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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149/199)

150화

순식간에 뼈만 남은 치킨의 잔해를 뒷정리한 지안은 두 사람을 차례로 욕실에 밀어 넣은 뒤 거실 한구석에 쌓아둔 쇼핑백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잘 수 있도록 손님용 토퍼를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 라영 언니가 집에 놀러 올 때 사용했던 토퍼와 이불이 남아 있었다. 전하는 소파에서 자고 공작님은 토퍼에서 자면 될 것이다.

희미하게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이불 위에 방향제를 뿌리던 지안을 일깨운 건 핸드폰 메신저 알림음이었다.

[미지급된 가이드 수당 62,510,450원이 지급 완료되었습니다.]

입금 완료 메시지에 의아해진 지안은 혹시 협회에서 온 문자가 더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탈퇴하겠다는 사람한테 밀린 가이드 수당은 왜 준 거지? 공돈이 생겨 기분이 좋긴 한데, 이마저도 협회장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워 영 꺼림직했다.

그래도 기왕 받은 돈, 일단 갖고 있다가 협회에서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처분을 결정하면 되겠지.

핸드폰을 끄려다 말고 문득 시간을 확인한 지안은 그제야 아직 잘 시간으론 조금 이르단 걸 깨달았다. 하루가 엄청 길었는데 고작 열 시밖에 되지 않았다니. 자려고 누워봤자 세 시간은 뒤척거릴 것이 뻔했다. 분명 어젠 기절하듯 잠들었는데…… 오늘은 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지안, 여기서 거품이 계속 나는데.”

“뭘 만지신 거예요!”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부산스러울 정도로 바지런히 움직인 탓에, 이윽고 세 사람 모두 잘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지안은 새삼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그리워했고 제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인데, 두 사람이 이렇게 있으니 이상하게도 집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역설적인 감정을 어쩌지 못한 채로 지안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아직 자러 가기는 이른 시각. 더 이상 할 것은 없고 마침 TV도 새로 산 참이다. 그리고 시간 때우기엔 영화만큼 좋은 게 없다.

지안은 곧장 엔플릭스의 영상 리스트를 훑었다. 못 본 사이 영상이 꽤 많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마침 순위권에 개봉 당시 꽤 인기가 있었다고 들었던 영화가 올라와 있었다.

“두 분 잔인한 거 잘 보세요?”

“잔인한 것… 말인가?”

“음. 뭐랄까. 몬스터가 나오는, 스토리가 있는 연극 같은 거요. 저 좀비 영화 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좀비 영화가 뭘 말하는 건진 몰라도 지안이 양해를 구하고 있단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악시온은 냉큼 대답했다.

“상관없다.”

“나도 상관은 없는데 좀비가 뭐지?”

“움직이는 시체요.”

“뭐? 그런 걸 보겠다고?”

“별로세요? 근데 한 번만 같이 봐주면 안 돼요? 진짜 재미있어요! 장담할게요!”

열심히 어필해서 긍정의 대답을 받아낸 지안은 망설이지 않고 영화를 선택했다. 이윽고 90인치의 사이즈를 우습게 만드는 거대한 신상 TV 화면 위로 배우들의 열연이 쏟아졌다.

요란한 소리, 화려한 움직임. 영상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생생한 장면은 저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건 그냥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거듭 당부하는 지안의 설명 덕분에 악시온은 좀비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대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영화에 몰입한 지안을 살필 수 있었다.

흥미로운 영상이었지만, 영화보단 지안의 반응을 살피는 게 더 재미있었다. 기습적으로, 때론 극적인 등장을 한 좀비가 사람을 물 때마다 지안은 튀어오를 듯 놀라길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악시온은 지안을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정말 겁에 질린 듯한 감정이 느껴지며 붙잡은 손이 차가웠다.

“저걸 꼭 봐야만 하는 건가? 그만 보는 게 좋겠다.”

“어…… 너무 고어해서 그러세요? 그럼 전 방에 가서 핸드폰으로 볼게요.”

“내 말은, 그대를 위해서라도 보지 않는 게 좋겠단 말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일리아스 역시 말을 보탰다.

“공작의 말이 맞다. 그렇게 겁먹을 거면서. 왜 저런 잔인한 걸 보는 거냐.”

“음. 그게, 혼자선 무서워서 못 본단 말이에요. 누가 같이 봐 주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데……. 스토리 괜찮지 않아요? 나름 블록버스터급 영화인데. 그리고 저거 다 연기잖아요. 저기 나오는 좀비도 다 배우들이 분장한 거예요.”

“실제로 있는 몬스터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요. 당연하죠. 세상에 좀비가 어디 있어요. 게이트에서 수많은 몬스터가 나왔지만, 그중에서도 좀비는 여전히 없는걸요. 저건 특수분장이고, 저기 나오는 좀비들 전부 살아 있는 연기자예요.”

