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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147/199)

148화

말없이 협회를 빠져나온 지안은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신새벽에게 한 방 먹여서 기분이 좀 괜찮긴 한데, 그렇다고 잡친 기분이 아주 말끔해진 건 아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쇼핑이다.

식구도 늘었겠다. 사야 할 것도 널려 있겠다. 돈 쓰는 재미로 근심을 잊을 작정이었다. 이래저래 속이 시끄럽지만, 카드를 긁다 보면 곧 잠잠해질 것이다.

매달 나오던 가이드 수당이 날아갈 거라 생각하니 위가 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지만…… 이미 협회장 얼굴에 대고 각성자 협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수습은 불가능하다. 어차피 저질러버린 일. 잊어버리는 수밖에.

‘괜찮아. 이럴 때를 위해서 그간 모아둔 수당이 꽤 있으니까.’

하지만 협회장의 만행만은 도저히 잊어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붙잡은 연구소장과, S급 에스퍼인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를 노리고 뻔뻔하게 매칭률 검사를 하러 온 신새벽을 떠올리면…… 돈을 떠나서 탈퇴하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모든 일을 지시하고 백업 가이드를 운운한 협회장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였다면 몰래 게이트로 끌고 들어가 쓱삭 해치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협회를 상대로 이렇게 화를 낸 게 신기하기도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걸까.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안의 시선이 옆을 지키고 선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악시온, 일리아스. 저 잘렸어요.”

“어디 아픈가? 검으로 공격한 자는 없었는데…!”

심각한 표정과 엉뚱한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건 아니고, 일자리가 없어졌다구요. 이제 우리 일해서 돈 벌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난 네 옆에만 있으면 괜찮다.”

“나도 그래.”

한결같은 대답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것도 결국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 덕분이다.

“농담이에요. 제가 다 먹여 살릴 테니 걱정 마세요.”

분명 예전이었다면 발을 동동 구르며 막막해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굴욕적으로 협회에 머리를 숙였을지도 모른다. 안 봐도 뻔했다.

반면 지금은, S급 에스퍼인 악시온과 일리아스가 있다. 어느 길드건 두 손 펼쳐 환영할 게 너무 분명해서 딱히 걱정이 생기질 않았다.

거기에 더해 돈이라면 모자람 없이 있었다. 모아둔 수당을 다 쓰더라도 괜찮았다. 엄마 아빠의 목숨값이라는 생각에 손도 못 대고 놔두었던 유족 보상금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소소하게나마 주식이나 부동산도 없진 않다.

스트레스 해소를 외치며 지안은 거침없이 백화점을 누볐다. 일시불로 TV도 더 큰 걸로 사고, 신상 사과패드도 구입했다. 두 사람이 쓸 스마트폰도 추가로 두 개 더 개통했다.

그다음으로 한 건 옷 쇼핑이었다. 앞서 한 차례 입을 옷을 사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매일 트레이닝복과 패딩만 입힐 순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속옷부터 양말까지 싹 구입해야 하는데, 이런 다양한 품목 면에선 백화점이 단연 최고였다.

그렇게 한참 쇼핑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들뜬 얼굴로 쇼핑을 도와주던 쇼퍼 분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번 시즌 신상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에요.”

“맞아요. 진짜 분위기 미쳤어……. 이거랑 이것도 입어 보세요. 넥타이로는 이게 어떨까요? 연보라색 베이스에 코랄색 로고 패턴을 넣어서 포인트로 손색없을 거예요!”

꺅꺅거리며 이 옷 저 옷을 내미는 쇼퍼들의 추천을 지안은 가리지 않고 다 받았다. 적당히 거절할까 싶어도 입히는 것마다 워낙 옷이 잘 어울리니 통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가. 뭘 입혀도 옷태가 살아서 이것저것 입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스포츠웨어부터 캐주얼룩에 정장까지 안 어울리는 게 없었다. 어찌나 찰떡같이 옷을 소화시키는지, 어릴 적 즐겨 했던 인형놀이를 다시 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입어 본 거 다 살게요. 음 그리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사이즈 통일해서요.”

“헉! 네! 넵! 얼른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양이 좀 많아서 쇼핑백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마침 저희 백화점이 고객님들 댁으로 바로 배송해드리는 서비스도 겸하고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배송해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근데 이렇게 되면…… 옷장이나 행거를 하나 더 사야 하나?”

