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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163/199)

164화

일리아스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를 트럭으로 쳤고, 그 몬스터가 내지른 비명으로 동족이 몰려들고 있단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눈 쌓인 땅이 가볍게 진동했다. 지안의 동공 역시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일리아스는 몬스터가 얼마나 몰려오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지안을 다정히 일깨웠다.

“걱정 말고 이비엔이나 찾아봐. 그 애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 거잖아.”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한 일리아스는 지안의 콧방울을 툭 건드리며 웃어 보였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파도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두껍게 쌓인 눈이 순식간에 수증기로 화해 버리는 광경에 지안은 잠시 압도당한 채 말문을 잃었다.

놀라지 않기엔 너무도 거대한 화염이었다. 훅 끼쳐오는 열기로도 그 위력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타오르는 화염이 파도처럼 몰아닥치는 걸 보면 누구나 자신처럼 놀랄 것이다. 그뿐인가. 뜨거운 아지랑이가 허공에 물결을 수놓았다.

다만, 오래 경악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지안은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대로 이비엔을, 황녀 전하를 찾아야 했다. 겁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너머에서 떼 지어 코카트리스 무리가 몰려들고 있었지만, 더는 무섭지 않았다. 일리아스의 화염이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불길 한가운데에 있었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화염 너머로 기세를 올리며 몰려든 몬스터들이 주춤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다소 마음을 놓은 지안은 축축한 얼음과 흙 위로 두 손을 짚었다. 감각을 한껏 확장하며 이비엔의 파장을 찾았다. 꿈에서 본 대로라면 분명, 얼음 아래 어딘가. 크레바스 사이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파장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지안은 서둘러 악시온에게 말했다.

“시온! 서쪽으로 가면 돼요! 나 좀 도와줘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곧바로 지안을 들쳐 안고 지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희미한 파장이 조금씩 강하게 피부에 감겨들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지안은 크레바스 아래 절벽에 쓰러져 있는 이비엔을 찾아냈다.

* * *

위이이이잉―!

뭔가, 날벌레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와 이비엔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폭주를 거듭한 충격으로 안구의 신경이 손상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로 앞의 사물 정도는 흐릿하게 보였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충격받아 마땅할 일이었지만, 이비엔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가는 마당에 시력 좀 잃은 게 무슨 상관인가. 이미 추위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모든 감각이 마비되거나 사라진 와중에도. 폭주의 고통만은 끈질기게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얼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아팠다. 이토록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운데도 여전히 죽음은 저 멀리 있다.

이 질긴 숨은 대체 언제 끊어지는 걸까.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감각이 너무도 외롭고 무서웠다. 하나 능력자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은 쉬이 죽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이비엔은 자조했다.

‘하필 능력자로 태어나서 단숨에 죽지도 못하다니……. 산 채로 육신의 붕괴를 온전히 느껴야만 한다니……. 사람들 맞이 맞았어. 이 힘은 저주야. 신의 저주이자 운명의 악의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괴로울 리 없다. 폭주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경험한 폭주는 상상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발현과 함께 맛보았던 폭주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산 채로 몸이 짓이겨지는 듯 아프다. 손을 휘저어 벌레 하나 내쫓지 못하는 신세가 비참했다.

끈질기게 근처를 맴도는 벌레의 날갯소리 역시 짜증 났다.

위이잉! 위이이잉―!

하지만 생각해 보면… 벌레가 날아다니는 이 소리조차 환청일지도 모른다.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자라기 힘든 북부에 날벌레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 않나.

실소하던 그 순간, 이비엔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익숙한 기운이 강하게 몸을 뒤덮은 것이다. 감각이 교란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또 맨정신으로 꿈을 꾸는 건지. 지안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하지만 착각이라도 좋았다.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을 정도로 감미롭다! 본능적으로 가이딩을 갈구하며, 이비엔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전하!”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지안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가파른 얼음의 틈새 사이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이비엔은 몸을 떨며 생각했다. 이젠 정말 죽을 때가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지안이 덥석 자신을 들어 안는 게 느껴졌다. 머리와 뺨 위의 눈 얼음을 털어 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접촉과 함께 기적처럼 기력과 생기가 솟았지만, 그마저도 환상의 일부임이 틀림없었다. 간절함에서 비롯된 소망이 상상 속에서나마 지안을 생생히 재현해 낸 거다.

