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2/199)

163화

일리아스의 말에 응대를 해 주던 직원이 대신 대답했다.

“하하. 가이드분들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보단 주로 후방에서 보호받으셔서요. 딱히 전용 슈트가 나와 있진 않습니다.”

성에 차지 않는 대답에 일리아스는 곧장 여성용 에스퍼 슈트를 집어 들었다.

“아쉬운 대로 네 것도 하나 사는 게 좋겠다. 이건 어떤가? 방검, 방탄에다 물리력까지 흡수하고 위급 시 배리어 기능도 있다고 하니 유사시 도움이 될 거야. 입혀 놓으면 안심도 될 것 같고.”

뭐, 확실히 슈트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돈이 없다. 지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저 이제 돈 없어요. 두 분 슈트도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금액이 딱 맞는다구요.”

“그럼 조금 더 저렴한 슈트로 사양을 낮추지. 그렇게 하면 네 것도 살 수 있을 거다.”

“절대 안 돼요. 저는 휴대용 배리어 쉘터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제가 왜 슈트가 필요해요? 위험해지면 두 분이 알아서 지켜 줄 텐데.”

“그건 그렇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악시온이 나섰다.

“돈이라면 있다.”

“네? 돈이 있다구요? 어디서요?”

“각성자 협회에서 계좌를 만들어 주더군. 전하. 아니, 일리아스가 도로 주행 연습을 받을 때 새로 부임한 협회장에게서 받아 냈다.”

뜻밖의 사실에 지안은 놀란 얼굴로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조건이 달리지 않은 돈이니 안심해라. 예전 협회장이 네게 무례했던 것을 보상하고 싶다며 준, 일종의 사과금이었다. 이 돈이면 에스퍼 슈트를 하나 더 살 수 있다.”

그 말에 지안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세상에! 악시온! 진짜 진짜 잘했어요! 에스퍼 슈트 하나 더 사서 황녀 전하한테 드리면 되겠다! 저랑 체구가 비슷하시니 사이즈도 딱 맞을 거예요!”

“나는 황녀 전하의 것이 아니라 네 것을…….”

“당장 하나 더 살게요! 정말 고마워요 시온!”

잔뜩 흥분한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 * *

지안은 깜깜해진 하늘을 보고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부터 오전까지는 외장하드에 자료를 정리해 넣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후에는 션과 이환을 상대로 진땀 나는 사기 계약을 맺었다.

집도 팔았고 슈트도 샀다. 이 모든 일을 하루 만에 전부 처리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 밤 아홉 시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서두른 보람이 있다.

마침 월드타워 스카이 전망대가 운영할 시간이라, 지안은 곧장 전망대로 향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테니 마지막으로 도시의 전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이런 지안의 의견을,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잠자코 따라 주었다. 고향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 세 사람은 은은한 조명이 밝혀진 월드타워의 전망대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지안이 물었다.

“어때요?”

“아름답군.”

“동감이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긴 해도 두 사람 다 얼굴에 경탄이 서려 있었다. 지안은 흐뭇한 얼굴로 야경에 홀린 일리아스와 악시온에게 말했다.

“두 분 다 오늘 정말 잘하셨어요.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막무가내로 저질러 본 짓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성과가 좋네요. 저 사기꾼 기질이 있나 봐요. 그리고……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요. 기껏 차원을 넘어놓고 다시 돌아가려 하다니, 변덕쟁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네요.”

머쓱해하며 사과하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와서 가이드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비일비재하다는 걸 알았다. 뉴스도 찾아봤고…… 그대가 제국을 떠나고 싶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걸 찾아보셨어요?”

악시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에 대한 뉴스는 대부분이 범죄와 관련된 것이었다. 가이드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밖에 없을 만큼 피해가 심각했다.

기사의 내용을 일부 떠올린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가이드가 얼마나 범죄에 취약한지, 얼마나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지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이딩을 착취당하다 간신히 구출된 가이드의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손끝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만일 그런 일이 지안에게 벌어진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한때 공작성에서 지안이 밥을 먹지 않고 버텼던 걸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기사에 나왔던 범죄자들과 자신이 대체 뭐가 다른 건가 싶었다.

지안이 천천히 마음을 열어 주긴 했지만, 악시온은 자신이 이 행운을 안심하고 누릴 자격이 있는지 조금도 확신하지 못했다. 지키겠노라 맹세한 것이 무색하게도, 단 한 번도 지안을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뼈아프게 반성해 본들, 지안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 분투할 때 그녀의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단 사실이 바뀌진 않았다. 지안이 돌연 애정과 동정심을 거두어가도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지구라면 모를까, 위스로데 대륙에 가이드라곤 지안 하나뿐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겪은 사건 사고가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지안의 세계는, 충격적일 만큼 풍요로운 문명이 구축된 세상이었다. 이곳에 비하면 위스로데 대륙은 무척이나 낙후된,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을 만큼 뒤떨어진 차원에 불과했다.

놀라운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눈부신 문화와.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지안에게 대륙은 마치 원시의 생태계와 같아 보였을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왜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는지. 악시온은 주저하며 물었다.

