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69/199)

170화

북부는 능력자들을 심하게 배척하지 않는다. 북부의 군주들이 대대로 능력자로 발현한 탓도 있지만, 워낙 몬스터가 많은 지역인 데다,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위협적인 맹수가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몬스터나 맹수보다 기후가 더 문제일 때도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북부는 비교적 능력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편이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공작성에는 능력자의 상주가 금지되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근 마을에까지 능력자가 아주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다만, 배척의 정도가 덜하다곤 해도 크고 작은 차별은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스틴은 지하의 입구를 지키는 중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폭주가 부쩍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모두 갑작스런 몬스터의 침공에 맞서 이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였다.

마을 사람들을 공작성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하나라도 더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지만……. 어떤 활약을 했든, 아무리 희생적으로 싸웠든, 끝은 결국 폭주로 이어진다. 치료법도 대안도 없다.

오스틴은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의 모두가 저와 같은 처지였다. 다들 힘껏 싸운 데다 크고 작은 부상까지 입었는데 치료는커녕 살펴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다니. 오스틴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우리 무덤이군.”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서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공작님이 계셨다면 지금보단 취급이 나았을 텐데. 공로를 인정받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공작은 무슨 공작이야! 그 새낀 성녀를 쫓아 북부를 버리고 떠났어! 그리고, 그새 잊었냐? 몇 년 전만 해도 공작성에 얼씬거린 능력자들은 이유 불문 처형이었어!”

“맞아. 정작 본인도 능력자인 주제에, 제 집 안에 능력자 하나 들여놓지 않는 작자라고. 꼴에 대귀족이라 이거지 뭐.”

한바탕 사나운 불평이 이어졌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건, 어떤 성토가 이어지건 끝에 남은 것은 좌절과 공포, 그리고 분노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몬스터를 상대해야 할 때는 모두가 능력자를 찾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난 다음에는 곧 폭주하는 것 아니냐며 모두가 입을 모아 수근거린다. 결국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능력자와 함께 있는 건 불안하다는 이유로 입구나 지키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폭주할 거면 차라리 나가서 죽으란 말도 간간이 나왔다. 화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물론 능력자들이라고 영지민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폭주할 거라면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지하 미로보단 입구나 지키고 있는 게 더 낫긴 했으니까. 이성을 잃고 몬스터처럼 사람들을 죽여 대는 것보단 이게 더 합리적이지 않나. 실제로 가족을 둔 몇몇 능력자들은 아예 자진해서 입구를 지키는 걸 택했다.

그렇다곤 해도, 입맛이 씁쓸한 건 사실이었다.

오스틴은 비관적인 얼굴로 지하의 시커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폭주의 고통이 극심해진 지도 오래되었다.

최후를 그려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죽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으니까. 더는 버틸 수 없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그러기 전에 제 발로 죽으러 나가야 했다. 가뜩이나 폭주를 앞둔 동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곧 다가올 마지막을 예감하던 오스틴은, 다음 순간 구석에 주저앉아 있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유령에 홀린 듯 두 팔을 뻗어 천장을 긁기 시작했다.

“야. 흙 떨어지잖아!”

졸지에 흙을 뒤집어쓴 동료가 항의해왔지만, 오스틴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오스틴은 희미하게 흘러든 기운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폭주의 고통이 착실히 잦아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낯선 기운이 점점 가까워졌다.

가이드의 기운을 느낀 건 오스틴만이 아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던 분노와 좌절을 달래 주는 황홀한 감각에 능력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오스틴을 따라 검으로 천장을 뚫거나 출입구에 쌓아둔 바위를 치워 냈다.

자칫 몬스터가 입구를 뚫고 들어올지도 몰랐지만, 흙을 뚫고 희미하게 침투하는 기운이 너무나 강렬했다. 위험 같은 걸 재고 따질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염원 같은 외침과 함께 오스틴의 손톱이 힘껏 천장을 긁자, 와르르 입구의 천장이 뚫리며 창백한 빛이 지하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스틴은 무너진 흙이 차곡차곡 형태를 이루며 계단을 만드는 것을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계단을 밟으며, 능력자들의 무덤 안으로 지안이 들어섰다.

* * *

지하의 능력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땐 정말 놀랐는데…… 이렇게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젠 좀 안심이 됐다. 다만, 다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였다. 게다가 처음과 달리 모두 심하게 얌전해졌다.

폭력은 나쁘지만, 몹시 유용하기도 하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

뭐, 그래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질서가 잡혔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도 이븐은 몇몇 사람을 따로 뽑아다가 머리만 남겨두고 땅에 묻었다. 짐작하건대 특히 저항이 심했던 능력자인 것 같았다. 개중엔 이미 기절한 사람도 있던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지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땅에 묻힌 사람들을 바라보자, 이븐은 은근슬쩍 지안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저래 보여도 전부 다 멀쩡합니다. 정말입니다.”

지안은 어색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미심쩍지만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하의 능력자들이 어떻게 제압된 건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목격한 게 있으면 의견을 좀 보태거나 할 텐데, 악시온과 일리아스가 몸을 날린 것과 동시에 황녀 전하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서 제압 과정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물론, 주먹질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를 듣긴 했다. 폭력으로 이룬 질서라는 걸 모를 만큼 둔하지도 않다. 그렇다곤 해도 폭주를 앞둔 능력자들이 이렇게 얌전해지다니.

