“…….”
“오늘,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줘.”
모든 걸 불문에 부치겠단 관대한 처분에 카리나는 반색하며 이멜다를 잡아끌었다.
“드, 들으셨죠? 그만 돌아가요 아가씨. 네?”
그러나 이멜다는 카리나의 손을 뿌리치며 알레인을 향해 되물었다.
“제가 도망칠 거란 걸 어떻게 아셨나요?”
“……네가, 내게 고백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이멜다가 미간을 찌푸리자 알레인은 성큼 이멜다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걸 알아. 늘 나를 형편없이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군요.”
“…….”
“이럴 줄 알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방심하시길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도리어 경계심을 일깨울 줄이야.”
차가운 본심을 드러내는 이멜다의 모습에 알레인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제 황후를 응시했다. 황태후 폐하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사들을 이끌고 후원을 포위하는 와중에도 이멜다가 떠나려 한다는 걸 믿지 않았다.
그녀가 도망치려 한다는 황태후 폐하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멜다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속을 뒤집어 놓는 배신감에 알레인은 병사들을 향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끌고 가! 황후궁에 가두고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도록 해!”
코앞에서 소리치는 황제의 말에 카리나는 사색이 되었다. 그에 반해, 이멜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차분한 얼굴로 로브 안 주머니를 뒤적거린 이멜다는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대로 알레인의 가슴팍에 집어 던졌다.
“돌려드릴게요. 다시 가져가요.”
태양의 눈물이 형편없이 풀 위를 뒹굴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망연자실한 알레인을 향해 이멜다가 소리쳤다.
“예언 하나 할까요. 당신은 제도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게 될 거예요. 제국의 황제란 작자가 제도를 구할 생각은커녕 이딴 보석이나 구하러 다니는데…… 어떻게 제도가 망하지 않겠어요? 알레인. 당신을 제위에 올린 내가 바보였어요.”
“…….”
“하필 당신을 황제로 만들다니. 내가 어리석었어.”
이멜다의 폭언은 병사들이 그녀를 끌고 간 다음에야 잠잠해졌다. 상황을 보다 못한 호위 기사가 조심스레 알레인에게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집무실로 가지.”
생각보다 멀쩡한 목소리에 기사는 내심 안도했다.
그 길로 곧장 집무실로 향한 알레인은 각 영지에서 올라온 서신과 이멜다가 건네주었던 영상석들을 뒤늦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멜다가 왜 제도를 비워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영상석 속의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제도에 나타난다면, 그날이 바로 테리온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제국의 영광은 순식간에 무색해지고, 드높이 내건 깃발 역시 꺾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멜다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려 한 것만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잔뜩 상심한 채로, 알레인은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 * *
황후궁에는 황성 비밀 통로를 이용할 수 있는 출입구가 없다. 삼엄히 경비하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도주계획이 수포로 되돌아갔음에도, 이멜다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계획처럼 딱딱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도주에 실패했지만, 한때 황녀가 성녀를 빼돌리기 위해 사용한 마법 약과 똑같은 걸 준비해 둔 상태다. 그러니 기회가 아주 사라졌다고 할 순 없다.
다만, 무사히 황후궁을 빠져나가려면 얼굴을 바꿔치기할 대상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이멜다는 자신의 계획을 카리나에게 털어놓았다.
“소란을 일으키자고요?”
“그래. 내가 난동을 부려 관심을 끌게. 화병이나 유리를 깨서 일부러 부상을 입는 거야. 그리고 내가 비명을 지르면…… 너는 내가 크게 다친 것처럼 수선을 피워 줘.”
“아가씨. 뭘 어쩌시려고요. 괜히 일만 더 키우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처럼 붙잡혔을 때를 대비한 계획이 있어. 들어 봐. 내가 다친 걸 알면 기사들이 의원을 부를 거야. 당연히 조수도 하나쯤은 데리고 오겠지. 우리는 얼굴을 바꿔치기한 다음, 의원인 양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그러다 실패하면요? 어떻게 의원을 제압하고 기절시키려고 그러세요.”
“카리나. 난 지금 황후의 신분으로 도망을 치는 거야.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데 설마 사람 한둘만 매수하고 끝냈겠어? 걱정 마. 불려오는 의원이 누구든 내게 협조해 줄 테니.”
