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홀로그램 화면 위로 떠오른 세 사람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살펴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에스퍼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보상이나 이득이 아닌 가이드라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영국의 A급 에스퍼들이 대거 아일랜드로 국적을 바꾼 것도 전부 아일랜드의 가이드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어떻게든…… 회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인인 에스퍼를 아일랜드인으로 바꿔 버릴 만큼 중요한 게 가이드입니다. 근데 그 가이드가 협회를 탈퇴하겠다고 했다라……. 혹시라도 여지안 가이드가 국적 변경을 하면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생각입니까.”
“…….”
“입이 있으면 대답을 좀 해 보세요, 협회장. 여태 매칭되는 에스퍼가 없었더라도, 여지안 가이드는 한국의 유일한 S급 가이드였어요! 가이딩 해 줄 에스퍼를 못 찾아서 가뜩이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사람을, 그것도 게이트에서 생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의 입장을 배려 못 해서 그렇게 상황을 망쳐 놓는 게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의 노성에 협회장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생방송 관련해 가이드가 물의를 일으켰단 건 나도 들었습니다. 징계위원회를 연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기자들을 시켜서 갑질 가이드라는 평판을 만들라고 지시한 건 협회장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가, 각하. 그게 원래 여지안 가이드는 그렇게 하면 굽히는 사람이었는데….”
“그만 나가 보세요.”
뭐라고 더 말하려던 협회장은 그대로 비서관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깊이 한숨을 내쉰 대통령이 물었다.
“저 S급 에스퍼 두 사람, 신원 확인됐나?”
“아직입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는 나라가 아직도 없단 말인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벌써 말이 나왔을 법도 한데?”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이드가 한국인인 데다 이미 각인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은근히 알려둔 덕분에……. 하지만 미국에선 이미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각성자 협회 스카우터가 자국의 S급 가이드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10시에 입국합니다.”
“실장이 보기엔 어떨 것 같나. 협회장이 여지안 가이드의 협회 탈퇴를 막을 수 있겠나?”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구소장의 말로는, 협회장이 여지안 가이드를 백업 가이드로 돌리겠다 거론했다고 합니다. 어렵사리 찾은 제 에스퍼인데 다른 가이드를 전담으로 붙이려 한 협회에 배신감이 심할 겁니다.”
“그렇다면 에스퍼를 챙겨 망명하거나 혹은 길드로 이적하겠군. 이적할 경우, S급 각성자가 무려 세 사람이니…… 갈 만한 곳은 창성뿐이겠어. 최대한 협회에 남도록 회유시켜 보고, 그게 안 된다면 반드시 창성에 가입시켜야 하네. S급 각성자를 셋이나 미국에 뺏겨선 안 돼. 그리고 협회장은 옷 벗기는 게 좋겠네. 후임으로 적당한 인물을 추려놓아 주게.”
“알겠습니다. 세 시간 뒤 브리핑하겠습니다. 그런데 각하. 아셔야 하실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여지안 가이드, 더는 S급 가이드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의문하는 대통령의 앞으로 극비문서가 내밀어졌다.
“더블 등급. SS급 가이드로 재각성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대통령은 다급한 손으로 문서를 확인했다. 확인을 마친 대통령이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이거…… 또 누가 아나.”
“현재까진 협회장과 그 비서, 협회 연구소장, 책임 연구원 몇 사람이 전부입니다.”
“……비서실장. 내일 일정 좀 비울 수 있겠나?”
“오전은 입법 회의 때문에 어렵습니다. 오후는 가능합니다.”
“여지안 가이드에게 연락 좀 넣게. 내가 좀 보잔다고.”
* * *
카 쉐어링 업체가 택배함에 넣어둔 차 키를 챙긴 지안은 주차공간에서 미끄러지듯 차를 빼냈다. 오랜만의 운전이라 좀 긴장했는데,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 뭐 하러 긴장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지안은 멍한 얼굴을 한 공작과 삼황자에게 말했다.
“뭐 해요 둘 다? 얼른 타요. 아침 먹으러 가야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눈짓하자 일리아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 왔다.
“계속 궁금했는데…… 이 철마는 대체 말도 없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이것도 그 전기란 걸로 움직이는 건가? 누구나 움직일 수 있다면 나도 해 보고 싶다.”
“뭘요? 운전을요?”
“그래! 그거!”
“네. 운전면허 딸 때까진 안 돼요. 얌전히 타세요.”
“운전면허가 뭐지? 가르쳐 다오. 작동법이 어려워 보이진 않는데…… 배우면 잘할 자신 있다.”
마치 어린애가 나도 운전해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 같았다. 가능하면 친절하게 안 되는 이유를 하나씩 알려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배가 고프다.
“우선 좀 타시면 안 돼요? 가면서 왜 안 되는지 설명 드릴게요.”
일리아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차 문을 열었다. 마침 전날 밤 각성자 로맨스 영화를 본 게 큰 학습이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허둥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탑승을 마칠 수 있었다.
