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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167/199)

168화

그렇게 얼떨결에 의자에 착석한 채 얼마나 굳어 있었을까. 눈치껏 지안이 건넨 코코아를 받아든 이븐은 주저하다 말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공작의 손에 죽든, 황자 전하의 손에 죽든, 할 말은 하고 죽어야겠다!

하지만 축복을 구걸하기도 전에, 성녀가 먼저 컵을 든 자신의 양 손등을 손바닥으로 감싸주었다.

“파장이 불안정하네요. 차는 한 손으로도 마실 수 있으니까. 남은 한 손은 저한테 주세요. 아참. 제가 잠깐 손을 잡고 있어도 괜찮으실까요?”

“네? 네! 괜찮고 말고요!”

무심코 격하게 반응하고 만 이븐이 뒤늦게 얼굴을 붉히자, 지안은 웃으며 코코아를 눈짓해 보였다.

“드세요. 그거 맛있어요.”

지안의 말에 이븐은 조심스레 종이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적당히 식은 코코아가 달짝지근하게 혀에 달라붙자 저절로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봐요. 무척 다네요.”

“초콜릿을 녹인 음료예요.”

“그, 그렇게 귀한 걸…!”

“딱히 귀한 것까진 아닌데…. 마음에 드시면 한 잔 더 드릴게요. 그보다, 어떻게 북부에 오게 된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븐을 본 건 제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안의 말에 이븐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리아스를 흘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삼황자 전하께서 시해범으로 지목되고 난 직후… 잠시 동안은 제도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엔 괜히 연루돼서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가 북부의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가 나란히 황성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하지만 성녀님께선 여전히 황성에 계신다기에…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능력자들 모두 성녀님의 거취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황성에서 무슨 답을 주겠지 하면서요. 그런데…….”

침을 삼킨 이븐은 히터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어진 이븐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황성에서 능력자들의 앞에 성녀를 내세워 보인 날, 바람의 이능이 날아와 성녀의 목을 갈랐다니?

“대체 무슨… 저는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떨떠름해하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이 답을 내어 주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하나뿐이지. 분명 이멜다가 가짜를 내세웠을 거야. 그래서, 범인으론 누가 지목됐지?”

“성녀 시해범으로 지목된 건 바람의 이능력자입니다. 그 일로 많은 능력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됐고……. 이능이 바람이란 이유만으로 죄없이 살해당한 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븐의 말에 지안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가. 당시 저는, 이동 능력자에게 납치당해 동부를 떠돌고 있었어요.”

“동부요? 하. 어쩐지 북부를 이 잡듯 뒤져도 단서 하나 없다 싶더라니……. 반대편인 동부에 계셨을 줄이야.”

말해 놓고서 이븐은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일리아스의 눈초리가 자못 사나워졌기 때문이었다.

“재밌군. 성녀가 죽었단 것까지 전부 알고 있는 마당에, 북부행? 게다가 이 잡듯 북부를 뒤졌다고? 무슨 용건으로? 무얼 바라며 지안을 찾은 거지?”

“그, 그게…….”

“그만해요, 일리아스. 어쨌든 이븐이 북부에 있어 준 덕분에 인명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잖아요. 이븐이 아니었다면 영상으로 본 그 남자는 그대로 죽고 말았을 거예요. 아. 그렇지. 시온. 그 사람은 괜찮아요? 치료는 잘 됐어요?”

“무사하다. 가죽옷을 두껍게 입고 있어서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님이 비상식량도 남겨놓고 오셔서 그 가족이 생존하는 덴 한동안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악시온과 이븐의 설명에 지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렇구나.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븐. 저도 궁금하네요. 제가 죽은 줄 알았을 텐데. 어째서 북부행을 택한 거예요?”

“즉위식 퍼레이드가 있던 날. 저는 맨 앞줄에서 폐하와 성녀님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덕분에 두 분의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었죠. 다들 함성을 지르느라 몰랐지만, 전 분명히 들었어요. ‘내가 성녀가 아니란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아.’라고요. 겉으로 보이는 얼굴은 같았지만, 제가 아는 성녀님의 목소리가 아니었죠.”

이븐의 말에 이비엔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속삭이듯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바로 그 말 덕분에, 다른 누군가가 성녀님의 행세를 대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게다가…… 세상에 어느 능력자가 성녀님을 살해하려 들겠어요? 무언가 제가 모르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게 분명했어요.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의뢰를 단서 삼아 북부행을 택했고요. 본래는 오데르겐 공작성이 제 목적지였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몬스터 때문에 만달렌에 발이 묶였죠.”

거기까지 말한 이븐은 돌연 심각한 얼굴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보단, 현재 북부 전체가 위험지대예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몬스터로 북부가 이처럼 궤멸되기까지……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어요. 당장 여기서 탈출해야 해요!”

