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4/199)

165화

내팽개쳐 둔 트럭으로 되돌아온 지안은 컨테이너에서 가장 먼저 게이트용 쉘터를 꺼냈다.

게이트 내에서 사용 가능한 게이트 쉘터는 은신 기능을 갖춘 쉼터로,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 줘 각성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몬스터가 인근 1km 내 접근할 시엔 자동으로 경고음도 송출해 준다. 보기엔 일반적인 텐트 같아도 단순한 캠핑용 텐트와는 차원이 다르달까.

게다가 가장 좋은 건, 원터치 설치다. 딱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알아서 설치가 완료된다. 설치와 동시에 바닥에 고정되는 기능도 겸하고 있어서 강풍에 쉘터가 날아가거나 하는 일도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동식 간이 주거지다.

설치와 동시에 쉘터 안으로 들어선 지안은 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쉘터. 불 좀 켜 줘.”

그 한마디에 쉘터에 전원이 들어오며 불이 켜졌다. 뼈대의 군데군데 삽입된 LED 조명이 조밀하게 빛을 내자 이비엔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지안. 너…… 마법사였어?”

“그럴 리가요. 이건 인공지능이에요. 마법이 아니라 과학의 산물이죠. 우선, 전하는 좀 쉬셔야겠어요. 일리아스, 거기 에어 빈백 버튼 좀 눌러줘요. 황녀 전하 좀 눕히게.”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군말 없이 에어 빈백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납작하던 천이 알아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비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안과 일리아스를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을 뺏은 건 따로 있었다. 오라버니의 이름을 이토록 친근히 부르다니. 게다가 지안은 더는 오라버니를 불편해하거나 밀어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건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황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지안이 이비엔을 빈백에 눕혔기 때문이었다.

“좀 쉬세요. 기왕 누운 김에 잠도 좀 자고.”

다정한 듯 강압적인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설치된 이상한 천막 하며, 살짝 건드리자마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침대까지. 게다가 지안이 가져와 몸 위에 덮어 준 이불은 장어의 피부처럼 검고 미끌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놀라운 건 지안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그 얼음 절벽으로 되돌아가 있을 것 같았다. 마법사가 된 지안도, 오라버니와 공작도 모두 사라지고 다시 혼자가 될 것 같았다.

바로 그 불안감에 이비엔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걸 본 지안은 별수 없이 이비엔의 옆에 비스듬히 자리 잡고 누웠다. 그렇게 했는데도, 이비엔이 잠들기까진 한 시간가량의 시간이 더 걸렸다. 황녀는 어린아이처럼 지안의 허리에 두 팔을 칭칭 감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지안은 잠든 이비엔의 손을 떼어 내려다 관둬 버렸다. 편히 자도록 제대로 눕히려다가 도리어 깨워 버릴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도 잠들려다 말고 퍼뜩 깨어나 졸음에 겨운 눈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안심하지 않았나. 이 같은 황녀 전하의 모습을 생각하면, 전하가 완전히 잠들 때까진 옆에 앉아 있어야 했다.

다만, 신탁이 이미 실현되었다 생각하니 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작성과 그 근방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시온. 드론 좀 꺼내 줘요. 공작성이 어떻게 됐는지 영상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군말 없이 드론과 조종기를 꺼내 주었다. 서둘러 드론을 가동해 날려 보낸 지안은, 송출된 영상을 악시온과 공유하며 나아간 끝에 처참히 파괴된 공작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작성이….”

지안은 말을 잇지 못하며 악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기어코 지구로 돌아가려 하지만 않았어도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북부의 얼음산이 파괴되는 일도, 그 아래 갇혀 있던 몬스터들이 깨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소복이 쌓인 눈이 폐허가 된 공작성의 참상을 얼핏 가려 주었지만, 흰 눈 아래 영지민들의 시신이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다 아득했다. 지안은 조종기를 든 손을 떨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해요. 시온. 내가 지구로 돌아가려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이런 일은….”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안의 손을 잡았다.

“그대의 탓이 아니다. 신탁은 반드시 일어나기에 신탁이다. 설령 그대가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유로든 신탁은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손을 떨다간 드론이 추락할 거다. 집중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급기야 지안이 눈시울마저 붉히자 악시온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염려 마라. 보는 것과 달리 피해가 크진 않을 거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공작성 지하에 대피소가 있다. 자세히 보면 파괴된 대부분이 건물일 뿐, 시신이 보이거나 하진 않잖나. 다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을 거다.”

“…정말로요?”

