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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161/199)

162화

우여곡절 끝에 회의실 소파에 착석을 마친 지안은, 자신의 앞으로 따뜻한 녹차가 내밀어지기 무섭게 말했다.

“피차 시간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요. 근데 그 전에, 아까 그 에스퍼, 길드에서 퇴출시켜요.”

“안 돼. 내 가이드의 동생이야.”

“그럼 어떻게 징계할 계획인지 말해 봐요.”

“용건부터 듣지.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뭐야.”

“보면 몰라요? 스카웃 제의, 아직도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정말인가?”

“그럼 내가 당신 얼굴을 보러 왔겠어요? 거절할 거면 지금 하고, 수락할 거면 계약서 가져와요.”

지안의 말에 이환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얼른 계약서를 챙겨 왔다. 계약서를 받아본 지안은 계약서에 자신의 등급이 SS급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작게 실소했다.

“협회에서 내 정보를 전해 들었나 봐요? 역시 창성은 창성이야. 내 등급이 제대로 기재되어 있다니 대단하네. 아직 미국도 모르는 눈치던데.”

“오해하지 마. 협회에서 정보를 건네받은 건 아냐.”

“그럼?”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서 알려 주더군.”

“아하.”

“정부가 바라는 건 둘 중 하나야. 네가 각성자 협회에 그대로 남거나. 아니면 창성에 가입하거나. 그래도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창성을 택하기로 한 모양이군.”

“안심하지 마요. 저 아직 사인 안 했으니까. 게다가 이 계약서, 미국이 제시한 금액에 비하면 페이가 너무 터무니없네. S급 에스퍼가 둘이나 되고 심지어 나는 SS급 가이드인데……. 창성이 요즘 자금난인가?”

대놓고 트집을 잡는 지안의 태도에도 이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로선 그게 최선이야. 그리고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해. 간 보듯이 후려치지 말고. 그런 태도, 너랑 안 어울려.”

“아하하. 티 났어요? 굳이 지적하는 걸 보니 내가 시건방져 보이긴 했나 보네. 실례했어요. 기껏 오자마자 폐급 가이드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서. 내가 이 계약을 정말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거든요. 와중에 길드 퇴출도 안 된다. 징계도 미정이다……. 영 만족스럽지가 않네요. 기분 잡친 것도 여전하고요.”

“그래서 바라는 게 뭐야.”

“3년 전이었나? 창녕의 게이트 공략을 성공하면서 얻은 약초로 엘릭서를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하나 줘요. 그게 내 계약 조건이에요.”

지안의 말에 이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건 딱 세 개밖에 없어.”

“내가 전부 다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못 주겠으면 계약은 없던 일로 해요.”

“차라리 다른 걸 말해.”

“……그냥 뉴욕 수복이나 하러 가야겠네요. 대답 잘 들었어요.”

계약서를 내려놓은 지안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악시온과 일리아스가 호위하듯 뒤따랐다.

그대로 막 회의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이환이 지안을 붙잡았다.

“주지. 엘릭서. 대신 장기 계약으로 해.”

“장기 계약?”

“더 있어. 매년 최소 3회 이상 게이트 공략에 참여해 줘야 해.”

지안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에스퍼들이 그토록 꺼린다는 장기 계약에다 매년 게이트 공략에 세 번씩이나 의무 동원되어야 한다니. 이 계약대로라면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고등급 에스퍼인 만큼 위험한 게이트에 주로 배치될 것이다. 이중 계약 사기를 치는 입장인데도 적잖이 화가 났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은 엘릭서를 얻는 것이지, 좋은 계약 조건을 따내는 게 아니었다.

“……이제 보니 창성이 악덕 길드였네.”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엘릭서도 없어.”

지안은 한참 동안 이환을 노려보다 말고, 볼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했다.

“자. 됐죠? 이제 내놔요. 엘릭서.”

* * *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걸까. 지안은 궁금증을 삼키며 혀를 찼다. 이환의 길드장실에 있는 비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지도 벌써 10분째건만, 엘리베이터는 멈출 생각도 없이 자꾸만 하강했다.

‘설마 창성의 금고가 길드의 지하에 있을 줄이야.’

심지어 그 엘리베이터가 고속 엘리베이터란 걸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깊이의 지하에 금고가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보안상의 이유로 이환과 동행할 수 있는 건 지안뿐이었다. 길드의 비밀 금고에 에스퍼를 들일 순 없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거대한 대형 강철로 이루어진 문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엄한 경비에 지안은 혀를 내둘렀다. 엘리베이터 자체도 지문으로 움직이는 거였는데, 금고문은 그보다 더했다. 열 손가락 지문에다 홍채 인식, 게다가 3중 비밀번호까지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어떤 도둑도 창성의 금고만은 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절차 끝에 금고 문이 열리자, 이환이 고갯짓했다.

“들어와.”

이환을 따라 서늘한 공기를 내뿜는 대형 금고 안으로 따라 들어간 지안은 말로만 들어보았던 명화, 최신식 에스퍼 슈트, 강화 유리 케이지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희귀한 포션과 아티팩트를 보고 입을 벌렸다.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금괴는 딱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성이 재계서열 10위 안에 든다더니…… 정말 장난 아니구나.

