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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153/199)

154화

“확실히 창성만큼 좋은 곳이 없긴 하죠.”

“알면서 왜 거절하는 거지?”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어떻게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할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래전 네 가이드 확정 발표 때 나갔던 생방송을 제외하곤 딱히 너한테 뭘 잘못한 기억이 없는데? 내 말이 틀린가?”

“뭐? 하하. 표정 봐. 진짜 기억 안 나나 봐.”

“기억?”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는 이환의 눈빛에 간신히 삭여두었던 기억이 울컥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이드…… 한 명만 있으면 돼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도와 줘요. 이러다간 언니가 폭주할 것 같단 말이에요.’”

“…….”

“정말 기억 안 나요? 남들 다 보는 창성 길드 로비에서 무릎까지 꿇고 울고 불면서 빌었는데. 좀 살려 달라고. 가이딩 한 번이면 된다고. D급이건 C급이건 상관없다고. F급이라도 좋고, 매칭률 별로라도 상관없다고 그랬었는데.”

일러 주자 그제야 기억이 난 건지 이환의 얼굴이 낭패로 구겨졌다.

“여지안. 그땐 널 도울 사정이 안 됐어. 그리고 벌써 몇 년은 더 지난 일이지 않나? 고작 그런 일로 내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는 건…….”

“고작?”

지안의 표정에 분노가 차올랐다.

“네가 그랬잖아. 생방송에서 날 그렇게 뿌리치고, 전국민 앞에서 망신시켜서 미안하다고! 아쉽게 매칭률은 안 맞았지만 뭐든 부탁 있으면 하나쯤은 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 말만 믿고 길드에 찾아갔는데, 너 그때 뭐라 그랬어? F급 에스퍼 때문에 길드 소속 가이드 번거롭게 할 순 없다고. F급 에스퍼 가이딩해 주는 거, 가이드들이 기분 나빠해서 안 될 것 같다고 한 거. 정말 기억 안 나?”

“그건.”

“길드 소속 가이드한테 입이라도 한 번 벙긋해 줬으면 이렇게 억하심정이 남지도 않았어. 그렇게 창성에서 쫓겨나고 내가 누굴 찾아갔는지 알아? 신새벽한테 찾아갔어. 그 앤 에스퍼라면 무조건 매칭률 50% 이상은 나오니까. 가서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면서, 온갖 시녀 노릇을 다 하면서 매달렸어. 그런데…… 그 짓 한 지 딱 한 달만에 언니가 죽었거든.”

“…….”

“어때요? 창성 길드장님? 이래도 기억이 안 나요?”

“이라영은 F급 에스퍼였어.”

“그래서? F급은 죽어도 된단 말이야? 등급 낮은 각성자는 사람도 아니야?”

“하. 좀 진정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는데, 이런 말은 이라영이 죽은 직후에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이 있으니 비난은 받아 주겠는데, 이제 와 이러는 건 좀 우습네. 이런 말은 에스퍼 없이 해야지. 막상 그때는 입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 꼴사납군. 기댈 언덕이 생겨서 그런 것처럼 보여.”

그러나 이환의 말에도 지안의 기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정확히 봤네. 맞아. 모처럼 기댈 사람이 생겨서 없던 자신감이 좀 생겼는데. 왜? 아니꼬와? 내가 내 에스퍼 좀 믿고 설치는 것도 안 돼?”

“……”

“당신은 몰라. 사람이 힘이 없으니까 입이 안 열리더라. 감히 창성의 길드장한테 항의하려니까 너무 무섭더라! 에스퍼 믿고 사고 치는 가이드가 태반인데, 이깟 항의 하나, 이제 와 겨우 뱉어내는 말 하나 내 맘대로 못 하면 에스퍼가 있건 말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시 찾아오지.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다시 오지 마. 창성엔 안 가.”

이를 갈며 말하자 이환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자신이 있는 한 S급 에스퍼를 영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드디어 안 모양이었다.

“이라영 일은 미안하게 됐어.”

뒤늦은 사과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고작해야 말뿐인, 성의 없고 초라한 사과인데 그게 뭐라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서러움이 깨어나기라도 한 듯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환의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지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냉랭히 말했다.

“꺼져.”

구경꾼이 모이기 시작한 걸 본 이환은 서둘러 지안을 지나쳐 갔다. 지안도 감정을 추스르며 눈가를 닦아 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자꾸 눈물이 흘러 뺨을 뒤덮었다.

잊었다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도 괜찮지 않다. 울분과 서글픔으로 산산이 조각나 버렸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버리기라도 한 듯 호흡이 멋대로 흐트러졌다.

“지안.”

“괜찮… 괜찮아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악시온은 그대로 지안을 붙잡고 끌어안았다. 복도 한가운데였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지만 비틀거리며 서 있는 지안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흐엉……. 흐윽, 우욱…….”

지안은 그대로 악시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한바탕 울어 재꼈다.

결국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우는 지안을 달래느라 에스퍼 필수 교육 첫날부터 거하게 지각했다.

* * *

갑작스럽게 진행된 에스퍼 필수 교육을 맡게 된 강사는 1팀의 리더 한채원이었다. 갑작스럽게 1팀의 리더에서 신입 에스퍼 교육 강사로 발탁된 채원은 골치 아픈 얼굴로 문제의 S급 에스퍼를 살폈다.

하나는 화염의 이능을 지녔고 다른 하나는 신체강화계 이능력자인데, 둘 다 사회성이 없고 어딘가 영 이상했다. 여태 게이트에서 생존한 걸 보면 분명 실력자이긴 한데…… 게이트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이 좀 산만했다. 게다가 세상에, 수업 중에 헬기랑 비행기가 뜬 걸 보고 어린애처럼 벌떡 일어날 줄이야.

