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6/199)

167화

그렇게 얼마나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까. 일리아스가 툭 말했다.

“…나는 정부 자리라도 좋아.”

“네?”

“영지가 박살이 났다곤 하지만 공작의 기반이 모두 무너진 건 아니야. 그에겐 북부가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북부인들은 얼마든지 그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거다. 반면, 나는 반역자 신세지. 내 신분이 다시 복권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일리아스…….”

“설령 누명을 벗고 지위를 되찾는다고 해도, 넌 황성을 싫어하니 결코 황자비가 되어 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나는, 정부라도 좋아. 그런 형태라도 괜찮으니까…… 곁에 있게 해 줘.”

지금처럼 투정 부릴 수 있게 해 줘. 내 질투를 모른 척 받아 줘. 뒷말을 삼키며 일리아스는 지안의 가슴팍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지안은 당황한 채 일리아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던 사람의 입에서, 심지어 태생부터 황족이었던 사람이 정부 운운하는 말을 하다니. 내가 은연중에 시온과 일리아스를 차별적으로 대하기라도 한 건가? 나도 모르게 호감 표현을 한쪽에만 치중했나? 되도록 동등하게 대하려고 늘 노력했는데 그걸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덩치를 잊기라도 한 듯 자꾸만 품을 파고드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그의 정수리와 이마에 부러 소리 내 입을 맞췄다.

“일리아스. 잘 들어요. 나는 그런 불안정하고 모욕적인 위치에 일리아스를 두지 않을 거예요.”

“나 때문에 곤란해질지도 몰라. 반역자의 여자로 내몰릴 수도 있어.”

“반역자의 여자? 전 대륙이 다 망하게 생긴 마당에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는데요? 공작성이 폭삭 무너진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어요? 그리고 반역 누명 못 벗게 돼도 괜찮아요. 제가 황제 시켜 드릴게요. 제도쯤이야 트럭에 실린 폭탄 몇 번 터뜨리는 걸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걸요. 드론에 폭탄을 실어 떨어뜨리면 그만이니까.”

장난과 진담이 뒤섞인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잠시 근심을 잊고 웃었다. 그러던 도중, 시선을 느낀 일리아스는 퍼뜩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새 공작이 되돌아온 건가?’

그러나 그가 발견한 건 기막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비엔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덩달아 황녀와 시선을 마주치게 된 지안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헉. 저, 전하. 언제부터 보고 계셨어요?”

“……그게, 정부 어쩌고 할 때부터.”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

* * *

“그러니까 내가 들었던 날벌레 소리가 사실은 이 기계가 날아다니는 소리였단 거지?”

“맞아요. 한번 조종해 보실래요?”

“……내가 망가뜨리면 어떡해?”

“게이트용 드론이라 추락 몇 번 한다고 망가지진 않아요. 너무 높이 날리지만 않으면 돼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조심스레 드론 조종기를 받아들었다. 소심하게 드론을 띄웠다가 내리길 반복한 이비엔은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지안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드론을 통해 허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면 제도는 확실히 망하게 될 거야. 상공에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인데, 네가 영상으로 보여 준 폭약의 화력대로라면 황성의 어떤 고위마법사도 절대 방어할 수 없어! 아니, 사실상 방어조차 못 하겠지. 예고 없이 기습적으로 떨어지는 폭탄을 막을 수 있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잔뜩 흥분한 채로 설명을 늘어놓은 이비엔은, 다음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를 제위에 올리겠단 말. 진심이야?”

“설마요. 농담이었어요.”

“그럼 바깥의 폭탄들은 대체 왜 그렇게 많이……. 게다가, 드론? 이것만 있으면 하늘을 통한 침공도 얼마든지 가능해. 대륙에 지배하지 못할 왕국이 없을 거야.”

“딱히 침략하고 싶은 곳도 없고. 지배하고 싶은 곳도 없어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이멜다에게 보복하려고? 그녀가 있는 황성을 쓸어 버리려고 준비해 온 거야?”

“보복이라뇨. 오해세요, 전하. 폭탄은 황성이 아니라 몬스터를 제거하기 위해 가져온 거고, 드론은 일종의 정찰기예요. 사람을 보내는 것보단 드론을 날려 보내는 게 훨씬 유용하거든요. 게다가 보복 같은 건 전혀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제도에 폭탄을 투하시킬 순 없잖아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폭발에 휘말리거나 크게 다칠 텐데. 그럴 순 없죠.”

그 말에 이비엔은 내심 안도했다. 지안의 성격상 그러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훨씬 안심이 됐다.

“그렇구나. 근데 두 사람…… 사귀기로 한 거야? 공작 몰래?”

“그게, 공작님도 알고 계세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안이 가이드인 걸 생각하면, 이 같은 공생이야말로 가장 평화적인 방법일 것이다. 사실상 유일한 해결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이런 극적인 타결이 가능해진 걸까.

