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애타게 고대했던 대답이었으나 정작 일리아스는 멍한 얼굴로 지안을 응시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어쩌면 뻔뻔스러운 접근에 질린 지안이 마음 없는 대답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걸지도 모른다. 잔뜩 흥분한 채 나타나 채근하듯 대답을 종용한 내게 질려서, 동정하듯 좋아한다고 대답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뒤이어 거세게 밀려오는 기쁨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좋다. 같은 무게의 마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깃털 같은 호감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갑작스럽게 받아 낸 각인보다 그 말이 더 소중했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난처한 지안의 표정에 들뜬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근데, 전하. 가이드는 에스퍼를 여럿 두기도 한다는 거…… 혹시 들으셨어요?”
알고 있다. 지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각인을 받은 게 자신만이 아니란 사실을, 왜 모르겠나. 일리아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채원이 한 말을 떠올렸다.
‘각성자 판에 일부이처, 일처다부 엄청 흔하니까. 질투는 적당히 해요.’
넌지시 일러 주는 그 말이, 바로 지금을 위한 충고란 걸 알 수 있었다. 지안을 두고 공작과 공존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질투로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이 매분 매초 일어나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속이 뒤집어져도 지안의 곁에 남으려면 악시온 오데르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이후로도 생면부지의 남자가 나타나 지안을 끼고 도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봐야 할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최악이었지만, 속이 절절 끓었지만, 지안과 함께할 수 있다면 지옥도 감수할 수 있었다. 가시밭길도 즐겁게 갈 수 있다. 일리아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게 세 번째 에스퍼가 생겨도. 네 번째, 다섯 번째 에스퍼가 생겨도…… 그래도 괜찮아.”
확신에 찬 목소리에 지안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이세요?”
일리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지안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게 뭐든 지안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넌 내 가이드야. 난 그걸로 충분해.”
하지만 정말로 충분하단 생각이 들려면 키스 한 번으론 부족할 것 같았다. 서투르게 호응하던 입술을 한 번 더 맛보고 싶었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넋을 놓은 지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일리아스는 그 욕망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예고 없이 다시금 이어진 키스는, 지안의 숨이 잔뜩 흐트러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 *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를 증명하듯, 악시온은 몇 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제법 능숙하게 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 옆에서 가볍게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를 만드는 중이었다. 조금 탄 건 공작에게 주고, 모양이 좀 이상한 건 자신이 먹고, 가장 예쁘게 만들어진 완성작은 지안에게 줄 생각이었다.
이 같은 분업이 이루어진 건 그들이 함께 지안의 집에서 지낸 지 딱 일주일 지났을 즈음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진 드라마의 힘이 가장 컸다. 현대 여성의 온갖 로망을 모두 부어 만든 드라마 남자주인공들 덕분에 지안은 별달리 한 것도 없이 그 혜택을 톡톡히 받아먹는 중이었다.
커피의 향이며 크레마까지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악시온은, 곧장 머그잔을 들고 지안의 방으로 향했다.
“지안.”
“으응…….”
“아침이다. 일어나라.”
비실거리는 지안을 일으켜 앉힌 악시온은 적당히 식어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여 주며 다시 한번 재촉했다.
“세수부터 하는 게 좋겠다.”
“하암. 오늘… 에스퍼 수업 없는 날 아니었어요?”
“맞다.”
악시온의 긍정에 지안은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던 커피를 협탁에 내려놓은 채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수업이 없단 건 오늘이 주말이란 말이다. 그리고 주말엔 더 자도 된다.
그런 지안을, 악시온은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더 자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만…… 모처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다.
“지안. 그만 일어나라. 응?”
볼을 간지럽히는 손가락에 지안은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어르고 달래니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는 왜 또 이렇게 아프지. 어젯밤에 다 같이 술을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월드 랜드에 간 다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약속했잖나.”
“딱 5분만 더요…….”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악시온은 절로 마음이 약해졌다. 이렇게나 졸려 하는데 그냥 늦잠을 자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전날 지안이 자신을 깨워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걸 생각하면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10분 뒤에 다시 오겠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렸다.
“근데, 월드 랜드에 영화… 그거 완전 데이트 코스네요.”
“데이트가 맞다. 어제 그렇게 말했지 않나.”
그 말에 서서히 잠기운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젯밤 제가 술에 취한 채 한 말이 기억났다.
―이거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같이 가 주실 거죠?
―아. 근데 저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날 것 같은데… 그래도 진짜 진짜 깨워 주셔야 해요? 데이트 가야 하니까! 월드 랜드에 있는 거 다 타 봐요, 우리! 영화도 보고! 밤엔 대관람차 안에서 불꽃놀이 구경해요.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지안은 퍼뜩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의 나, 대체 무슨 말을 한 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삼황자가 아침을 차려 놨다.”
