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제발…….”
희미하게 들리는 잠꼬대에 그는 곧장 지안의 머리맡으로 향했다. 지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대고 있었다. 꼭 감은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어깨와 두 손을 보건대 악몽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악시온은 지안을 깨우기 위해 떨리는 어깨를 짚었다.
* * *
여긴 어디지? 게다가 왜 눈앞에 이환이 있지? 아. 그렇구나. 여긴 창성 길드의 로비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의문을 갖기 무섭게, 소름 끼치는 불길함이 전신을 장악했다. 곧바로 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바로 어제, 가이딩 부족으로 더는 장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란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은 라영 언니를 살리기 위해 이환을 찾아온 참이었다.
가이딩 부탁을 거절한 이환을 뒤쫓아 허겁지겁 길드 로비 아래까지 뒤따라온 것이 기억났다. 생각해낸 즉시, 지안은 덥석 눈앞의 이환을 붙잡았다.
“이환 씨, 부탁이에요! 가이딩 한 번이면 돼요!”
“곤란하군. 안 된다고 했잖아.”
“매칭률 낮아도 괜찮아요. D급이건 C급이건 다 좋아요. F급이라도 좋으니 제발…….”
지안의 말에 이환이 한숨을 뱉어냈다.
“하. 정말 귀찮게 구네. 우리 길드에 F급 가이드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고작 F급 에스퍼를 위해서 길드 소속 가이드를 번거롭게 할 순 없어.”
“부탁이라도, 말이라도 한번 꺼내 줘요. 당신 창성 길드장이잖아요. 제발요. 언질 한 번만 해 줘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길드장인 당신이 말하면, 누구 한 명이라도 자원해 줄지도 몰라요.”
“좀 떨어져.”
그 말과 함께 이환이 지안을 밀쳐냈다. S급 에스퍼의 완력에 지안은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얼얼했다. 넘어지면서 바닥을 잘못 짚은 건지 손목이 아팠다.
“말했잖아. 가이드들이 기분 나빠할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는 이환의 모습에 지안은 서둘러 무릎을 꿇였다. 사람들이 보건 말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로 지안은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가이드…… 한 명만 있으면 돼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줘요. 이러다간, 언니가 폭주할 것 같단 말이에요.”
“……내 알 바 아니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환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안은 서둘러 일어나 그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어깨를 짚어 이환을 뒤쫓으려는 자신을 말렸다.
“그만해. 난 괜찮으니까. 응?”
언니다. 언니 목소리다! 지안은 뭐가 괜찮냐고 외치며 뒤돌아보다 말고 덜컥 굳어 버렸다.
“……황녀 전하?”
“알잖아. 내가 선택한 일이야. 네 탓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런 꿈 꾸지 마.”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그제야 이 모든 게 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언니는 죽었지. 그리고 황녀 전하도…… 게이트를 열기 위해 폭주하는 걸 택했다. 날 되돌려보내려고.
자각과 함께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춥고 새까만 지하의 얼음 절벽으로.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황녀 전하의 두 눈만은 금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늘 보았던 그대로였다.
하염없이 지안을 바라보다 말고, 이비엔이 말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네가 그리워.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이런 꿈을 꾸나 봐. 그래도 설마 간섭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는데…….”
간섭이라니? 지안은 멍한 얼굴로 자신만큼 당황해하는 이비엔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살아 있구나! 각인이 됐구나!
하지만…… 각인이 불안정하다.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연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딘가!
그러나 뛸 듯이 기뻐진 것도 잠시, 서글픈 목소리로 이비엔이 말했다.
“네가 무릎 꿇는 걸 보고 저절로 손이 나갔어. 나 때문에 꾸는 악몽인 게 뻔히 보였거든. 그래봤자 꿈일 뿐이란 거 알아. 알지만…… 꿈에서라도 절대로 그러지 마. 난 싫어. 네가 그러는 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안은 덥석 이비엔을 붙잡았다.
“전하. 대답해요. 어디 있어요? 아직 살아 있는 거죠! 그렇죠!”
서둘러 캐물었으나, 이비엔에게선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우습지. 신탁에서 말한 종말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인 줄 몰랐어.”
“……무슨 말이에요?”
“북부의 얼음산 아래에 괴수들이 잠들어 있었어. 내가 폭주하면서 산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그 괴물들이 전부 풀려나 버렸고. 신탁은 이를 예견한 거였던 거야.”
그 말에 지안은 일리아스의 손에 쥐여 있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돌발성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몬스터. 그리고 몬스터의 발톱에서 발견한 전하의 손수건! 전하는 아직도 폭주 중인 거다. 그 힘이 게이트를 열어 몬스터를 지구로 이동시킨 거고!