자신만만한 이멜다의 말에 카리나는 이멜다가 세운 그간의 공적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 대안이 있었구나. 에를랑겐 후작가의 비범한 영애요, 황태자의 숨겨진 모사꾼이라 불려 온 아가씨답다. 카리나의 불안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비어버린 불안의 빈자리를 채운 건 안도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후원에 나타났던 건 뭔가 상황이 꼬여서 그런 게 분명하다. 더 이상 도주에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카리나가 아는 이멜다는 두 번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란을 피운 끝에 도착한 건, 의원이 아닌 황태후와 그녀의 기사들이었다. 급습이라고 해도 좋을 황태후의 등장에 이멜다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어째서, 매수해 둔 의원이 아닌 황태후 폐하가 나타난 것인가?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척 간단했다.
‘……이렇게 허를 찔리다니. 난 여태 황태후 폐하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거야.’
이외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었다. 카리나를 챙겨 도주하려는 자신을 알레인이 막아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황태후 폐하의 귀띔 탓이리라.
이멜다가 그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동안, 황태후는 기사들을 거느린 채 산산조각 난 화병과 찢어발겨진 레이스 커튼, 엉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실망한 얼굴이구나 이멜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의원이 오지 않았다고 너무 실망하진 말렴. 굳이 의원을 부르지 않더라도 네 옆에 치유 능력자가 있지 않니.”
타이르듯 다정한 황태후의 말에 이멜다는 그대로 소스라쳤다. 어떻게 카리나가 치유 능력자란 걸 간파한 걸까. 애써 숨기고 은폐했던 모든 일들이 다 허사였다. 독사가 엉켜 있는 뱀굴에 떨어진 것처럼 사지가 굳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척추가 오싹하게 떨려 왔다.
힘껏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는 이멜다에게 황태후가 말했다.
“이멜다. 널 가르친 건 나란다. 네가 황후가 되었다고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야.”
“…….”
“게다가 난 너를 도망치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는데……. 날 실망시키는구나. 내 믿음을 저버렸어. 너라면 테리온의 황후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내가 판단을 잘못한 모양이다.”
쓸모를 입증해야 했다. 실망을 뒤집을 뭔가가 필요했다. 하다못해 카리나만이라도 제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엄습해 오는 위기감을 느끼며 이멜다는 황태후의 관심을 끌 만한 말을 골랐다. 하지만 황태후의 입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너를 대신할 영애를 물색하고 온 참이란다.”
못마땅한 목소리와 함께, 황태후는 그간 숨겨 왔던 계획을 이멜다의 앞에 꺼내놓았다.
“네가 영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게 보였거든. 황후의 권리를 손에 쥐여 주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를 않으니. 욕심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알레인과 너는, 한 번도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없지.”
“…….”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너를 어떻게 황후의 자리에 계속 앉혀 둘 수 있겠니. 거기다 마침 에를랑겐 후작가마저 가주 하나 없는 쭉정이가 되고 말았으니, 네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할 테지. 이런 와중에 황후가 호위 기사와 놀아나는 것을 황제에게 들키게 된다면……. 폐위는 물론이고, 사형도 어렵지 않은 일이야.”
충격적인 말에 이멜다는 떨리는 입술을 악물었다. 황성의 실세이자, 아주 오래전부터 배후에서 승리의 역사를 써 왔던 황태후 폐하의 음험한 진면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여태 눈치채지 못했나.
어째서 경계하지 않았던 걸까. 나를 황후로 만들어 준 사람이 알레인이 아닌 황태후 폐하란 걸 알았으면서. 왜 방심했나!
“처음부터 저를 처리할 계획이셨군요.”
황태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왜 그러겠니? 난 너를 딸처럼 아꼈다. 에를랑겐 후작이 어린 너를 괴롭힐 때, 내가 너를 황성에 불러 위로해 주었던 걸 벌써 잊었니? 게다가 나는 널 처음 봤을 때…… 죽은 티타니아가 되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뜬금없이 거론된 옛 황녀의 이름에 언젠가 초상화로 보았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황녀 이야기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유명했다. 하지만 이멜다가 알기론, 그 황녀는 자신과 전혀 닮은 곳이 없었다. 접점이랄 것도 없고, 핏줄이 섞인 것도 아니다.
그럴진대, 대체 황태후 폐하는 내 어디에서 선대 황녀 전하를 떠올리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