“마침! 저희 백화점 지하 2층에 가구점들이 입점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친절을 넘어서 열성적이기까지 한 직원의 서비스에 지안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보단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얼굴을 더 구경하는 게 진짜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렇게 열성적으로 나오는데 거절하기도 우습다.

“부탁드릴게요.”

계산을 마친 지안은 곧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로 싹 옷을 입혀 놓아서 그럴까? 고작 매장에서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짧은 거리인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꽂혔다.

다들 어찌나 노골적인지, 심지어 한눈에 반한 얼굴로 삼황자 전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도 있었다. 동성도 홀리게 만드는 외모라니. 모자나 선글라스라도 좀 사 줘야 하나…….

바로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연예인 뺨치게 생긴 여자가 성큼 악시온 앞으로 다가왔다.

“흠. 저기. 제가 이런 말은 잘 안 하는데…… 혹시 괜찮으면,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핸드폰을 내미는 여자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지안은 경직된 얼굴로 악시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불같은 견제심리가 대체 어디서 솟아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죄송한데. 제 애인이라서요.”

내뱉은 직후 지안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에스퍼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애인이라고 말하다니…….

“애인? 아. 이런, 미안해요. 근데…… 혹시 헤어지면 연락 줘요.”

당황도 잠시, 이내 기가 막혔다. 애인이라고 밝혔는데도 눈을 찡긋하며 명함을 꺼내 들고 그걸 당당히 내밀다니?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대응이고 뭐고, 어처구니 없이 명함이 내밀어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는데 악시온의 팔이 목에 둘러졌다.

“내 애인이 싫어해서. 그냥 가 줬으면 좋겠군.”

그 말과 함께 턱이 살짝 들어 올려지며 이마와 정수리 사이에 입맞춤이 떨어졌다. 지안은 2차로 당황하며 자신의 목에 닿은 악시온의 팔을 끌어내렸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만하세요.”

“보라고 한 거다.”

그쯤 되자 헌팅을 하던 여자도 한숨과 함께 물러났다. 실례했다고 말하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지안은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일련의 상황을 옆에서 몽땅 지켜본 직원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두 분이 애인이신 줄은 몰랐어요. 어떡해. 남자친구분 진짜 로맨틱하시다…….”

지안은 대답 대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는 악시온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눈이 부실 만큼 멋있긴 했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올블랙 정장이 무슨 명품 수트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 잘 어울렸다. 그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명함을 들이대던 여자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가긴 한다.

“그러면 이쪽 분은 친구분이신…?”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 전까지 두 사람에게 이것저것 잔뜩 사다 안긴 바람에 상황이 조금 애매해진 것 같았다. 지안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조용히 자신이 가이드임을 밝혔다.

“아, 그러면 두 분이 에스퍼… 앗 혹시! 이번에 새로 나타났다는 S급 에스퍼분들 아니세요?”

표정을 보니 거의 확신하고 물어보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 진짜구나! 기사 봤어요! 좀 흐릿하긴 한데 사진도 있긴 했거든요. 여기, 이거 보세요. 각성자 팬카페에서 반응이 엄청 좋아요!”

그 말대로, 직원이 내민 핸드폰 화면엔 초점이 어긋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생방송을 망치기 직전, 일리아스가 기자회견장 출입구 앞에서 자신을 껴안던 모습이었다.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기사의 댓글을 확인했다.

근데 어떻게 된 일인지, S급 에스퍼가 나타난 것에 대한 흥분보단 다른 쪽으로 흥분한 사람이 더 많았다.

└ 세상에 천사다 천사. 천사가 강림했다.

└ 어떡해…… 내 남친이 오징어로 보여 ㅠㅠ

  └ 222 헉헉. 사진 더 없나요?

  └ 333 가이드 갑질만 아니었어도 저 얼굴 생방송으로 봤을 텐데… 엉엉… ㅠㅠ

└ 저 얼굴이면 매일 아침 구첩 밥상 차려줘야 해도 좋아. 나랑 결혼해줘요!

  └ 웃기는 소리 마라. 가이드는 무슨 가이드? 내 남편이거든?

    └ 네 다음 주작.

└ 세상에 평화를 불러오는 얼굴인데 옷차림은 왜 중세 코스프레임? 내가 모르는 신상 게이트 특수복인가?

└ 미모가 완벽을 넘어 갓벽하다!

  └ 갓벽하면 뭐 하나. 에스퍼는 다 가이드 차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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