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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157/199)

158화

실시간 방송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안은 몬스터가 쓰러지자마자 곧장 택시를 잡아 용지동으로 향했다.

제국에선 그다지 목격할 일이 없었던 일리아스의 이능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인 줄 몰랐다. 아득한 거체로 에스퍼들을 위협하던 그렘린을 그토록 손쉽게 죽여 버리다니…. 영상을 통해 목격한 것임에도, 그가 지닌 압도적인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에스퍼 방송에 왜들 그리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에스퍼들이 선보이는 화려한 기술과 이능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이라도. 이 방송에는 분명 환호성을 내질렀으리라.

지안은 직감했다. 일리아스의 활약으로 에스퍼들의 인기가 한층 더 상향되리란 걸. 그리고 어쩌면, 이 일로 일리아스의 팬카페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어찌나 드라마틱한 등장이었는지. 사감을 다 떼어놓고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에선 고등급 에스퍼로 큰 찬사를 받을 게 분명한 그의 힘이, 정작 제국에선 폭주하는 능력자들을 제거하는 데 쓰이고 있었지 않나. 비극이 따로 없다.

저도 모르게 성축일날 신전을 향해 몰려들었던 능력자들을 떠올린 지안은, 흠칫하며 생각을 지워 냈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일면식도 없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아닌가. 멋대로 성녀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매달리던 그들을 위해 삶을 희생할 순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령 예수가 살아 돌아온대도, 이런 날 이기적이라 비난하진 못할 것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어렵게 그 세계를 떠나왔는데! 지안은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마음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노쇠한 북부의 샤먼이 남긴 말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기억하십시오. 성배에 물을 채운 뒤, 수면에 가장 밝은 별을 비추고 기운을 쏟아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니.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무엇에 저항하는지도 모른 채 지안은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주한 일리아스의 착잡한 얼굴과, 그 손에 들린 피 묻은 손수건 앞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 * *

울적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지안은, 지구로 돌아온 이후 손도 대지 못하고 옷장 구석에 숨겨 두었던 전대를 끄집어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그만 잊으려 했는데. 막상 눈앞에 꺼내 놓자 전대를 허리춤에 단단히 둘러매 주던 황녀 전하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났다.

‘잠시만 맡겨둘게. 혹시나 차원을 건너다가 유실될 수도 있잖아. 나중에 돌려받을 테니 잘 챙겨 줘. 알겠지?’

“거짓말쟁이…….”

할 수만 있다면 전하를 붙잡고 외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내가 한 충고와 조언은 어디로 들은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아닌가. 다시 만나게 되면 울음이 먼저 터지려나.

생각과 동시에 실소가 터졌다. 다시 만난다니 어떻게? 무슨 수로? 끝까지 희망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견딜 수 있다. 꿈에서라도 차마 감쪽같이 자신을 속인 황녀 전하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진짜 거짓말쟁이는 전하가 아니다. 나야말로 거짓말과 속임수로 시간을 벌고, 차례로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그리고 황녀 전하를 기만하지 않았나.

그뿐인가. 잠깐의 연민으로 감당 못 할 사고까지 쳐 버렸다. 무사히 지구로 떠나온 지금, 위스로데 대륙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신탁이 말하는 재해는, 성축일날 가이딩을 맛본 에스퍼들이 일으킬 폭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황녀 전하가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폭주한 능력자가 수백 번은 죽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생각하기 무섭게 주룩 눈물이 흘렀다. 신탁에 맞서는 건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던 전하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게이트 안으로 나를 떠밀어 넣던 전하의 눈빛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황녀 전하는 내게 대륙을 구할 의무를 짐 지우지 않으려 했지만, 처음부터 신탁이 콕 집어 요구한 건 나였다. 그랬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단 이유로 비겁하게 도망쳤다. 수백에 이르는 능력자들을 방치했다. 모든 걸 외면한 채 기어코 지구에 도착했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거라고 거듭 되뇌었지만, 이젠 안다. 그조차 모두 변명에 불과했다는 걸. 전하는 어처구니없는 내 비겁함에 호응해 준 거다. 잔뜩 겁먹은 나를 달래는데 하나뿐인 목숨을 써 버린 거다.

“……이런 게 무슨 가이드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가이드라 불릴 자격이 없다.

인정해 버리자, 돌이켜 볼수록 한숨도 나오지 않을 만큼 한심했다. 정체를 숨길 거면 확실히 숨기든가. 기왕 정체가 드러났다면 차라리 전면에 나서서 에스퍼들을 규합하든가 할 것이지…….

미적미적, 뭐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도 못한 채 닥쳐온 일들을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무기력하게 휩쓸리기 바빴다. 나서서 해결하기보단 도망치고 외면하고 회피했다. 아무것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자신이 없다. 기껏해야 전하가 준 전대를 확인해 볼 용기만이 자신이 가진 전부였다.

입술을 앙다문 채로, 지안은 조심스럽게 전대를 열어 보았다.

전대 속에는 값비싸 보이는 보석과 장신구가 잔뜩 들어 있었다. 소량의 금화와 샤먼이 준 성배도 보였다. 보석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채를, 지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젠 안다.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귀중품을 맡겨두겠단 건 전하의 얕은 핑계였단 걸. 상심을 숨기지 못한 채 하염없이 빛나는 보석 더미를 바라보던 지안은, 문득 에메랄드 사이로 삐져나온 종잇조각을 보고 서둘러 그것을 끄집어냈다.

보석 아래 묻혀 있던 건 밀랍으로 단단히 밀봉된 편지였다.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어내렸다.

아마 이 편지를 읽을 때쯤, 넌 이미 지구란 곳에 도착해 있겠지.

지안, 거긴 어떤 곳이야? 네가 그리워하던 세상이 어떤 곳일지 궁금해. 기왕이면 북부처럼 춥지 않으면 좋겠어.

있잖아. 나 어젯밤 꿈을 꿨어. 내가 폭주했던 날 기적처럼 네가 나타났던 꿈을.

그날 너는 나를 껴안고 손을 잡고 등을 쓸어 주었지.

확신하건대,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살지 못했을 거야. 네 옆에 있던 오라버니를 보고 알았지. 그날 나는 타올라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그런 날 살린 건 너였어. 그랬는데…… 널 배신하다니. 내가 미쳤었나 봐.

돌아보니 모든 게 후회스러워.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찾아가 치댄 것도, 굳이 공작의 저택을 나서지 않으려는 널 설득해 신전에 데려간 것도, 그리고 이멜다와 손을 잡은 것까지 모두.

내가 모든 걸 망쳤어.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어. 어떤 순간이든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네 충고를, 나는 따를 수 없을 것 같아.

신탁에 맞서 제국을 수호하겠다는 내 결심이 얼마나 힘없이 무너졌는지 넌 모를 거야. 나는 다만, 네가 바라는 소망을 이뤄 주고 싶었어. 이외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어.

마지막까지 멋대로라 미안해.

희망하건대, 이런 내 결정이 네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부디 제국에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려. 모두 잊고, 그리워하던 삶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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