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하. 젠장. 가이드 앞에선 싸우지 말라던 조언만 아니었어도…….’
일리아스는 이를 악문 채 울컥 올라오는 질투를 참았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첫 데이트 도중이다. 모처럼 분위기도 좋은데 기분 좀 상했다고 마찰을 일으킬 순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능글맞게 합류하는 게 더 나았다. 일리아스는 얼른 지안과 악시온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찍어. 설마 럽스타그램 사진에 날 빠뜨리려는 건 아니지?”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민 일리아스는 내심 긴장한 채로 지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지안은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자. 그럼 다시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치즈!”
지안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찰칵 소리가 나며 활짝 웃는 세 사람의 얼굴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대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지안은,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앨범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
바로 그 사진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일리아스의 웃음이, 시온의 눈빛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설렘이 드러나는 입가와, 언뜻 긴장한 눈빛에 담긴 감정이 선명히 읽혔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다시 지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냥 사진을 확인하는 것뿐인데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잡아 누르면 귓전에서 쿵쿵 울리는 이 소리가 사라질까.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평정심이 사라지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웠던 시간이 갑자기 끝나 버렸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자각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특히 사랑이라면, 더더욱.
지금처럼 지구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곁에 두고도 영영 알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감정의 벅차오름을 느끼며 지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놀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그것은 비단 데이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지안은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절 따라 차원을 넘는 거.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일리아스는 머뭇대는 지안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틀려. 너라서 쉬웠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살아갈 곳이야.”
“나 역시 그렇다. 그대가 선택한 게 지구가 아니라 지옥이라 해도 난 그대와 함께 하는 걸 택했을 거다.”
확신에 찬 목소리에 지안은 신발 끝에 고정시켜 둔 시선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일리아스의 말이 자취처럼 남은 죄책감을 말끔히 태워 버렸다.
“말했잖아. 널 사랑해.”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인데. 체감되는 무게가 전과 달랐다. 신발 속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절로 코끝이 찡해져 왔다. 범람하는 애정에 푹 파묻힌 기분이었다.
넘쳐흐를 듯 출렁이는 감동을 삼키며 지안이 말했다.
“……저 지금 엄청 행복한 것 같아요.”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에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넋을 놓고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월드 랜드의 불빛이 일시에 꺼지며 관람차가 덜컹 멈췄다. 갑작스런 작동 중지에 놀란 것도 잠시. 곧바로 게이트 발생 경보음이 울렸다. 뒤이어 긴급뉴스를 알리는 대형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긴급 속보입니다. 용지동에 돌발성 게이트가 발생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용지동 인근 주민께서는 서둘러 쉘터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용지동에 돌발성 게이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레벨9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 그렘린이 현재 용지동 호수공원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각성자 협회에서 에스퍼들이 대거 출동하였으나. 제압이 쉽지 않아…….
뉴스가 나오기 무섭게 근교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구경하고 있던 폭죽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었다. 이어서 관람차 안의 스피커를 통해 월드 랜드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이트 사태로 인해 월드 랜드가 조기 폐장됨을 알려드립니다. 고객님들께선 신속히 쉘터로 대피해 주시길 바라며…….
방송과 함께 작동을 멈췄던 대관람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안은 불안한 얼굴로 불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지점을 응시했다. 연달아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악시온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지안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마라. 각성자들이 파견됐을 것이다.”
“……그렇겠죠?”
“그렇게 걱정되면 다녀올까? 레벨9 게이트의 몬스터라면 대충 며칠 전에 처리한 블랙 스컬러인가 뭔가 하는 몬스터와 비슷한 수준 같은데. 처치하는 게 어렵진 않을 거다.”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지 마세요. 꼭 전화하시고요. 아니다. 제가 차로 용지동까지 태워드릴게요. 그편이 더 빠르기도 할 테고…….”
“안 돼. 위험하니까 공작이랑 쉘터에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 가시려구요.”
일리아스는 대답 대신 차 키를 들어 보였다.
분명 내 가방에 있던 차 키가 왜 전하의 손에 있는가? 지안은 경악하며 차 키를 빼앗으려 들었지만, 호락호락하게 빼앗겨 줄 일리아스가 아니었다. 솜씨 좋게 지안의 방해를 피한 일리아스가 말했다.
“걱정 마. 협회에서 에스퍼 수업의 일환으로 내내 운전 연수 받았어. 어제 운전면허증도 나왔고.”
“어제라니! 아직 잉크도 안 마른 운전면허증이란 말이잖아요!”
“그래서? 가지 마?”
그 말에 지안은 차 키를 뺏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래. 그깟 차 좀 어디 박든가 말든가 무슨 상관인가. 사람이 다치고 죽는데.