“지안. 정말 이대로 떠나도 괜찮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텐데도?”

“괜찮아요.”

흔들림 없는 대답에 초조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는 양가적인 감정에 악시온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몬스터가 날뛰고 있을 대륙으로 굳이 돌아가야겠나? 제국의 능력자들이 모두 그대를 노릴 거다.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납치나 가이딩 착취 같은 거요? 이젠 안 무서워요. 아시잖아요. 제가 무장을 얼마나 단단히 했는데요.”

지안은 자랑하듯 허리에 찬 권총을 툭툭 건드려 보였다. 하지만 악시온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동영상으로 지안이 든 권총의 위력을 확인했음에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놓지 못하는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제 집도 팔았고 재산도 다 처분했어요. 거하게 사기도 쳤고요. 저 이제 지구에 남은 기반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에스퍼 특수복까지 이미 입었다고요. 이거, 입고 나면 환불 불가예요.”

장난치듯 가볍게 말하지만, 악시온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결연한 눈동자와 대비되는 겁에 질린 얼굴을.

그대로 잠시 머뭇거린 지안은,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러니까 공작님하고 전하가 저 책임져 주셔야 해요.”

“책임지겠다. 책임지고 싶다.”

“걱정 마. 책임져 줄 테니.”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그제야 긴장을 지워 낸 채 웃어 보였다.

* * *

거의 자정 무렵에서야 미군기지에서 트럭을 픽업할 수 있었다. 적재된 물건이 워낙 대량이기도 하고 고가의 물건도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트럭은 미군에 의해 안전하게 파주까지 이송되었다. 지안은 험비 몇 대가 호위하는 트럭을 감시하다 말고, 그새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게 된 일리아스를 신기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점점 도시가 멀어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적당한 공터에 트럭이 멈췄다. 차 키를 넘겨받고, 트럭의 호위를 위해 붙었던 미군도 모두 물러가자, 지안은 지체 없이 성배와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로 차가운 밤공기와 안개가 흘렀다.

잔 안으로 물을 채워 넣으며 지안은 한껏 기운을 방출했다. 두 눈으론 가장 빛나는 별을 찾으며 하늘을 향해 성배를 치켜들었다.

대체 어떤 별을 수면 위에 담아야 하는 걸까. 출렁이는 수면 위로 지안은 거듭해서 자신이 아는 모든 별자리를 담았다. 오리온. 폴라리스. 카시오페아. 시리우스. 프로시온. 그리고 베텔게우스까지.

그렇게 얼마나 별을 찾아 헤맸을까. 어느 순간, 사방으로 흩어지기만 하던 기운이 뭉텅이로 쑥 빠져나갔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빛이 일렁였다. 게이트였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지안은 곧바로 소리쳤다.

“시동! 시동 걸어요! 엑셀 밟아!”

진작 트럭의 운전석에 탑승해 있던 일리아스는 그대로 엑셀을 밟고 막 나타나기 시작한 게이트로 돌진했다.

공략에 시간이 걸리는 게이트에 진입할 시, 각성자들은 보통 차량을 이용한다. 게이트가 엄청나게 넓을 때, 혹은 공략에 수개월이 걸릴 때 차량을 이용하는 건 공략법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일반화된 방법이었다.

지안은 온 정신을 집중해 기운을 때려 넣었다.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게이트를 통과하려면 게이트가 지금보다 더 커야 했다.

“제발…. 커져라…!”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 트럭이 그대로 게이트를 넘자, 지안은 감격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공이다! 성공했다!

이제 자신이 차원문을 넘을 차례였다.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지안의 옆에서 준비를 하고 있던 악시온의 손이 지안의 허리에 휘감겼다. 성배 속의 물이 출렁거리며 게이트가 불안정해졌지만, 괜찮았다. 이미 게이트를 통과한 뒤였으니까.

약간 서늘하던 가을밤의 공기가 그새 달라져 있었다. 지안은 자신을 꼭 껴안고 눈밭 위를 뒹군 악시온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하늘하늘 떨어진 눈송이가 콧잔등 위를 툭 건드리며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북부의 공기를 힘껏 들이켠 지안은, 머리 위에 떠오른 북부의 오로라를 두 눈에 담았다.

돌아왔다. 대륙으로.

그 사실을 상기하자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훑었다. 그런 지안을 일깨운 건 부리나케 달려온 일리아스였다.

“지안! 괜찮나?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

덥석 지안의 어깨를 잡은 일리아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채기가 나진 않았는지 샅샅이 살폈다. 일리아스는 지안이 머리카락 한 올 상한 곳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안 다쳤구나.”

가슴을 쓸어내린 일리아스와 달리, 지안은 창백한 얼굴로 그의 등 뒤를 가리켜 보였다.

“저기, 저, 저거! 몬스터!”

“응? 아아. 몬스터라면 트럭에 정면으로 치여서 꼼짝도 못 할 거다. 이미 죽었을 테니 안심해.”

그 말에 지안은 답답해하며 외쳤다.

“한 마리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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