지안은 볼을 긁적이며 제 앞에 줄 선 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지하에 있는 모두가 하나같이 파장이 심각하길래 한껏 방사 가이딩을 펼치며 내려온 건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어쨌든, 일리아스의 취조와 악시온의 검증하에 지하에 있던 능력자들의 이능 확인도 모두 끝났다. 이동 능력자도 없고, 질서도 잡혔으니 이젠 각인을 할 차례다.

지안은 운 좋게 제일 앞줄에 선 오스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오스틴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흙 묻은 손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조용히 내밀어진 성녀의 손을 덥석 잡기엔 자신의 손이 너무 더러웠다. 게다가 손톱 밑에 흙과 모래가 잔뜩 끼어 있었다.

“제가, 제가 손이 더러운데…….”

“괜찮아요.”

지안은 오스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부턴 악덕 가이드 노릇을 좀 해야 한다. 손쉽게 몬스터들을 소탕하려면 능력자들의 협조가 좀 많이 필요하니까.

“이름이 뭐예요?”

“오스틴. 오스틴입니다.”

“그래요. 이제까지 버티느라 고생 많았어요 오스틴.”

그 말에 오스틴은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내려놓은 채 눈물을 터뜨렸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지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스틴. 부탁이 하나 있는데. 절 좀 도와주실래요? 보수를 약속할 순 없지만, 수락하면 평생 폭주하지 않도록 해 드릴게요. 게다가 이능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

“할게요! 뭐든 하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오스틴은, 지안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디에서 그런 맹목성이 쏟아져 나오는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지경이었으나,

사실상 거절할 수 있는 제안도 아니었다. 한참 각인이 진행되는 도중에, 도와달라 말하는 가이드의 말을 세상의 어느 능력자가 거절하겠는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의 상대가 성녀의 탈을 쓴 악마라도 좋았다.

손쉽게 오스틴의 협조를 산 지안은, 그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능력자 모두에게 각인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능력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소리 내 엉엉 우는 사람은 예사였고, 무릎을 꿇거나, 갑작스러운 충성 맹세를 하거나, 아예 발치에다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전부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므로. 지안은 당황하지 않고 차례로 각인을 이어 나갔다.

능력자들의 무덤이 기적의 장소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안이 능력자들의 각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하 미로 깊숙이 숨죽이고 있던 영지민들 역시 북부의 주인이 성녀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소식통은 지안에게 처음으로 각인을 받은 오스틴이었다. 그의 말 대부분이 환호성에 가까운 횡설수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정보는 다 있었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저거 지금 공포에 머리가 돌아 버린 거 아냐?”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게. 어쩌면 폭주 전조 증상일지도 몰라. 얼른 내쫓아!”

“아냐. 잘 들어 봐. 공작님이 돌아오셨다잖아. 사라진 성녀님과 함께!”

“그게 정말이야? 살았다! 우린 살았어! 공작님이 몬스터를 모두 무찌르실 거야!”

“흥! 살긴 뭘 살아! 저거 다 헛소리인 게 분명해. 오스틴이 그냥 미쳐서 저러는 걸 수도 있어!”

“그치만, 오스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잖아! 이대로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순 없는 거잖아!”

희망과 비관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누군가 버럭 외쳤다.

“젠장! 말싸움 그만하고 입구에 가 보면 되잖아! 비켜 봐, 오스틴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한 뒤에 싸워도 늦지 않다고!”

겨우 결론을 내린 영지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출입구를 향해 몰려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지안은 기다렸다는 듯 배낭을 풀어 놓았다.

애초에 오스틴에게 공작의 귀환 소식을 알리라고 한 게 자신이다. 당장은 사지 멀쩡한 사람들만 기웃거리고 있지만, 곧 부상자들도 나타날 것이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질 것을 예감하며 지안은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서둘러 지시했다.

“시온. 사람들을 추려서 공작성 외벽부터 보수하세요. 이런 일은 저보다 시온이 더 잘할 테니까. 그냥 맡길게요. 일리아스. 능력자들 전부 데려가서 컨테이너 안의 물품 싹 가져와요. 양이 많으니 썰매를 가져가시고, 대부분이 폭발물인 데다 폭탄은 화재에 취약하니 특히 조심하셔야 해요.”

지시와 동시에 배낭에서 분주히 의료품을 꺼내고 분류한 지안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상대로 구호 활동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

공작성의 영지민들을 상대로 의료품을 나눠 주고, 쓰임새를 알리고, 시범을 보이며 부상자들을 돌보다 보면 금방 하루가 갈 것이다. 어쩌면 하루 안에 다 끝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곁에 선 이비엔이 조심스레 물었다.

“……난 뭘 할까?”

“호위 겸 제 옆에서 보조 좀 해 주세요. 제가 하는 걸 보다 보면 전하도 뭘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실 거예요. 그리고 이븐? 가서 사람들한테 알려요. 부상자 전부 모아 오라고.”

“맡겨만 주세요!”

큰 목소리로 대답한 이븐은 영지민들의 인기척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얼른 달려갔다. 그냥 명령을 받은 것뿐인데도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감할 수 있었다. 북부는 성녀의 손 아래서 되살아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