하지만 죽는 마당에 뭐 어떤가. 진짜와 가짜의 구분 따위, 아무 의미 없었다. 이비엔은 마지막 힘을 다해 지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이 품이 그리웠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손을 잡아 달라고 요구했겠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전하! 황녀 전하! 정신 차려요!”

얼어붙은 뺨을 더듬는 손길이 데일 듯 따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더 선명해지는 감각이 벼락같은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부유감, 촉감, 그리고 청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모든 감각이 지안의 실존을 알려 왔다. 뒤이어 입 안으로 무언가가 조금씩 흘러들었다.

삼키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입술을 적신 그것은 혀에 닿자마자 그대로 혈관에 스며들었다. 생명 그 자체를 들이켜기라도 한 듯 기적처럼 몸을 순환하기 시작하는 활력에, 이비엔은 멍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동시에 범람하듯 밀려든 지안의 기운이 폭주하던 이능을 말끔히 잡아 눌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안락했다. 몸을 부수어 놓던 이능이 마법처럼 잠들고 있었다. 처음 발현을 했던 날, 지안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진정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언제 기승을 부렸냐는 듯 사라져 버린 통증을 느끼며 이비엔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지, 지안?”

“네. 저예요, 전하.”

선명한 목소리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지안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지안이 돌아왔다.

* * *

엘릭서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언제 다 죽어갔냐는 듯 천천히 거동하기 시작한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환에게 보복할 겸 사기를 쳐서 엘릭서를 강탈하지 않았다면 황녀 전하가 지금처럼 순식간에 건강해지진 못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려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얼른 손을 뻗어 황녀를 부축했다.

“이제 괜찮겠지만 한동안은 요양하셔야겠어요. 여기. 비상 알약이랑 영양제랑 에스퍼 전용 치료제예요. 한 번에 같이 삼키세요. 삼키기 힘들면 혀 아래 두고 녹여서 드세요. 쓰다고 뱉으면 절대 안 돼요.”

포장을 뜯은 알약을 이비엔의 입에 물려준 지안은 곧바로 자신과 이비엔의 허리에 밧줄을 고정시켰다.

“이제 끌어올려요!”

위를 향해 소리치자, 크레바스 위에서 노심초사하며 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스는 반색하며 지안과 이비엔을 끌어올렸다. 악시온은 아래서 밧줄에 딸려 올라가는 지안과 이비엔의 발을 받쳐 주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아득한 절벽과 지안을 번갈아 본 이비엔이 물었다.

“……왜 돌아왔어?”

“보시다시피, 전하를 구하러 왔어요.”

“…왜?”

“구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

“전하는 진짜 혼나야 해요. 목숨 바쳐 게이트 열어 주면 제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화를 억누르는 지안의 목소리에 이비엔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네가 싫어할 걸 알았어. 그치만… 나는….”

쇠를 긁듯 간신히 내는 목소리에 절로 마음이 약해져 지안은 이비엔을 노려보는 걸 그만두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안 된 이에게 화낼 순 없다. 창백하고 초췌한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 다시는 그런 짓 마세요. 또 그러면, 그땐 정말 얼굴도 안 볼 거니까.”

짐짓 으름장을 놓았지만, 성난 목소리가 무색할 만큼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공에 매달려서 그런 것도, 떨어질까 봐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그보단 황녀 전하가 멀쩡히 눈을 뜨고 움직이고 말을 하는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불완전한 각인으로 천천히 진행된 폭주를 버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나 무사히 살아나 주다니.

그동안 전하가 정신을 놓아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얼음에 달라붙다시피 한 황녀 전하를 떼어내는 내내 얼마나 가슴이 졸아들었나. 정말이지 이미 얼어 버린 사체를 얼음에서 떼 내는 줄 알았다. 전하가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생각하니 오싹해져, 지안은 힘껏 이비엔을 껴안으며 움츠러든 황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이렇게 버텨 줘서 고마워요. 저 정말, 전하가 죽은 줄 알고…… 진짜 무서웠다구요.”

이비엔은 아무 말 못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지안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아니, 강제로 기대야 했다. 지안이 머리를 눌러 제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괜찮아요.”

등을 토닥이고 쓸어내리며 지안이 작게 속삭였다. 그 말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래전, 이능을 발현시킨 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던 그 날에도 지안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고, 이젠 괜찮다고.

이비엔은 후들거리는 두 팔을 들어 지안을 마주 껴안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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