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0/199)

161화

그 말에 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내 가이드에게 모든 걸 맡긴 채 방관하던 에스퍼가 갑자기 왜 이런 참견을 하지? 그새 창성에서 로비를 했나? 아니면 정부 권고?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애국심 때문입니까?”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한국은 지안의 나라지, 내 나라가 아냐.”

“그럼 대체 왜?”

션의 말에 대답한 건 한껏 거만한 얼굴을 한 일리아스였다.

“이 계약서는 처음부터 잘못됐다.”

“잘못됐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다렸던 질문이 나오자, 일리아스는 곧장 계약서에 쓰여 있는 지안의 이름과 그 옆의 등급을 가리켜 보였다.

“계약을 하러 온 주제에 계약자 등급도 제대로 모르나? 한심하군.”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툭툭 두들겨 보이는 일리아스의 태도에 션은 곧장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계약서 어디에도 잘못된 곳이 없었다. 계약자 이름의 철자나 등급도 자신이 아는 그대로였다.

“계약서상의 문제는 없습니다만…. 게다가 가이드 등급을 제대로 모른다니요. 여기 S급 가이드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당황한 션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삐뚜름히 웃어 보였다.

“이제 보니 미국의 정보력이 형편없군. 아니지. 이런 경우엔 한국이 기밀 유지를 잘한 거라고 해야 하나?”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션은 애써 침착히 되물었다.

“…뭔가, 제가 놓친 부분이 있습니까?”

“지안은 S급 가이드가 아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안은 SS급 가이드다.”

이어진 악시온의 말에 션 오프리는 두 눈을 부릅떴다. SS급 가이드라니. 더블 S등급은 세계적으로 이제껏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사실입니까?”

“왜? 여태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더블 등급이라 의심스럽나? 정 의심되면 등급 측정을 다시 해 보든가.”

비웃음 가득한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사기극에 동참하는 걸 껄끄럽게 여길 땐 언제고, 막상 션을 앞두자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거만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계약사항을 수정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요!”

션의 말에 지안은 그제야 미적미적 발을 빼려던 자세를 바꿨다.

“좋아요. 하지만 그러려면 검증이 필요하겠죠? 게다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도 필요할 테니… 등급 측정을 위해 자리를 좀 옮길까요? 미 대사관이나…… 아니면 주한미군기지로요.”

적극적으로 등급을 증명하려는 지안의 태도에 션이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좋습니다. 주한미군기지로 가지요.”

션의 말에 지안은 빙긋 미소 지었다. 일부러 대사관보다 주한미군기지가 더 가까운 곳을 약속장소로 잡은 보람이 있다.

곧장 미군기지로 이동한 지안은 삼엄한 보안 시설을 몇 번이나 통과한 뒤에야 기지 내 등급 측정을 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각성자 협회에서 나온 것과 동일했다.

“SS급이라니. 맙소사!”

“홀리 쉣.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그런데 저 가이드, 매칭률이 항상 제로 퍼센트로 나온다던 그 가이드 아냐?”

“헤이, 말조심해. 뉴스 못 봤어? 저 가이드, S급 에스퍼가 둘이나 있다고. 벌써 각인까지 마친 상태야.”

경악하는 군인들의 모습에 머쓱해한 것도 잠시. 지안은 이내 열의에 타오르는 션과 마주해야 했다.

“아무래도 계약 조건을 좀 변경해야겠군요.”

곧장 회의실로 지안을 안내한 션은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백지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우선, 한국이 보안을 유지하던 등급을 자진 공개하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맞아요. 계약 조건을 좀 바꾸고 싶어요.”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계약 선지급금인 8천억을, 현금이 아닌 게이트 공략 무기로 받고 싶어요. 특히 요구하고 싶은 건 개량 폭탄, 소형 미사일, 비상 배리어 쉘터예요. 이외에도 여기, 목록을 만들어 왔어요.”

지안이 내민 종이를 받아든 션은 서둘러 검토를 마쳤다.

“가능은 합니다만, 모두 마련하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군요.”

“아뇨. 시일이 걸려선 안 돼요. 가능하면 오늘 저녁. 늦더라도 내일쯤엔 받아볼 수 있길 원해요. 난 바로 그것 때문에 내 등급을 공개한 거예요.”

“네?”

“목록에 있는 게이트 용품 전부를 완벽하게 마련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몇몇 품목은 누락이 될 수도 있을 테고, 금액적인 부분에서 손실이 생길 수도 있겠죠. 모두 감수하겠어요. 꼭 8천억만큼의 물품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다만, 난 지금 당장 그것들이 필요해요.”

“어째서입니까? 무엇보다 지금 이 목록에 있는 물건들. 게이트용 무기 외 대민지원 용품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마치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진 지역 수복에 참여하는 것 같군요.”

이런 질문이 나올 때를 대비한 답변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서울 게이트 참사 기억하시죠? 서울은 탈환했지만 파주는 아직이에요. 장벽을 세워서 몬스터를 가둬두긴 했지만, 전부 처리하진 못했죠. 여론을 위해 미국과 계약하기 전에 파주를 수복해 보려 해요. 최대한 빠르게.”