지안은 생각했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게다가 아침이라니……. 드라마의 폐해가 심각하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건가 전하는.
* * *
곧 할로윈이라서 그런가, 월드 랜드는 좀비 랜드로 바뀌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놀이공원 특유의 분위기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환한 대낮인데도 어설픈 분장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돌아다녔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근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데이트가 뭔지 정확히 학습한 두 사람이 월드 랜드의 광경에 실망한대도 분히 납득할 만한 풍경이었다. 그래도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그, 여기, 여기에 아쿠아리움도 있어요! 거긴 여기처럼 피 칠갑은 아닐 거예요.”
“난 여기도 괜찮은데. 근데 저건 뭐지?”
“솜사탕이요. 폭신하고 달콤한 건데, 드실래요?”
일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지안은 곧장 솜사탕을 주문했다. 한참 카드를 꺼내 계산하고 있는데 귀 뒤로 뭔가가 쑥 꽂혔다. 뭐지, 하고 머리를 더듬대며 뒤를 돌아본 지안이 마주한 건 스마트폰 렌즈였다.
찰칵!
사진을 찍은 일리아스였다. 요 근래 전자기기를 썩 잘 다루게 된 그는 씩 웃으며 화면을 지안에게 내밀었다.
“봐봐. 잘 찍혔어.”
잘 찍히긴 했다. 눈알 머리띠에 솜사탕까지 들고 있어서 그런가, 영락없이 데이트 중 찍은 사진 같았다. 심지어 일리아스도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머리띠는 언제 사셨어요?”
“네가 한눈팔고 있을 때. 뭐부터 탈래? 우주특급? 하이로스윙?”
한눈이라니. 고작 솜사탕을 사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월드 랜드 인기 놀이기구를 꿰고 있는 걸까. 차에서 내도록 핸드폰만 보더니. 그때 검색했나?
“……우주특급이요.”
“타러 가자.”
솜사탕을 받아드는 척 지안의 손을 잡은 일리아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아침을 다 태워 먹은 걸 만회할 기회였다.
반은 자의로 반은 타의로 끌려가던 지안은, 돌연 남은 한 손에 쥔 핸드폰을 악시온에게 빼앗겼다. 돌아보자 그가 재빨리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 버리는 게 보였다.
“잘못하면 떨어트리니까.”
그러고는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
손을 잡으려고 한 짓인 게 대놓고 드러나서. 차마 놓으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째 양손이 좀 부자유스럽긴 한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붙잡힌 손바닥이 간질거려서 지안은 슬쩍 악시온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시작부터 망한 놀이공원 데이트치곤 선방한 것 같았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전날 밤 캔맥주를 따 버린 걸 후회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술에 취하길 잘했다. 덕분에 삼황자 전하가 고양이 머리띠를 쓴 것도 다 보지 않나.
지안의 이런 생각은, 악시온이 공기총으로 커다란 해골 인형을 따 주었을 무렵 확신으로 바뀌었다. 푹신한 인형을 품에 안으며, 지안은 술의 효능을 또 한 번 정정했다. 술이 아니었다면 이런 데이트도 없었을 게 분명하다.
* * *
커피와 추로스를 든 채 대관람차에 탑승한 지안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전경과 막 하늘로 쏘아 올려진 폭죽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놀이공원을 신나게 돌고 아쿠아리움에다 영화까지 싹 보고 난 다음이라 좀 피곤했지만, 밤하늘을 황홀하게 수놓는 불꽃이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넋을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가 물었다.
“그렇게 좋아?”
“예쁘잖아요. 아. 끝났다…….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아쉬워하는 지안의 기색에 일리아스는 망설임 없이 이능을 사용했다.
“아직 안 끝났어.”
그 말과 함께 저 멀리 허공 위로 불꽃이 튀었다. 폭약이 터지며 발산하는 불꽃만큼 형체가 정교하진 않지만, 촛불같이 작은 불길이 허공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폭죽 특유의 폭발음이 없었으므로, 지안은 단박에 그것이 일리아스의 짓이란 걸 깨달았다.
“와! 저거. 전하가 한 거예요?”
“응. 마음에 들어?”
“네!”
“뭐 해? 사진 찍어.”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제 얼굴과 그 뒤에 수 놓인 불길이 보이도록 자세를 잡는데. 돌연 악시온이 끼어들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찍힌 사진 위로 당황한 자신과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진을 확인한 악시온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지안. 이 사진, 별스타그램에 올리는 게 좋겠다. 태그는…… 럽스타그램으로 달아서.”
훅 들어오는 말에 지안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럽스타그램이라니 대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으신 거람.
짐짓 얼굴을 붉히는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눈을 부라리며 악시온을 노려보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더니! 기껏 지안의 환심을 사기 무섭게 관심을 가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