심지어 자신이 요구한 엘릭서는 이 거대한 금고 안에서도 또 한 번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개인금고에 들어 있었다. 지안은 긴장한 얼굴로 이환이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열어보자 벨벳 쿠션으로 감싼 특수 보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인을 마친 지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엘릭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거 맞죠?”

“그 정도까진 아냐. 소문이 과장돼서 퍼진 거다. 대신, 죽은 지 한 시간 이내라면 살릴 수 있지. 다섯 개 엘릭서 중 두 개로 시험해 봤는데, 뇌사한 게 분명한 사람이 되살아나더군.”

“대단하네요. 그 두 개는 어디다 썼어요?”

“하나는 채원이 어머니한테 썼고, 다른 하나는 신세 진 에스퍼에게 선물했다.”

지안은 이환의 대답을 흘려들으며 엘릭서를 챙겼다. 션과의 계약에 이어 이환을 상대로 엘릭서까지 빼앗았다.

각성자 계약은 워낙 극비리로 진행되는 일이니, 이중 사기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고작 하루 만에 알아차리긴 힘들 것이다. 보통 확정된 계약을 공표하는 건 당일 바로 하기보단 적당한 오픈 시기를 논의한 뒤에 알리기 마련이니까.

이제 창성에서 빠져나간 뒤, 션에게 전화해 물품 적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차원 이동을 위한 최소조건을 하루 만에 모두 달성해 냈단 고양감과 긴장에 지안은 감정을 추스르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지안에게 이환이 물었다.

“왜 엘릭서를 요구한 거지?”

“여벌 목숨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게이트에 파견 나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위급상황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지안의 말에 이환의 눈썹이 휘었다. 단지 그것뿐이라기엔, 엘릭서를 받아든 지안이 기쁨과 격정을 참아내는 게 죄다 보였다. 절대 자신을 위해 엘릭서를 요구한 것 같지 않았다.

뭘까, 대체. 이라영처럼 구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긴 건가?

무심코 생각한 이환은 그쯤에서 궁금증을 접었다. 여지안이 무엇을 위해 엘릭서를 요구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S급 각성자들이 국외로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는 대통령의 부탁을 성공적으로 이행했단 사실이다.

* * *

잔뜩 상기된 얼굴로 상자 하나를 품에 꼭 안고 나타난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가 물었다.

“그게 엘릭서인지 뭔지 하는 거냐?”

“네. 게이트에서 나온 희귀 약초로 만든 건데. 뇌사자도 살릴 수 있는 엄청 귀한 약이에요. 수량도 딱 세 개뿐이고. 이건 그중 하나예요.”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듯 말한 지안은 이환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곧장 창성 길드에서 빠져나왔다.

서둘러 빌딩의 회전문을 통과하자 그제야 긴장이 스르륵 풀어졌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작정하고 이런 사기를 치다니…. 내가 이렇게나 간이 큰 인간이었다니! 거기에 더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느라 너무 힘들었다. 그새 식은땀을 흘렸는지 등도 축축했다.

‘……정말 다시는 이런 사기극 못 벌이겠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아침에 급매로 집을 내놓기 위해 들렀던 부동산 업자였다. 전화를 받자 공인중개사가 기쁜 목소리로 알려 왔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대신 부동산 실장 박춘석입니다. 오늘 급매로 내놓으신 집, 매매하겠단 분이 나타나셔서요. 중도금에 잔금까지 오늘 내에 다 입금해 줄 수 있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계약하시겠어요?

세상에. 오늘 내 중도금만 받아도 감지덕지인 판국이었는데, 잔금까지 전부 단번에 치러 주겠다니! 대한민국에 현금 부자가 많구나!

“네! 지금 갈게요!”

서둘러 외친 지안은 기쁜 얼굴로 택시를 잡았다.

* * *

곧장 달려가 부동산 매매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지안은 계좌에 들어온 숫자를 확인하곤 활짝 웃었다. 억이 넘는 금액이라 오늘 밤 안에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수중에 돈이 있으면 누구든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차원을 넘으면 어차피 쓸모없어질 현금 아닌가. 기왕이면 싹싹 다 긁어 쓰고 싶었다.

궁리 끝에 지안은 집을 판 돈을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에스퍼 슈트를 사는 데 몽땅 써 버렸다. 창성의 비밀 금고에서 본 에스퍼 슈트만큼 대단한 걸 구입할 순 없겠지만, 적당한 최신식 에스퍼 슈트를 구입하기엔 모자람 없는 액수였다.

게다가 에스퍼 슈트만큼 현 상황에 적절한 아이템이 없었다. 극도의 고온과 저온에서도 쉽게 손상되지 않으며,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한 물리력을 일정 부분 대신 흡수해 주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탓에 가격이 미친 듯이 비쌌지만, 집값에 버금가는 가격을 자랑하는 만큼 성능만은 확실했다.

지안의 열띤 설명에 일리아스는 슈트 장갑을 낀 채로 불을 일으켜 보았다.

“정말로…… 천이 타지 않는군.”

매번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옷을 태워 먹어야 했던 일리아스는 슈트가 불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다. 지안이 웃으며 말했다.

“에스퍼 전용 특수복이니까요. 불연성 재질로 만들어져서 절대 안 타요. 그래도 내구성에 한계가 있고. 고온의 불에는 녹아내릴지도 모르니 적당히 힘 조절하면서 사용하세요.”

“알겠다. 근데 에스퍼 것 말고 가이드 슈트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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