어릴 적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고, 가이드 없이 몇 해간 생존한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듣긴 했다. 문제는, 상식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행동거지를 보면 예절만은 확실하게 학습한 것 같은데, 기초 상식 부족이 몹시 심각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채원은 서류 위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두 사람은 에스퍼 교육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할 것 같은데……. 하, 그렇게 되면 초딩이 게이트 공략에 투입되는 건가? 젠장, 웃긴데 안 웃기네……. 이걸 뭐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협회 소속 A급 각성자로서 그간 수많은 에스퍼들을 지휘하고 교육시켜 왔지만, 이런 타입은 또 처음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웃긴 건, 정작 각인까지 받은 주제에 가이드 관련 수업에만 특히 열을 올리는 두 사람의 태도였다.

“다들 잘 알겠지만, 가이드 관련 범죄는 즉각 처벌됩니다. 납치, 스토킹, 감금, 폭행, 강요, 모두 불법인 거 아시죠? 가이딩이 간절한 여러분 마음은 저도 다 압니다. 알지만, 우리 개새끼는 되지 맙시다. 괜히 친해져 보겠답시고 꼬리친 다음 술 먹여서 유인하거나, 불법 약물 사용해서 강제로 성 가이딩 시도하는 거…… 걸리면 다 좆되는 겁니다. 에스퍼는 물리적 거세도 합법인 거 다들 잘 아시죠?”

그렇게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금발머리 에스퍼가 질문을 던졌다.

“그, 이미 가둔 전적이 있으면…… 어떻게 되지?”

“당장 분리조치 됩니다. 그리고 가이드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지겠죠. 근데 질문이 영 이상하시네? 게이트 안에서 여지안 어디 가둬 두기라도 했어요?”

“……그런 적 없다.”

부정은 하는데 왠지 거짓말 같았다.

“흠. 게이트 안이었으니까. 어디 좀 갇혀 있었어도 보호하려고 그런 거면 여지안도 이해하겠죠. 딱히 협회에 신고한 것도 없고, 강제로 성 가이딩 시도한 것만 아니면 뭐……. 게다가 각인까지 받은 걸 보면 여지안도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아예 찜해두려고.”

“마음이 있다고?”

“당연하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각인해 주는 가이드가 어디 있어요? 각인이 얼마나 힘든 건데. 찐사랑 아니면 절대 안 해 줍니다. 저도 10년 연애 끝에 결혼하고 나서야 겨우 각인 받은 케이스고요.”

“사랑이라고? 결혼?”

“뭘 그렇게 당황해요? 당연히 사랑하니까 각인해 줬지. 지금 한참 연애 중이죠? 얼른 여지안 꼬셔서 청첩장이나 빨리 돌리세요. 아, 그런데 이혼하는 일은 없도록 주의합시다. 보통 그런 일 잘 없긴 한데…… 가이드가 위기를 느끼거나, 작정하고 복수하려 들 때 각인을 파괴하기도 하는 거 아시죠? 각인 파괴로 폭주 에스퍼 되면 즉각 협회 대응팀에 의해 척살되니 주의하세요. 물론 그런 짓을 한 가이드도 당장 감옥행이긴 한데…… 뭐 다른 말로 하자면, 바람피우지 말란 소립니다.”

“바람?”

“네. 바람. 그럴 리는 없지만 아주 가끔, 얼굴 반반하고 등급 높은 에스퍼들이 가이드 여럿 두고 양다리 걸치기도 하거든요. 근데 각인까지 받았으면서 양다리 걸쳤다? 그건 그냥 쓰레기입니다.”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네네, 압니다. 원래 이런 이야기 잘 안 하기도 하고, 각인까지 해 준 가이드 두고 바람피웠단 에스퍼 아무도 없다는 거 알긴 아는데…… 얼굴 보니까 가이드 여럿 꼬일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니 알아서 주의하세요. 괜한 오해 생기지 않도록. 혹시 전여친이 있었다거나 하면 기억나는 대로 빠르게 정리하시고요.”

“또 주의해야 할 점은? 더 없나?”

이어진 다급한 질문은 은발머리 쪽에서 나왔다.

“딱히? 각인까지 받을 정도면 여지안이랑 그럭저럭 사이 괜찮다는 거고, 썸이나 진도는 게이트 안에서 거의 다 뺐을 테고…… 아. 그렇지. 여지안 앞에서 심하게 다투지만 마세요.”

눈을 굴리는 두 사람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한 채원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가이드 두고 에스퍼들끼리 싸우는 거야 뭐, 일상이긴 한데…… 싸워도 가이드 모르게 싸웁시다. 알죠? 괜히 들켜 봤자 좋을 거 없어요. 사람인 이상 질투 나는 거 알아요. 아는데, 가이드가 최우선입니다. 각성자 판에 일부이처, 일처다부 엄청 흔하니까. 질투는 적당히 해요. 혹시라도 싸움이 너무 커지면 협회 차원에서의 개입이 있을 테니 주의하시고.”

그렇게 수업을 끝내고 에스퍼들을 내보내는데, 침중한 얼굴로 다가온 은발 에스퍼가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당신은, 지안과 친한가?”

“친한 건 아니고. 몇 년 본 사이라서 대강 성격은 알죠. 보아하니 나한테 여지안이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려고 이러나 본데, 나도 딱히 아는 거 없어요. 말했다시피 오며 가며 본 게 전부라.”

“그런 걸 물으려는 게 아니다.”

“그럼 뭔데요?”

“……이라영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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