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어색함을 털어내기 위해 꺼낸 지안의 화제에 악시온은 쓰게 웃었다. 북부가 궤멸된 와중에도 자신은 살아남은 능력자가 얼마 없기를 바라고 있건만, 정작 지안은 생각이 달랐다.
“나는 그대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대를 능력자들 앞에 내보이는 건, 이동 능력자가 없는지 확인한 뒤다.”
“네. 이동 능력자는 저도 싫어요. 그래도 이동 능력이 폭탄을 운용하기에 딱 좋은 이능이긴 한데……. 사실 드론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보단, 폭탄 자체를 몬스터의 입에 물려 주는 게 더 효과가 크거든요. 알아봤는데 지구의 이동 능력자들은 주로 그렇게 활약하더라구요. 그 점을 생각하면, 이동 능력자들 중 한 사람쯤은 착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착하건 말건, 이동 능력자는 안 돼.”
단호한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눈 위에 남겨진 몬스터의 무수한 족적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흔적을 확인한 일리아스가 말했다.
“발자국으로 보아 블랙 스컬러인 것 같군. 머릿수가 꽤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방향을 보니 공작성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지안은 곧바로 드론을 띄웠다. 블랙 스컬러 무리가 공작성에 도착하기 전에 드론의 미사일로 몇 마리나마 몬스터를 사살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안 가, 드론 조종기의 화면 안으로 공작성을 향해 이동하는 블랙 스컬러 서른 마리가 잡혔다. 무려, 무려 서른 마리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렌즈에 몬스터 무리가 다 잡히지도 않았으니까.
“소형 미사일 투하할게요.”
더 생각할 것 없이 조종기의 미사일 버튼을 누른 지안은 먼 곳에서 울리는 폭발음을 들으며 얼굴을 굳혔다. 폭발음의 크기로 보아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간발의 차이로 몬스터 떼와의 조우를 피한 모양이었다.
1차 폭격으로 처리한 블랙 스컬러는 고작 두 마리. 무리의 발을 잠시 묶어놓긴 했지만 여전히 남은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미사일을 이용한 공격으로 몬스터의 경각심이 한껏 곤두서 있었다.
“재투하합니다.”
드론에 탑재해 놓은 모든 미사일을 소진할 생각으로 연달아 버튼을 눌렀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살한 블랙 스컬러는 고작 여섯 마리. 그리고 전투 불능이 된 건 다섯 마리뿐이다.
드론에 탑재한 미사일의 수량을 생각하면 썩 나쁜 성과는 아니지만…… 거의 스물에 가까운 몬스터가 멀쩡한 채로 살아남았다. 웬만한 중형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급에 가까운 블랙 스컬러가 아직도 득시글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떼를 지어서.
드론을 회수한 뒤 다시 재투입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미사일을 경계하기 시작한 몬스터들에게는 효과가 없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위력이 작은 소형 미사일론 몬스터의 거죽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 고민 끝에 지안이 말했다.
“여기서 대기하죠. 머릿수를 줄이긴 했지만 블랙 스컬러가 스무 마리가량 남았어요. 놈들과 마주치면 불리한 전투가 될 거예요.”
“스무 마리? 그 정도면 공작과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신하지 마세요. 블랙 스컬러 무리를 상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즉답하는 일리아스의 말을, 지안은 그대로 묵살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위험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아요. 시간은 좀 걸려도 드론을 회수한 뒤에 폭탄을 설치해 보내서 차근차근 머릿수를 줄이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에요.”
안전 최우선을 주장하는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넌 나를 너무 과소평가해. 여기 S급 에스퍼가 셋이나 있는데. 블랙 스컬러가 몇 마리든 무슨 상관이야?”
“전하의 말이 맞다. 가능한 빨리 공작성에 도착해야 하니…… 이대로 돌파하는 게 좋겠다. 마침 폭발로 부상을 입었을 테니, 사냥을 하려면 지금이 적기다.”
악시온마저 그렇게 주장하자 지안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결국 지안은 약간을 타협을 통해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출발하는 건 드론을 회수한 다음이 되었다. 드론을 회수해야 다시 폭탄을 장착시켜 날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폭탄의 재투하와 함께 전투가 시작된다면 블랙 스컬러의 처리가 훨씬 더 수월해질 터였다. 게다가 드론이 있어야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전투 현황을 알 수 있다.
그 모든 대화를, 이비엔과 이븐은 몹시 신기해하며 경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론 회수를 마친 지안이 드론에 다시 폭탄을 탑재하기 시작하자 내내 눈을 빛내며 이를 지켜보던 이븐은 참지 못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하늘을 날아서 몬스터를 사살하는 아티팩트라니…… 세상에! 이런 보물은 처음 봐요! 게다가 이렇게나 위력적인데, 일회용이 아니라니!”
