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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148/199)

149화

이윽고 가구점까지 안내를 마친 쇼퍼가 아쉬워하며 돌아가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일리아스가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여긴 대체 무슨 곳이길래 이렇게 물건이 많지?”

“백화점이요. 상점가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오면서 보셔서 알겠지만, 음식도 팔고 가구도 팔고 전자기기랑 옷도 팔아요. 명품이랑 보석. 가방. 신발 등등…… 필요한 건 거의 이 안에 다 있어요. 신기하죠?”

“신기하긴 하군. 밤인데도 낮처럼 환하고……. 방금 우리가 이용했던 저 움직이는 계단은, 마법사들이 만든 건가?”

그가 할 법한 질문에 지안은 웃으며 답했다.

“에스컬레이터란 거예요. 마법이 아니라 전기로 움직여요.”

“전기?”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이에요. 물건을 움직일 수도 있고 빛도 켤 수 있어요. 마법이 아니고 과학이라는 건데…. 흠. 생각해 보니 두 분께 제 세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드릴 여유가 없었네요. 집에 가서 알려드릴게요. 쇼핑도 할 만큼 했으니까 침대만 사고 집에 가요. 가서, 이번엔 진짜로 치킨 시켜드릴게요.”

활짝 웃는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지안의 미소가 이곳에 오고부턴 멎질 않았다. 알게 모르게 날이 서 있던 태도와 말투 역시 크림처럼 부드럽고 온화해졌다. 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선명한 변화에 일리아스는 정작 하고 싶었던 질문을 삼켰다.

‘죄송한데. 제 애인이라서요.’

공작에게 접근하는 여자를 향해 날을 세우는 지안의 모습에, 이어진 애인이란 주장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게 네 선택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똑바로 묻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보아도 무슨 말이냔 추궁 대신 여기가 어디냔 엉뚱한 질문이 나오고, 진심으로 한 말이냔 말 대신 움직이는 계단이나 물고 늘어지게 된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물어볼까 하다가도 혹시나 지안의 입에서 공작이 좋다는 말이 나올까 봐, 자신의 질문이 모든 걸 확정 짓게 될까 봐 무서워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 망설임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파장으로 드러나는지도 모른 채 한발 앞서서 공작과 나란히 걷는 지안을 응시했다.

그런데 돌연 지안이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덥석 손을 붙잡아왔다.

“전하. 피곤하세요? 그만 돌아갈까요?”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지안의 말과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특유의 기운에 동요하던 마음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일리아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손을 마주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다.

속이 애타게 끓었지만, 한순간의 질투로 지금의 평화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안이 웃는 걸 보고 싶었다.

* * *

쇼핑백을 거실 구석에 내던지고 소파에 드러눕자 기다렸단 듯 피로가 몰려왔다. 긴 하루였다. 생방송을 막았고, 징계위원회에 불려갔고, 신새벽과 실랑이까지 했다. 스트레스 해소를 핑계로 백화점을 몇 번이나 돌았더니 발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앱을 켜 치킨 주문을 마친 지안은 곧바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당일 배송 당일 설치라더니 그새 새 TV가 집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대로 소파에 앉아 쉬면서 치킨이 배달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원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이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혹시나 공작님이 또 TV를 부수기라도 하면…….’

그런 참사가 또 일어나게 할 순 없다. 지안은 몸을 일으켜 앉은 후 바로 양옆의 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두 분 다 여기 와 앉으세요.”

지안의 지시에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한 두 사람은 이제 익숙하단 듯 이어진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자. 보세요. 이건 리모컨이란 거구요. 저건 TV란 거예요. 백화점에서 저 네모난 화면 위로 영상들이 올라와 있는 거. 전부 보셨죠? 여기 전원 버튼을 누르면, 짠! 저렇게 화면이 켜져요. 대충 너튜브랑 비슷한 거예요. 영상석요. 아시겠죠?”

마침 흘러나오는 뉴스에선 앵커가 곧 있을 대선주자들의 정치 스캔들에 대해 언급하는 중이었다. 정확한 발음으로 세간의 이슈들을 정리해 알려주는 아나운서의 말을 유심히 듣던 일리아스가 물었다.

“저 보좌관의 일은 네게 날씨와 정보를 알려 주는 건가?”

“음. 우선 저 사람은 보좌관이 아니라 방송사 대표 아나운서고, 뉴스는 누구나 볼 수 있어요. 제게 보고한다기보단 그냥 세간의 정보를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알리는 게 저 사람의 일인 거죠.”

이어진 질문은 공작님에게서 나왔다.

“궁금한 게 있다. 대통령은 뭐고 투표는 또 뭐지?”

“대통령은 황제 폐하 같은 거예요. 한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수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뭐? 황제를 투표로 뽑는단 말인가?”

화들짝 놀라는 일리아스의 반응에 지안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한국은 신분 구별 없이 모두가 평등한 나라예요. 따라서 투표엔 모든 국민들이 참석하고, 저 역시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요. 내키면 정치후원도 할 수 있고.”

“투표로 황제를 뽑는다니 이해할 수 없다. 네 나라엔 혈통과 정당성이 없단 말인가?”

“혈연 지연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단 실력이 우선이죠. 이곳 사람들은 능력 없는 통치자가 독재를 펼치며 나라를 망치는 것보단, 자질과 인성이 검증된 사람이 나라를 대표하고 이끄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바로 그 민주주의 사상으로 움직이죠.”

최대한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었지만 이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았다. 아무렴 태생 자체가 황족인 사람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충격적인 사상이겠지.