자각과 동시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함께, 얼음을 뚫고 솟아난 몬스터들이 땅 위로 쏟아져 나왔다. 눈보라 쌓인 하얀 평원 위로 괴수들이 환호에 찬 괴성을 지르며 땅으로 하늘로 퍼져 나갔다.
신탁이 예고한 재앙의 시작이었다.
상황이 이토록 심각한데, 정작 옆에 선 황녀 전하는 태연했다.
“얼굴이 보기 좋아졌어. 네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예요?!”
버럭 소리치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좌절과 체념이 무참히 엉겨 붙은 미소에 지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젠 안심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비엔의 모습이 차츰 흐릿해져 갔다. 서둘러 붙잡아보려 했지만, 허공을 쥐어 잡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안 돼! 전하! 기다려요!”
마구잡이로 손을 뻗은 지안은, 덥석 악시온의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눈을 떴다.
* * *
황녀 전하가 살아 있다. 지안은 착잡한 얼굴로 그 사실을 일리아스와 악시온에게 털어놓았다. 에다의 신관에게 들었던 신탁과, 고서에서 읽었던 숨겨진 옛 신화까지 전부.
굳은 얼굴로 지안의 말을 듣고 있던 일리아스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한다 해도, 이미 늦었어. 설마 돌아가기라도 할 건가?”
“…….”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무엇보다도 이곳엔 북부의 샤먼이 없어.”
“……가능해요.”
지안이 전대를 찾자, 악시온은 할 수 없이 협탁에 밀어 넣어둔 편지와 전대를 꺼내 왔다. 이비엔이 아끼던 보석들을 한눈에 알아본 일리아스의 얼굴이 아프게 구겨졌다.
지안은 찬란히 빛을 산란시키는 보석들 사이에서 성배를 꺼내 들었다.
“게이트를 열었던 샤먼이 알려 줬어요. 성배에 물을 채우고, 수면 위로 가장 밝은 별빛을 비춘 뒤 기운을 쏟아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난 반대야. 이제 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니! 눈이 있으면 거울을 좀 봐! 네가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를 좀 보라고!”
가장 말리지 않을 것 같던 일리아스가 뜻밖에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뭣보다 제국의 능력자들은 이곳의 에스퍼들과 달라. 널 두고 다들 아귀다툼을 벌이던 걸 그새 잊었나? 하루 걸러 납치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다. 치안 좋은 지구에서도 가이드 범죄가 비일비재한 판국에! 하물며 이제는 괴수가 판친다는 대륙으로 돌아가겠다니! 그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널 데려갈 순 없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가 살아 있다. 폭주의 고통에 갇힌 채 날 그리워하고 있다. 라영 언니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황녀 전하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안의 눈에서 희망을 읽어낸 일리아스가 말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그 말대로, 언제고 분명 이 선택을 후회할 것이다. 돌아가 봤자 하등 좋은 일 없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위기와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러나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아득한 모험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내야 할 때란 걸.
선택을 마치며. 지안은 말없이 일리아스의 얼굴에 드러난 고통을 읽었다. 솔직히, 이대로 그의 주장에 설득당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며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런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다.
“황녀 전하를 살리고 싶어요.”
“이제 와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그새 잊었나? 이비엔은 널 배신했어!”
그러나 지안에겐 외려 마법약을 삼키는 황녀 전하의 모습만 선명히 기억났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황녀 전하가 울음을 터뜨리며 건넨 사과와, 그 사과에 눈 녹듯 상한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던 것까지 모두 또렷이 기억난다.
“전하. 절 위한 반대는 그만하세요.”
“…….”
“위험한 건 저도 알아요. 기껏 돌아갔는데 정작 황녀 전하를 구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래도 전 괜찮아요. 황녀 전하를 구하러 대륙으로 돌아갈 거예요.”
잠자코 있던 악시온이 무겁게 말했다.
“신탁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말인가? 대륙의 절반이 쓸려나갔을 것이다.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국을 지키겠노라던 황녀 전하의 결심을 들었어요. 황녀 전하가 더는 그럴 수 없게 된대도 괜찮아요. 제가 그 결심을 이어갈 테니. 필요하다면…… 대륙의 모든 능력자들에게 각인을 해서라도.”
“미련한 짓이다. 그대는 황족도 아니고, 황녀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황녀의 유지를 이어받을 이유가 하등 없건만, 어째서 그런…….”
“지금은… 두 분이 제 편이니까요.”
지안은 일리아스와 악시온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따뜻하고 다정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