곧장 지하주차장을 벗어난 지안은 모처럼의 드라이브를 즐기며 도로로 나섰다. 창문을 내리자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닥쳤다. 간절히 그리워했던 일상으로 조금이나마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 지안을 가만히 살피던 악시온이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브런치 먹으러 카페 가요. 자주 갔던 곳인데, 가서 커피도 마시고 미용실도 들르는 게 좋겠어요. 아 참, 그런데 두 분……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사람 위협하시면 절대 안 돼요. 아셨죠? 특히 전하. 어제처럼 함부로 불 만들어서 던지지 마세요.”
“그건 최소한의 자기방어였다. 애초에 그 여자가 바늘을 들고 날 찌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네. 알아요. 잘못은 신새벽이 했죠. 하지만 굳이 이능을 안 써도 얼마든지 제압하거나 밀쳐낼 수 있었잖아요. 어릴 적 게이트에 휘말려서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거짓말해 놨으니 망정이지……. 각성자는 일반인 폭행 시 빼도 박도 못하게 가중처벌 받아요. 그러니까 함부로 불 일으키지 마세요. 공작님도 마찬가지예요.”
불만스레 그 말을 들은 일리아스는 긍정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넌 그 여자랑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거지? 분명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음. 왜냐면…… 신새벽이 어마어마한 쓰레기라서? 아니지. 핵폐기물 같은 년이라고 해야 하나? 아, 핵폐기물을 모르시겠구나. 대충 설명하자면…… 이멜다인지 뭔지 하는 영애보다 더 질 나쁜 사람이에요.”
“주의해야겠군.”
“협회장도 주의하세요.”
“널 모욕했던 사람 말인가?”
“네. 전직 정치인답게 굉장히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거든요. 두 분 다 S급 에스퍼니까 별일 없을 테고, 협회 탈퇴하겠다고 했으니 딱히 볼 일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절 핑계로 말 걸어도 다 거짓말일 테니 들으시면 안 돼요. 다시 만나면 주의하세요. 특히 사인 같은 거 절대 하지 마시구요.”
“알겠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주의할 점을 알려 주다 보니 금세 카페였다. 여기서 간단하게 브런치 시켜 먹고, 부서진 핸드폰을 대신할 걸 하나 산 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드타워 스카이 전망대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광을 보고 놀랄 두 사람의 표정을 상상하니 썩 기분이 괜찮았다.
빠르게 주문을 마친 지안은 진동벨을 받아들고 자리를 잡았다. 전면 통유리로 시원하게 개방되어 있는 카페 3층에 올라서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멋지군.”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고작 카페 3층에서 보는 풍경으로 멋지다고 하다니. 벌써부터 타워 전망대에서 보여줄 반응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때맞춰 전동벨이 울려 손을 뻗는데, 공작님이 대신 전동벨을 집었다.
“내가 다녀오겠다.”
“어……. 정말요?”
“영화에서 봤다. 전동벨을 돌려주고 주문한 음식을 받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오오. 맞아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지안의 감탄에 악시온은 뿌듯함을 숨기며 곧바로 진동벨을 들고 1층 카운터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온 공작이 들고 온 건 커피와 브런치만이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가이드 여지안 씨.”
생글생글 웃는 낯선 외국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영업맨 저리 가라 할 만큼 친근한 인사를 건네온다. 지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누구신지?”
“미국의 각성자 협회 소속 스카우터, 션 오프리입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 든 지안이 물었다.
“아. 네. 그런데 어쩐 일로?”
“한국 각성자 협회에서 탈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식 빠르네요. 그보다 스카우터라고 하셨는데…… 혹시 영입 제안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동석을 좀 해도?”
“안 된다.”
뜻밖에 끼어든 악시온의 적대 어린 말에 션은 얼굴을 굳혔다. 스카웃 시도를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이미 실패인 건가?
“지안은 내 연인이다.”
맥락에서 한참 벗어난 말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지안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시온. 설마 저분이 저한테 명함 주는 걸 보고 오해하신 건 아니죠?”
어제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할 법한 오해였다.
“……그대에게 작업을 걸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인가?”
“음. 스카웃 제안이니 작업이라면 작업이긴 한데, 좀 달라요. 우선… 션? 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당황하게 만들어 죄송해요. 앉으세요. 조건을 좀 들어보고 싶네요.”
조건을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명함을 받아들진 않는다. 지안과 악시온, 일리아스의 반응을 차례로 살핀 션은 이내 자신이 누구와 협상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가이드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얌전해지는 에스퍼의 반응을 보니 정말로 각인을 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런, 음식이 식는군요. 아침이 가장 중요한데 이러면 안 되죠. 제 것도 하나 주문해놓고 올 테니 드시면서 들으시겠습니까?”
지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공으로 스카우터가 된 건 아닌지 센스 넘치는 배려다.
곧장 제 몫의 브런치를 챙겨온 션이 영입 조건을 꺼내든 건 식사가 다 끝났을 무렵이었다.
“그간 한국에서 대략 700가량의 가이드 수당을 받아 오신 걸로 압니다. 미국 각성자 협회에 가입하시면 그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거기다 매칭된 에스퍼 수당과 각인 수당을 더하면…… 매달 나오는 가이드 수당이 대략 한화 52억 정도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