“정말이다. 북부는 눈보라와 몬스터가 공존하는 척박한 곳이라, 각 마을마다 유사시를 대비해 지하에 땅굴을 파 놓는다. 그리고 공작성의 대피소는 성 인근의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튼튼하다. 보이는 것만큼 피해가 크진 않을 거다. 무너진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상심하지 마라.”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외려 위로를 건네는 역설에 지안은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파괴된 터전을 목격하면 누구든 분노하기 마련이다. 게이트 사태를 겪어보았기에 더욱 뼈저리게 이 사실을 안다. 삶의 터전을, 고향을 잃은 사람에겐 반드시 분노할 대상이 필요하다. 원망의 대상이라도 있어야 현실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안은 악시온이 제게 폐허가 된 공작성에 대한 책임을 물어도, 이를 빌미로 어떤 불합리한 조건을 내밀어도 가능한 한 수용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것이 비난이라 해도 감내할 각오였다.

그랬는데, 버럭 소리치고 화내도 모자랄 상황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그의 이해심이 바다처럼 넓어서? 사람이 너무 좋아서?

아니, 아니다.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이토록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놀라고 겁먹을까 봐, 슬픔과 원망을 드러내는 대신 모든 걸 마음 한구석에 몰아넣은 거다.

죄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지안은 악시온의 눈동자에서 상심의 기색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곤 늪처럼 진득한 애정뿐이었다.

놀라울 만큼 깊은 사랑뿐이다.

“내가, 내가 다 책임질게요. 어떻게든… 공작성을 재건해 드릴게요.”

결의에 찬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북부의 주인인 내가 할 일이지 그대의 과업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빼앗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끝까지 다정한 음성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도 사람이니 얼마든지 원망하고 질책할 수 있는 일인데, 침통함조차 드러내지 않다니. 하지만 시온에게서 느껴지는 파장이 알려 주고 있다. 그의 말과 태도 모두, 마음속 진심을 그대로 전달한 것일 뿐이란 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하는 지안에게 악시온이 말했다.

“공작성보단, 그곳에서 좀 떨어진 인근 마을을 확인해 보고 싶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을의 규모가 작아 훈련받은 병사들이 배치되지 못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만달렌 같은.”

그 말에 지안은 마음의 동요를 뒤로 미룬 채 드론을 조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길 한참 후. 군데군데 보이는 초록색의 이끼와 순록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달렌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만달렌을 찾았다고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하얀 눈밭 위로 드문드문 보이는 순록의 핏빛 사체가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드론을 높이 띄워 올린 지안은 영상의 사각지대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괴성에 얼굴을 굳혔다.

만델렌에 몬스터가 있다!

서둘러 소리가 들려오는 위치를 잡자, 무너진 집의 잔해 아래를 파헤치는 몬스터의 모습이 비쳤다. 집요하게 건물의 잔해를 파헤치는 행동이 왠지 불길했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했던가. 얼마 안 가 몬스터의 길쭉한 주둥이에 사람이 딸려 나왔다. 지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다리를 물린 남자가 허공 위를 붕 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심각한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아악! 아빠!

―여보!

비명과 함께 잔해 속에서 튀어나온 건, 고작해야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와 중년의 부인이었다. 몬스터의 입에 물린 남편을 구하려 무턱대고 튀어나온 건지 손에 몽둥이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턱을 움직이며 입에 물린 사람을 그대로 씹어 삼키는 몬스터의 모습에 비명 소리가 점점 커졌다. 끔찍한 광경에 지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안 돼!”

조종기를 든 손이 절로 떨렸다. 드론에 미리 탑재시켜 놓은 소형 미사일이 퍼뜩 생각났지만, 몬스터의 입에 사람이 물려 있다. 함부로 미사일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지안은 좌절하며 이를 악물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니!

“누군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은…!”

신이 기도를 들어 준 걸까. 애타는 염원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반대편의 땅 아래서 금발 머리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눈 위로 솟아오른 대지의 창이 단숨에 몬스터의 심장을 꿰뚫었다.

키에에엑!

단말마 같은 비명과 함께 몬스터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훌륭한 기습이었다.

갑작스러운 만큼이나 반가운 행운에 지안은 사색이 된 안색을 가라앉히며 몬스터를 해치운 여성을 클로즈업했다. 대체 누굴까? 한 방에 깔끔하게 몬스터를 죽여 버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게다가 어딘가 인상이 낯익었다.

지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이븐이란 걸 알아보았다. 때맞춰 이븐 역시 허공을 날아다니는 드론을 목격한 참이었다.

―저건 도대체 무슨 몬스터지?

얼굴을 구기며 드론을 향해 길쭉한 창을 집어던지려는 이븐의 모습에 지안은 얼른 드론을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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