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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159/199)

160화

“그래서 이제는 두렵지 않아요. 두 분이 어떤 마음으로 저와 함께 차원을 넘겠다고 결심한 건지 모르지 않으니까. 그리고 전, 오직 황녀 전하를 위해 돌아가겠단 게 아니에요. 제국은 두 분의 고향이기도 하잖아요.”

“그렇지만…!”

“악시온은 북부를 수호하던 공작이고. 일리아스는 기사단을 꾸려 제도의 질서와 치안을 책임지던 황자였죠. 그간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 산지옥이 되어 가는 걸 그대로 두실 건가요? 그럴 수 있으세요?”

“…….”

“할 수만 있다면 신탁을 막으러 가고 싶으시잖아요.”

“가지 않아도 좋다. 대륙의 안위보단 그대가 더 중요하다.”

“피차 마찬가지다. 이미 떠나온 곳이야. 아무 미련 없어.”

약속한 듯 나란히 이어지는 반대에 지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맹목적으로 만들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 안 해.”

고집스런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손을 뻗어 일리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말을 좀 바꿔볼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세계를 지키러 가고 싶어요. 그래도 반대할 건가요?”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설득에 완전히 넘어갈 뻔한 것도 잠시, 일리아스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매일 괴로워했잖아. 시시때때로 위협받았잖아. 진절머리내면서 어렵게 떠나온 대륙이잖아.”

“지켜 주실 거잖아요. 제가 더는 불안하지 않도록. 늘 옆에 있어 주실 거잖아요.”

일리아스는 어째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랬다가 네가 후회하면? 그땐 어떡하란 말이야?”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악시온이 덥석 손을 잡아 왔다.

“전하의 말이 맞다. 지안. 정말로 돌아가야겠나? 다시 지구로 돌아오려면 폭주하는 능력자가 필요한데도? 그대 성정에 애꿎은 누군가를 희생시켜 게이트를 열진 못할 것 아닌가.”

악시온의 물음에 지안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대도 좋아요.”

“지안…….”

“제국에서 저는, 두 분을 경계하기 바빴죠. 혹시라도 강제로 붙잡힐까 봐, 영영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웠어요. 가이딩을 착취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어요. 곧 떠날 거야. 도망칠 거야. 그런 마음으로 대륙의 발현자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했어요. 뻔히 보이는 공작님의 마음을, 전하의 고백을 모른 척했어요.”

“…….”

“너무 무서워서, 한가롭게 사랑 고백 같은 걸 받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두려움에 눈이 먼 채로 어떻게든 시온을, 일리아스를 이용할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가,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야 겨우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어요. 내 마음인데, 정작 내가 나를 몰랐어요.”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잖나. 겁에 질리면 시야가 짧아지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간접적인 위로에 지안은 쓰게 웃었다. 그 말은, 어리석긴 했단 말이구나 내가. 말로 두들겨 맞으니 아프긴 아프네.

“……S급 가이드의 굴욕 영상. 시온도 본 적 있죠? 지구에서 저는 내내 반푼이 가이드였어요.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가이드. 그랬던 제가, 위스로데 대륙에선 유일한 가이드가 되어 성녀로까지 추앙받았어요.”

“성녀라 불리는 걸 싫어했던 것 아니었나?”

“지금도 싫어요. 성녀라니 소름 끼쳐요. 전 남들처럼 적당히 이기적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전면에 나서는 것도 딱 질색이에요. 하지만…… 대륙이 위험한데, 성녀 노릇을 할 사람이 저밖에 없잖아요.”

“…….”

“그리고 꿈에서 황녀 전하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립다고. 저도 황녀 전하가 그리워요. 그러니까 갈 거예요. 전하를 살리러.”

그렇게 말하는 지안을, 두 사람은 더는 만류할 수가 없었다. 지안의 말대로 황녀가 개화시킨 특성이 꿈을 통해 제 가이드를 찾는 것이라면…… 그녀의 장담대로 정말로 황녀가 살아 있다면, 아직 늦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차마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하는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지안이 말했다.

“그러니까 시온. 일리아스. 나 좀 도와줘요.”

“무엇을 말인가?”

“어떻게?”

“저, 부자가 돼 보려고요. 대륙의 몬스터들을 소탕하려면 성능 좋은 폭탄이 많이 필요한데…… 폭탄을 충분히 사려면 돈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뭘 하면 되겠나?”

“……대체 뭘 시키려고?”

지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사기를 좀 쳐야겠어요.”

* * *

다음 날. 지안은 급매로 집을 내놓았다. 주식을 정리하고, 예금도 해지했다. 가전은 모두 헐값에 중고로 팔아치웠다. 시간을 들여서 처분했다면 좀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황녀 전하가 살아 있다. 꿈속에서의 모습과 피 묻은 손수건을 보건대 분명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다. 늦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회의감과 불안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흔들리는 파도 아래서도 매번 태양은 떠오른다. 당장의 불안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살아만 있다면 이후의 삶은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이다.