“그렇군요. 하지만 이건 너무 급박한…….”

지안은 더 듣지 않고 션의 말을 끊었다.

“션.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다 알려드렸어요. 이 이상은 저도 사정상 말할 수 없어요. 극비거든요. 그나마 최소한도로 말해 줄 수 있는 건…… 미국과 계약하기 위해 정부와 협상이 필요했다는 것 정도예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침음성을 흘리는 션의 모습에 지안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하는 건 설득이 아닌 선택이에요. 선택해요. 당장 이 미군기지의 모든 무기를 털어서라도 나와 계약할 건지. 아니면 세 명의 각성자를 통째로 창성에 빼앗길 건지.”

“……좋습니다. 하죠. 계약.”

션의 말에 지안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악수하며 손을 맞잡은 션이 말했다.

“미국과 계약한 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목록에 있는 게이트 용품의 절반 정도는 오늘 드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오전 중으로 양도 준비를 마치도록 하죠. 수량이 상당한데, 보관할 곳이 따로 있습니까?”

당연히 생각해둔 게 있다. 이 순간을 위해 게이트용 컨테이너 세 개와 트럭을 빌렸다. 마련해둔 컨테이너 안에 무기와 의약품을 꽉꽉 채워서 그대로 게이트를 향해 돌진할 생각이었다.

이미 트럭과 컨테이너를 마련해 두었다는 지안의 말에 션은 곧장 대답했다.

“트럭이 주차된 곳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미 컨테이너까지 고정되어 있다고 하셨으니 통째로 가져와서 바로 적재를 시작하면 될 것 같군요. 아. 차 키는….”

지안은 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서 차 키를 흔들어 보였다.

“여기 있어요. 기왕이면 개량령 소형 제품들 위주로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적재 효율이 좋도록.”

“맡겨 주십시오.”

그대로 차 키를 션에게 건넨 지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사기는 아무나 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 * *

션 오프리와의 계약을 끝낸 지안의 다음 목적지는 이환의 길드, 창성이었다. 월드타워만큼이나 거대한 빌딩 안으로 들어선 지안은 곧장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창성 길드장을 만나러 왔는데요.”

“길드장님을요? 약속은 하고 오셨나요?”

직원의 말에 지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했어요.”

지안의 말에 카운터 직원이 난색을 표했다.

“약속 없이 길드장님을 만나긴 어려우세요.”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 할 텐데. 창성에 드디어 망조가 들었나?”

“네?”

“그렇잖아요? S급 에스퍼가 제 발로 둘이나 왔는데. 길드장이 시간을 안 낸다? 미친 거지 그건. 보아하니 비서실에 전화 한 통 넣는 것도 귀찮은 모양인데. 됐어요. 보던 핸드폰이나 마저 봐요.”

“자, 잠깐만요!”

곧장 비서실에 연락을 넣은 직원은 곧바로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지안을 안내했다. 안내 데스크에서 컷 당하면 경비가 막든 말든 밀고 올라갈 작정이었는데, 순조롭게 이환과 대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내 상층부의 복도를 걷게 된 지안은, 길드 마크가 새겨진 사원증을 목에 건 유명 에스퍼들을 보고 슬쩍 감탄했다. 창성 아니랄까 봐 한가락 하는 에스퍼들, 방송으로 얼굴이 눈에 익은 에스퍼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중에 지안을 알아본 에스퍼 하나가 말했다.

“폐급 가이드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래? 야. 이거 누가 올려보낸 거야?”

얼굴을 보니 한동안 방송으로 유명세를 탄 B급 에스퍼였다. 그 시비에 뭐라고 되쏘아 주려던 것도 잠시. 일리아스의 손이 먼저 뻗어나가 에스퍼의 머리를 덥석 움켜잡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그대로 머리통을 불태울 것 같아 지안은 기함하며 이를 저지했다.

“그만! 일리아스! 말실수 좀 했다고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인 건 이 녀석이다.”

“놔 줘요.”

“하지만…….”

“우리 시간 없어요. 저딴 쓰레기 상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시간 낭비예요. 가요.”

그렇게 상황을 일단락 지으려 했으나,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일리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에스퍼의 생각은 달랐다. 동료가 보는 앞에서 망신살이 뻗쳤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나? 더구나 쓰레기 운운한 지안의 말이 성질을 긁었다.

“야이 씨발. 거기 반푼이 가이드. 지금 쓰레기라 했어? 누가 누구더러 쓰레기야! 재활용도 안 되는 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 누나가 길드장 전속 가이드 한채원이야!”

“……정정할게요. 폭력 좀 써도 되겠어요. 기절을 시키든 두드려 패든 저거 입 좀 다물게 만들어 줘요. 이빨까지 털어 주면 더 바랄 게 없고.”

고삐를 풀어 주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가 막 나서려던 순간,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벽이 일리아스와 에스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무슨 소란이지?”

소란을 들은 건지 복도 끝에서 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길드장 전담 가이드의 동생이란 지위를 가진 분이 저더러 폐급 가이드라네요. 아,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먼저 시비 건 건 저 사람이에요.”

“하. 우선 장소를 좀 바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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