잠시 고민한 지안은 거실 한구석에 놔둔 쇼핑백을 뒤져 사과패드의 포장을 뜯었다. 태블릿에 너튜브를 설치한 뒤 일리아스에게 내민 지안은 적당한 영상을 검색한 뒤 일리아스의 손에 들려 주었다. 연관 동영상 설정과 검색 방법을 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받으세요. 바로 민주주의 사상을 이해하실 순 없을 테고, 역사부터 차근차근 살피는 게 좋겠어요. 이를테면 전쟁사 같은?”

전쟁사란 말에 은근한 관심을 보이던 악시온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전쟁기록물이 있단 말인가?”

“물론이죠. 최신 국방 전략 같은 건 공개되지 않지만, 그것도 10년간의 기밀 유지 기간이 지나면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고 보니 게이트에서 사용 가능한 개량 미사일 가방이 개발되었다던데…….”

중얼거리며 지안은 사과패드를 또 하나 뜯었다.

“전쟁사에 관심 있어 하시는 걸 보니 공작님은 게이트 공략 전술? 이런 것도 좋아하실 것 같네요. 각성자 너튜버가 많이 늘어서 게이트에 사용하는 신무기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거든요.”

너튜브 설치와 검색까지 마친 뒤 공작님께 사과패드를 건네주는데 띵동 소리와 함께 벨이 울렸다. 치킨이 왔구나! 지안은 반색하며 카드를 챙겨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안녕하세요 맛초치킨입니다. 간장 양념 하나랑 마라 맛 치킨 주문한 거 맞으시죠?”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들뜬 목소리로 배달 기사를 배웅한 지안은 곧장 거실로 돌아와 좌식 테이블을 펼쳤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좌식 테이블이었지만, 구석에 둔 이것까지 방문 가정부님의 손길이 닿은 건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앞접시에 젓가락과 포크, 그리고 콜라를 따라 먹을 컵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지안은 경건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동시에 확 퍼지는 향긋한 기름 냄새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하. 이게 얼마만의 치킨이야…….”

치킨무를 뜯고 치즈볼 상자까지 활짝 열어젖힌 지안은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손에 젓가락과 앞접시를 하나씩 들려 주며 말했다.

“드세요. 이거 맛있어요!”

오늘 본 중에 손꼽을 정도로 행복함을 양껏 드러내는 모습에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어리둥절해하며 치킨을 입에 넣었다. 조리된 형태를 보아 조류임이 분명한데 짭조름하고 달달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육질이 환상적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닌데도. 자꾸만 입에 들어갔다.

“헉, 악시온! 그쪽은 조금 매운 건데 괜찮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네요. 악시온도 어색하진 않으시죠?”

“물론이다.”

못내 기뻐하며 대답한 악시온은,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대만 좋다면… 애칭으로 불러도 된다.”

“애칭이요?”

“어머니는…… 나를 시온이라고 불렀다.”

“예쁜 애칭이네요. 자. 시온. 치킨만 먹지 말고 여기 콜라랑 같이 드세요.”

지안의 입에서 나온 시온이란 애칭이 너무도 달콤해 악시온은 무심코 콜라를 받아들었다. 괴상한 기포가 올라오는 검은 액체는 한눈에 봐도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달달한 향기가 올라오긴 했으나 독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불길한 검은색을 띨 리 없었다.

“얼른 마셔 봐요.”

하지만 지안이 준 것이었다. 거기다 마셔보라는 종용까지 더해졌다. 탈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마셔야 한다. 왜냐면, 지안이 그걸 원하니까. 결심을 마친 악시온은 질끈 두 눈을 감은 채 콜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러자 기름져 있던 입안이 순식간에 기포에 씻겨 내려가고 신비로운 단맛이 혀를 적셨다.

“……이건, 대체?”

“맛있죠?”

“그런 것…… 같다.”

애매한 긍정이었으나 놀란 표정으로 콜라를 조심스레 홀짝이는 걸 보니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지안은 뿌듯함을 느끼며 일리아스에게도 콜라와 치즈볼을 권했다.

“전하도 드셔보세요.”

“…내 이름은 아직 익숙하지 않나?”

“네?”

“게다가 공작은 애칭으로 불러주면서…….”

불만스러운 표정과 뒤이어 느껴지는 파장에 지안은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아이참!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자. 일리아스. 이거 먹어 봐요. 치즈볼에다 소스 찍어서 먹으면 진짜 끝내줘요. 힉스에서 먹었던 음식보다 더 맛있을걸요!”

말하다 말고 지안은 멈칫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제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던 힉스의 전경과 함께 활짝 웃음 짓던 금발의 황녀 전하가 떠올랐다. 언제 웃었냐는 듯 입매가 굳어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치킨을 눈앞에 두고 입맛이 이렇게 뚝 떨어져 버리다니…….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지안의 눈빛에 일리아스는 알만하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먹여 줘.”

“네?”

“너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어. 왜 하필 힉스 얘길 꺼내는 거냐. 공작과 힉스에서 얼굴을 맞대고 식사한 게 떠올라 버렸잖아.”

부러 짜증을 낸 일리아스는 치즈볼을 집어 들어 곧장 지안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니까 먹고 잊어버려.”

앞뒤가 맞지 않는 어색한 위로였지만, 뭘 잊어버리라고 하는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맨날 제멋대로인 사람이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지안은 덩달아 어색해진 채 입에 물려진 치즈볼을 우물거렸다. 입 안에 달콤하게 퍼지는 치즈로 마음의 동요를 지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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