게이트 사태로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피난민으로 전락하기도 해 봤고, 쓸모없는 가이드로 전국민적인 조롱과 비난도 받아 봤다.

그래도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매일이 버겁고 힘든 것 같지만, 텁텁한 건빵 속에서 우연히 별사탕을 찾아내듯,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아도 좋고,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러니 설령 황녀 전하를 구하지 못한다 해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수백의 능력자들을 홀로 살려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섣불리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중얼거리며 지안은 소중한 기억 하나를 떠올려 냈다. 언젠가 라영 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천문대에 놀러 간 날. 금성이 가장 지구와 가까워졌다던 어느 날에. 거대한 망원경을 앞에 둔 언니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데 뭔가 거창한 걸 필요로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돼.’

‘저한텐 그런 사람 없어요.’

‘왜 없어? 내가 있잖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놓고 코웃음 쳤다. 그러나 아낌없는 지지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차츰 그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연락도 없이 반찬을 사들고 오고, 엄마도 아니면서 멋대로 우리 집 냉장고 정리를 하고, 생수가 떨어진 걸 봤다면서 낑낑거리면서 생수를 사 오는 사람에게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나.

라영 언니는 인생이란 건빵 속에서 나타난 달콤한 별사탕이었다.

아마 나는 언니처럼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언니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여전히 성녀 노릇이 싫고, 수많은 능력자들의 가이드가 되는 게 영 꺼림직하지만…… 괜찮다.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해 보자. 나 혼자 가이드 노릇 한번 해 보는 거다.

언니처럼 모두의 별사탕이 되어 주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대륙의 능력자들을 더 이상 방임하진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안은, 휑해진 집 안을 둘러보다 말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쩌면 지구에서의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 기어코 지구로 돌아온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을 눈에 담으려고.

* * *

되돌아가겠단 결심을 마친 지안이 가장 먼저 챙긴 건 전술이었다. ‘이능에 따른 에스퍼의 효과적인 배치와 전략 수립’, ‘몬스터 약점 공략집’, 그 외 제국에서 유용히 쓰일 만한 지구의 여러 기술들. 그리고 일리아스와 악시온이 쓸 에스퍼 전용 아티팩트까지. 챙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의약외품과 게이트용 비상 알약을 대량 확보하고, 에스퍼 파장 감지기 같은 것들도 넉넉히 챙겨야 했다. 자신이 아무리 에스퍼의 파장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먼 곳까지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봤다면 고등급 게이트 공략을 준비하러 가는 것이라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했다. 꿈에서 본 것이 사실이라면 신탁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거의 대륙의 절반이 쓸려나간 게 확실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단단히 대비가 필요했다.

그나마 외장하드가 발명된 세상에 살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도 과학, 공학, 화학 공식, 의료지식, 게이트 전략, 몬스터 도감 같은 것들을 싹 쓸어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태양열 자가발전 배터리와 정찰 드론, 유사시 사용할 게이트용 권총까지 몽땅 구비했다. 간혹 가이드가 에스퍼와 함께 게이트에 진입하게 될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게이트용 권총은, 생김새만 권총이지 위력이 무려 크레모아와 비슷하다. 웬만한 몬스터도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권총 두 자루에 가산을 완전히 탕진해서 그렇지.

덕분에 빈털터리가 된 지안의 다음 목표는, 션 오프리였다.

당일 오후, 지안의 연락을 받고 나온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계약서를 꺼내 놓았다. 지안은 계약서를 확인하는 척하며 운을 띄웠다.

“다 좋은데…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네요. 여기, 반드시 뉴욕 수복 작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적혀 있는데. 제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백악관에서 올해 뉴욕을 되찾을 거라고 발표했었죠 아마? 예컨대 지금 계약을 해 버리면, 계약 즉시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진 뉴욕의 보스 몬스터를 소탕해야 하는 거잖아요?”

“부담스러운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S급 에스퍼를 다섯이나 보유한 나라입니다. 계약이 끝나면 S급 에스퍼는 총 일곱으로 늘어날 테고요. 그리고 이건 대외비입니다만, 그 작전엔 미국의 모든 S급 에스퍼들이 동원될 예정입니다. 그 정도 숫자면… 뉴욕? 충분히 수복 가능합니다. 당연히 성공 확률은 더 높아질 테고요.”

“흠…….”

탐탁치 않은 척 침묵하자,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악시온이 예정대로 슬쩍 끼어들었다.

“지안. 관두고 창성으로 가는 게 좋겠다. 미국만큼 계약 조건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쪽이 훨씬 더 대우가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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