일주일이라면 딱 지구에 가 있던 시간만큼이다. 지안은 흐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미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이비엔은 심각한 얼굴로 이븐을 채근했다.

“혹시 중앙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제도는 무사한가?”

“아마 항전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확한 소식은 저도 들은 바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만달렌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했던 터라 알려드릴 만한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침통해하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저 때문에…… 북부에 이어 제도까지 위험해지고 말았네요.”

흔들리는 목소리에 이비엔은 퍼뜩 지안을 돌아보았다. 그늘을 드리운 듯 어두운 얼굴을 발견한 황녀는 덩달아 사색이 되어 지안의 손을 잡았다.

“그런, 그런 말 마! 샤먼이 폭주하는 능력자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넌 멈추려고 했어. 그랬는데, 내가 그런 너를 떠밀어 넣은 거잖아. 잘못은 내게 있어!”

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녀 전하에겐 잘못이 없다. 그리고 자신은 잘잘못을 가리거나 책임을 따지거나 자책할 생각도 없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이제 와 누구에게 얼만큼의 잘못이 있는지 가려 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신탁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잖아요. 알고도 떠나려 한 제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순 없죠.”

천장을 올려다보며 푹 한숨을 내쉰 지안은, 도중에 표정을 바꾸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수습하면 되니까.”

“수습, 이라면…….”

“모든 몬스터들이 단숨에 제도로 올라가진 못했을 거예요. 기동력이 느린 개체는 아직 북부에 남아 있을 테니, 일단 그것부터 소탕해야죠.”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지안의 모습과 태연한 일리아스, 악시온의 모습에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차분해졌다.

“공작성으로 가요. 시온이 공작성 지하에 영지민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들을 구하고 이후에 능력자들을 찾아 각인하면 전력이 크게 상승할 거예요. 아. 그 전에, 이븐에게도 각인을 해 줘야겠네요.”

“각인이요? 각인이 뭔가요?”

“음. 그러니까 각인이 뭐냐면…… 이런 거죠.”

대답과 함께 지안은 한껏 기운을 풀어냈다. 그리고 각인이 시작되자, 이븐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 * *

일반인에 가까운 가이드의 체력으로 눈보라가 치는 북부의 설원을 직접 걸어 이동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아무 문제 없다. 이럴 줄 알고 트럭의 바퀴에 감을 스노우 체인을 챙겨 왔으니까. 간혹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운행이 불가능한 곳도 종종 나타났지만, 전혀 난처하지 않았다. 일리아스가 이능을 사용해 눈을 녹이며 길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트럭이 거침없이 눈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이비엔은 연신 감탄하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북부의 설경을 바라보았다.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짐이 너무 많아서 거의 구겨지듯 탑승한 채인데도 황녀의 얼굴에선 불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븐 역시 이비엔과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다 같이 탑승한 보람이 있었다. 지안은 즐거운 얼굴로 연신 감탄하는 황녀와 이븐을 바라보았다. 비록 좌석 부족으로 악시온의 허벅지에 엉거주춤 걸터앉게 되긴 했지만, 저 반응을 보니 포개어 앉는 불편을 감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시온에겐 조금 미안했다. 졸지에 그가 인간 의자 역할을 하게 된 탓이었다.

“저 엄청 무겁죠……. 미안해요 시온.”

“전혀 무겁지 않다. 그보단…….”

낮은 음성과 함께 허리에 그의 손이 감겼다. 악시온은 지안을 바짝 당겨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최대한,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다.”

어쩐지 곤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역시 불편한 거구나 싶어서 지안은 슬쩍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최대한 그를 덜 깔아뭉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속도를 내는 트럭 안에서 기본 스쿼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덕분에 괴로워진 건 악시온이었다. 트럭이 덜컹일 때마다 지안의 엉덩이가 허벅지에 비벼졌다. 점점 힘을 받는 하체 탓에 차마 지안의 허리를 당겨 안을 수도 없었다. 지안이 꼼지락대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하얘지며 피가 말랐다.

‘지안. 제발. 가만히 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악시온은 지안의 허리를 꽉 잡아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러 앉혔다. 범상치 않은 악력에 화들짝 뒤를 돌아본 지안은 그제야 이상을 알아차렸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 턱과 거친 흥분이 더해진 파장에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지안은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붉혔다.

차라리 지안이 당황해하며 불쾌해했다면 상황은 빠르게 종결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악시온이 느낀 것은 희미한 설렘과 갈망이었다. 자신이 지안을 원하는 만큼이나 지안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음습한 욕망과 순진무구한 호기심 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런 세세한 사실이야 어쨌건 지안 역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탓에 상황이 알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악시온은 한참 동안이나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십여 분 후 악시온이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자, 지안은 짐짓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얼른 능력자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원래 북부는 능력자가 적었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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