공작과 오라버니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협상을 했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분명 여러 번의 싸움과 분쟁을 통해 어렵게 협상한 결과겠지.

가능하다면 그 내막을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만, 이비엔은 그냥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잘못 캐물었다가 지안이 곤란해하거나 기분이 상하면 어떡하나. 그럴 바에야 평생 몰라도 좋다. 정 궁금하면 추후 오라버니를 상대로 진실을 알아내면 그만이다.

지금은 지안이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그깟 호기심으로 이 분위기를 망치진 않을 것이다. 이비엔은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지금이라면 북부의 추위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우물쭈물한 이비엔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저도 황녀 전하가 죽은 줄 알았어요.”

“미안해. 그리고 또 살려 줘서 고마워.”

간지러운 대답에 지안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에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내 지안에게 집중하고 있느라 잘 몰랐지만, 조금만 살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모든 게 최상이었다.

말인즉, 단순히 건강해졌다 정도가 아니었다. 육신의 회복은 물론이고 이능까지 더 강력해진 기분이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영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이비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내게 뭘 먹인 거야? 그리고 뭘 어떻게 한 거야? 난 분명 폭주했었는데……. 이상해. 네가 가이딩을 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능이 완전히 잠잠해졌어. 게다가 나, 너랑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왠지 지금이라면 아무리 이능을 써도 괜찮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

“착각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이능을 펑펑 써도 평생 폭주하는 일 없으실 거예요. 각인이 끝났으니까. 그리고 전하가 건강해진 건 엘릭서를 먹였기 때문이에요. 지구의 비약 같은 건데. 전하를 위해 강탈을 좀 했죠. 사기도 좀 치고.”

“강탈…? 사기? 네가?”

“전 우두머리 역할만 좀 했고. 나머지는 시온과 일리아스가 도와줬어요.”

가볍게 말하지만 지안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썼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라버니의 이름은 그렇다 쳐도, 공작의 애칭마저 스스럼없이 부르다니. 대체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비엔이 호기심을 애써 감추는 사이, 돌연 지안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아. 시온이 오고 있네요. 파장이 하나 더 느껴지는 걸 보니… 이븐과 함께 오나 봐요.”

“이븐?”

“네. 신전에서 잠깐 본 적 있는데. 기억하세요? 성축일날 능력자들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줬던 여자분이요. 그분이 만들어준 땅굴 덕분에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잖아요.”

“아. 기억나.”

“손님이 올 테니 마실 걸 준비해야겠네요. 전하. 혹시 코코아 좋아하세요?”

“뭔지 몰라도 차를 타려는 거라면 내가 할게.”

“아뇨. 환자는 그냥 거기 앉아 있어요.”

“나 다 나았는데…….”

지안은 못 들은 척 포트에다 물을 끓이고 코코아 분말과 종이컵을 꺼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쉘터의 입구가 펄럭이며 열렸다. 훅 몰아쳐 오는 찬바람과 함께, 악시온이 쉘터 안으로 들어섰다.

때맞춰 머릿수에 맞춰 코코아도 전부 완성된 참이었다. 반색하며 나선 지안은 손을 뻗어 공작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물었다.

“무전 한 번 없어서 걱정했어요.”

“서둘러 돌아오느라… 별일 없었나?”

“황녀 전하가 깨어나셨어요. 그리고 이븐? 오랜만이에요.”

“서, 성녀님!”

지안은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지안은 이븐을 향해 상냥히 웃어 보였다.

“이쪽으로 와서 몸 좀 녹여요. 달달한 음료 좋아하세요?”

지안의 말에 이븐은 그제야 공기 중에 미칠 듯이 달콤한 냄새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코코아의 다디단 냄새보다 더 유혹적인 건 눈앞의 성녀였다.

성녀를 향해 튀어 나가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간 몬스터를 피해 살아남으려 이능을 남발한 탓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이성을 놓고 와락 달려들고 싶었다. 실제로 이븐은 폭주에 거의 임박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닌 척 성녀의 곁에 선 채로 접근을 불허하는 공작 탓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공작의 검이 자신의 목을 가를 것이다. 바로 그 확률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신경이 무섭게 곤두섰다. 이븐은 몸을 떨며 지안을 응시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불안정한 파장에 지안은 악시온을 뒤로 물리고 서둘러 이븐의 손을 잡았다. 접촉 가이딩도 하고, 겸사겸사 그녀를 히터 옆으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접촉 가이딩을 시작하자, 이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앗. 이븐, 괜찮아요?”

대답해야 하는데.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이 이븐의 전신을 지배했다. 소리 없이 입술을 뻐끔거리는 이븐의 모습에 지안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단 악시온이 더 빨랐다. 넋을 놓은 이븐의 뒷덜미를 붙잡아 달랑 들어 올린 공작은, 다소 거친 손길로 그녀를 히터 앞 의자에 앉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