이븐의 호들갑에 지안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점검을 마친 지안이 다시 드론을 날려 보낼 준비를 하자 이븐은 얼른 땅굴을 팠다. 드론과 함께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가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최대한 안전한 장소를 지안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날 때부터 대지와 호흡하던 이븐에게 지반을 침하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순식간에 지하 주차장을 만들어낸 이븐이 말했다.
“여기서 아티팩트를 사용하시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추위도 피할 수 있고, 마차가 몬스터의 눈에 띌 가능성도 더 적으니까요.”
경사로까지 완벽한 주차장의 모습에 지안은 내심 감탄했다. 안 그래도 트럭이 좀 신경 쓰이던 참이라 그냥 쉘터를 꺼낼까 고민했는데.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지하에 공간을 마련해주다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지안은 드론을 날리려다 말고 웃으며 손전등을 꺼내 이븐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이븐. 답례로 이거 드릴게요.”
뒤이어 손전등 사용법을 들은 이븐은 잔뜩 신이 난 채로 전원 버튼을 몇 번이고 달칵거렸다.
“이거 정말 제가 가져도 되나요?”
“네.”
“정말로요? 하지만 나중에 이 아티팩트가 필요해지시면요? 그럼 어떡해요? 전 잠깐 빌려 주시는 걸로도 충분히 좋아요. 그러니 사양할……”
“여러 개 있어요. 그러니 그건 이븐이 가져요.”
선선한 지안의 말에 이븐은 반색하며 말했다.
“그, 그럼 의뢰 착수금으로 받아 둘게요!”
“착수금이요?”
“지금 공작성으로 가시는 거잖아요. 저도 일꾼으로 쓸 만해요. 보기엔 이래도 능력자라서, 무거운 것도 웬만한 성인 남자들보단 제가 더 잘 들걸요! 호위도 잘해요. 저 용병 생활만 십 년 했어요!”
어떤 집념마저 느껴지는 자기 어필에 지안은 어색히 웃으며 말했다.
“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
일리아스의 말이 맞았다. 폭탄을 투하해 블랙 스컬러의 수를 줄여 놓았음에도 남은 머릿수가 만만치 않다 생각했는데……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시온은 검 한 번 휘두르는 걸로 착실히 블랙 스컬러의 목을 떨어뜨렸고, 일리아스는 한술 더 떠서 아예 몬스터 통구이를 만들어놓는 중이었다.
그 결과, 십여 마리의 블랙 스컬러 무리가 모두 처리되는 데는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굳이 드론을 회수해서 다시 날려 보낼 필요도 없었던 거다.
내내 함께 영상을 확인하고 있던 이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삼스레 놀란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에서 진작 시온과 일리아스의 전투를 목격한 바 있었지만, 사실 그조차 두 사람이 지닌 실력의 극히 일부였을 줄이야!
반면, 이비엔은 영상 속 활약에도 불구하고 영 심드렁했다.
“뭘 그렇게 놀라? 오라버니는 폭주한 능력자들을 처단하는 집행관이었고, 북부의 공작들은 대대로 무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어. 둘 다 네 앞에서 내숭을 떠느라 힘자랑을 안 한 것뿐이지 원래 저런 인간들이었어. 그리고 저 정도는 나도 해. 혼자서도 충분히.”
사실인지 아닌지 진실을 알 수 없는 허세였지만, 지안은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든든하네요.”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블랙 스컬러를 죄다 처리한 두 사람과 다시 합류한 뒤 공작성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안은, 폐허가 된 공작성에 새로이 발을 디뎠다.
무너진 성벽과 짓뭉개진 가옥들의 잔해를 넘자, 간신히 절반만 남아 있는 공작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철옹성 같았던 이곳의 첫인상을 기억하고 있기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높게 솟아오른 성벽을 요새처럼 두르고 있던 곳이 이렇게 무참히 파괴되다니……. 참상의 실태를 영상으로 간접 확인했을 땐 미처 몰랐던 현장감이 피부로 생생히 느껴졌다. 할 말을 잃은 지안을 대신해 이븐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오, 오데르겐 공작성이!”
그 외침에 지안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누구도 자신의 탓이라 한 적 없고 외려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 한껏 위로받았지만,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자신이야말로 이 참상에 일조한 책임자였다.
드론으로 미리 공작성의 모습을 확인했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는데도 무너진 공작성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숙인 지안은 도피하듯 땅 아래 지하에서부터 느껴지는 파장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하얗게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지안은 마침내 손을 들어 천천히 위치를 가리켜 보였다.
“이 아래에 능력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결연한 목소리에 덩달아 정신을 차린 이븐은 이능을 사용해 지하를 살폈다. 감지를 시작하자 집집마다 작은 지하실을 두고 있던 만달렌과 달리, 공작성 아래 미로 같은 지하가 펼쳐져 있는 것이 읽혔다.
“정말이네요. 지하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땅 아래서 인기척이 느껴져요.”
“이븐,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만들어줘요.”
지안의 지시에 곧바로 땅이 들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