한숨을 쉬며 팔짱을 낀 지안은 자신만만한 일리아스의 모습에 한결 시름이 덜어지는 걸 느꼈다.
“다녀와요. 무사히.”
* * *
이환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는 그른 참이었다. 그렘린의 육중한 발톱에 그대로 가격당한 그는 곧장 어느 은행의 방범창을 뚫고 들어가 처박혔다. 핏물이 대리석 위로 줄줄 흘렀다. 제대로 맞았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그사이 그렘린을 에워싼 채 견제하던 에스퍼들이 이능과 함께 소형 C4 폭탄을 터뜨렸다. 일정 구역 바깥으로 몬스터가 이동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폭약으로 치명상을 입은 그렘린이 더 큰 난동을 부리며 주거밀집 구역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기 때문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로 몸통을 감싼 그렘린은 에스퍼들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그대로 어느 빌라에 처박혔다.
그것을 본 성민은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 질렀다.
“방어선 뚫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모두 퍼부어!”
“피해 발생! 건물 붕괴! 혹시 모르니 민간인 있는지 확인해! 대피 못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이환은? 이환 어디 갔어!”
“우리 가지곤 안 돼! 추가 지원 요청해! 지금 당장!”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혼란 속에서 폭탄의 여파를 털어낸 그렘린의 눈알이 번뜩였다. 가장 강한 에스퍼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폭약이 다시 퍼부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여섯 개의 다리가 아스팔트 위로 작은 싱크홀 같은 구멍을 내며 거체를 일으켰다.
“공격! 공격해!”
에스퍼들이 이능을 퍼부어 그렘린을 붙잡아 놓은 것도 잠시, 그렘린의 발톱에 누군가의 상체가 날아갔다. 자신의 팀원이 그대로 즉사한 것을 본 성민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저놈이…!”
이성을 잃고 그렘린을 향해 몸을 날린 성민은 그대로 몬스터의 입을 향해 돌진했다. 두개골이 너무 단단해서 겉에서 부수긴 무리니, 입 안으로 들어가 입천장을 통해 뇌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피해를 줄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도약과 함께 막 그렘린을 입을 향해 달려들려던 찰나. 누군가 성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컥! 목 졸린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난 성민이 본 건, 반짝이는 적금발과 그렘린을 향해 뻗어진 일리아스의 손이었다.
곧이어 수십 개의 태양이 허공에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대기를 순식간에 달구고, 도시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민은 넋을 뺀 채 주홍빛으로 달아오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무찌른 불덩어리들이 일시에 그렘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키이이이이―!
화염에 무차별적으로 가격당한 그렘린이 비명을 내지르자, 일리아스는 곧장 불덩어리 하나를 그렘린의 입속에 처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도약해 머리를 짓밟았다.
졸지에 일리아스의 이능을 삼키고 만 그렘린은 혀와 목구멍에 이어 차례로 몸속이 불타는 고통에도 제대로 된 포효 한 번 내지르지 못했다. 이미 혓바닥과 성대가 모두 타 버린 뒤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거대한 힘과 열기가 머리를 짓눌러 이빨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몬스터의 겉과 속이 모두 타들어 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쿵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거체가 힘없이 꿈틀거렸다. 그렘린을 상대로 난전했던 에스퍼들은 그 광경을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작은 아파트 못지않게 거대했던 그렘린의 몸체가, 퍼부어진 화염 아래 수축을 거듭해 고작 버스 두 대 정도의 크기로 작아졌다. 언제 흉포한 몸부림을 보였냐는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그렘린은 이미 절명해 있었다.
생기를 잃은 몬스터의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머리 위로 드론이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뒤섞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드론의 렌즈가 타오르는 불 속에 우뚝 서 있는 화염의 S급 에스퍼를 비췄다. 어마어마한 열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일리아스는 태연했다.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은 채 당당했다.
그러나 그토록 손쉽게 그렘린을 처치했음에도 일리아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렘린을 향해 화염을 퍼붓던 순간, 그 손톱 사이에 끼어 있던 낯익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불타다 만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재가 되기 직전 자신의 눈에 띈 탓에 무참히 불에 그슬려진 채지만 다행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면, 형편없이 찢어진 이 물건은…… 분명 지안이 이비엔에게 선물한 손수건이었다.
일리아스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더러워진 손수건 조각을 펼쳤다. 고작 모퉁이 한 조각만 남은 천을 펼쳐 드는 게 몹시 힘들었다.
이윽고, 그는 구석에 쓰여진 글자를, 피로 얼룩진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비엔 테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