곧바로 특수분장을 검색해서 보여 주자 일리아스의 얼굴이 떨떠름히 구겨졌다.

“네 세계엔 이상한 게 너무 많다.”

“기왕이면 흥미로운 게 너무 많다고 해 주세요. 정 보기 싫으시면 다른 영화 보실래요? 딴 거 골라드릴까요?”

“됐어. 보아하니 정말 겁먹은 게 아니라. 그냥 긴장감을 즐기는 거군. 그런데 너, 저런 취향이었나? 겁 많고 조심성 많으면서 정작 보는 건 왜 저런 건지…….”

“무서운 게 많은 사람일수록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법이에요.”

반박하며 멈춰둔 영상을 다시 재생시킨 지안은 이내 영화에 푹 빠져 버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악시온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일리아스는 내내 그것을 노려보았지만, 차마 둘을 떼놓지 못했다.

자신이 뭘 붙잡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 한 채 화면에 한껏 집중한 지안은 두 시간 무렵의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야 하품과 함께 긴장을 풀었다.

“전 이제 들어가서 자야겠어요. 두 분도 그만 주무세요.”

“잠깐만. 나는 저걸 보고 싶다.”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리모컨을 조작해 그가 말한 영화를 틀어 주었다. 그가 고른 건 실제 에스퍼가 배우로 나와 화제가 된 각성자 러브 스토리 영화였다.

“됐죠? 전 이제 잘게요.”

“잠시만 같이 보고 가. 보다가 묻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단 말이다.”

“졸린데……. 알았어요. 같이 봐요. 근데 저 보다가 잠들지도 몰라요.”

보다가 잠들어도 괜찮았다. 그보단 그냥 지안을 붙잡아두는 게 본래 의도였으니까.

그저 지안을 붙잡아둘 수단으로 선택한 영화였기에, 일리아스는 사실 영화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리아스는 얼마 안 가 영화에 무섭게 집중하고 말았다. 이는 악시온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재미있어진 건 지안이었다. 그저 그런 흔한 공식의 로맨스 영화인데 뭐 저리 심각한 얼굴로 보는지……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재밌고 우스웠다.

하지만 재미도 잠시, 밀려오는 졸음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방에 가서 자야 하는데…….’

하지만 일어나기가 너무 귀찮다. 감기는 눈꺼풀과 씨름하던 지안은 결국 일리아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었다.

* * *

삑삑거리는 알람음이 조금씩 잠을 깨웠다. 지안은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아 더듬거렸다. 하지만 알람을 끄기도 전에 콰직! 하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지안은 잠결에 씩 미소 지으며 가까이 있는 바디필로우를 끌어안았다. 편안히 팔다리를 걸치고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따끈하고 탄탄하고 딱딱하…… 잠깐, 딱딱?

반짝 눈을 뜬 지안은 자신이 거실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소파는 아니고 앞서 준비해 둔 토퍼 위에.

문제는 샌드위치의 계란이라도 된 것처럼 앞에는 악시온이, 뒤에는 일리아스가 자신을 껴안고 있단 점이다. 등과 허리를 각기 껴안은 팔도 그렇고 마구잡이로 얽어진 다리까지…… 그냥 영화를 보다 잠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경악하는 지안의 뺨 위로 짧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좀 더 자라.”

다정히 눈을 감겨 주는 손길에 지안은 그대로 다시 잠들 뻔했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더. 딱 오 분만 더 자고 일어나자.

그런데…… 핸드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었나? 뭔가 콰직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의문한 지안은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 액정이 무참히 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내 핸드폰! 이거 어제 샀는데!”

때아닌 소란에 일리아스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은 일리아스는 지안이 울상을 지은 걸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왜 그러는 거냐.”

지안은 대답 대신 부서진 핸드폰을 내보이며 물었다.

“이거. 누가 이랬어요.”

울상 어린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난 아냐.”

빠르게 부정한 일리아스는 곧바로 범인을 알아차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는 공작의 태도는 이미 범행을 시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지안 역시 곧바로 악시온의 소행이란 걸 눈치챘다.

“이거, 공작님이 그러셨죠.”

“그게…….”

“대체 방심할 수가 없네. TV에 이어서 핸드폰까지 깨부수면 어쩌자는 거예요?”

“갑자기 소리가 울리기에 그대가 깰까 봐 당황해서…… 그래서 손이 먼저 나갔다. 미안하다.”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사과해오는 모습에 지안을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몰라서 한 일이니 더 화를 낼 수도 없고……. 별수 없다. 최대한 지구의 신문물에 적응시키는 수밖에.

핸드폰이야 새로 사면 되지. 여하간 잠기운은 다 날아갔다.

“하아.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그런데 두 사람…… 눈이 왜 그렇게 부었어요? 치킨 먹고 자서 그런가?”

지안의 말에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전날 밤 비극으로 끝난 각성자 로맨스 영화 때문에 나란히 꼴사납게 울다 잠들었단 건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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