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5/199)

146화

제가 듣기에도 냉정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눈앞의 사람들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중 가장 놀란 건 연구소장이었다. 늘 조용하던 지안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지안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아랑곳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저 역시 협회에 입힌 피해에 대해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에스퍼가 그러더라고요. 기자회견도 방송도 승낙한 적 없다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빨리 올 거라기에 이동한 것뿐이라고요. 가이드인 절 팔아서 협상을 시도하시다니. 제정신이십니까? 각성자를 보호해야 할 협회에서, 보호는커녕 등급이 높다는 이유로 무작정 방송에 에스퍼를 내보내시면 어떡합니까?”

“…….”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제가 딱 그랬었죠. S급 가이드로 확인되자마자 생방송에, 뉴스에, 아무런 사생활 보호도 없이 노출됐어요. 그런 일을 겪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지금 논의해야 하는 주제는 그게 아닐 텐데? 듣자 듣자 하니 말을 참 이상하게 하는군. 생방송에 큰 피해라도 입은 것처럼 말하는데. 아무도 지안 씨한테 피해 준 적 없어.”

“아무도 제게 피해 준 적 없다고요? 지난 몇 년간 제가 봐 왔던 기사들은 뭔가요 그럼? 너튜브에 아직도 ‘S급 가이드의 굴욕’이란 영상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협회 차원에서 제재나 신고 한 번이라도 하신 적 있으십니까?”

“……말이 안 통하는군. 됐어. 이번 일은 가이드 수당을 삭감하는 걸로 마무리하지. 그리고, 일리아스랑 악시온이라고 했던가? 두 사람에겐 다른 전담 가이드가 배정될 겁니다.”

협회장의 말에 내내 좌불안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구소장이 놀라며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협회장님. 매칭률도 그렇고 이미 각인까지 다 마친 상태입니다. 가장 높은 효율을 보이는 가이드 외에 다른 사람을 전담 가이드로 배정하는 건…….”

“압니다. 근데, 에스퍼들 원래 백업 가이드 여럿 두기도 하잖습니까? 전담 자리는 다른 가이드한테 주고 여지안씨는 백업으로 돌리세요.”

“하지만 각인까지 한 사람을 백업으로 둘 수는…….”

연구소장이 쩔쩔매며 뭐라고 말하려는 걸 보다 말고,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자 듣자 하니 더는 들어줄 수가 없네요. 협회 탈퇴하겠습니다.”

“뭐?”

“백업 가이드나 하란 모욕,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더는 협회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겠다는 판단이 서네요. 알아서 사설 길드에 가입하거나, 국적 바꾸고 미국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얼굴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기막히군. 어디 가 봐!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협회라 여태 봐준 거지. 너 같은 반푼이 가이드 받아 주는 길드가 있을 것 같아?”

지안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다. 일리아스가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협회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뭐라고 왁왁 소리치는 건 보이는데……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그가 미친 듯이 화를 내다 말고 갑자기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단 거다. 보아하니 공작님이 협회장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뭐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그리고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어디 창문이 열렸나?

잠깐, 아니구나. 이거 지금 협박하는 거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협회장이 저토록 공손하고 필사적일 얼굴일 리 없다.

지안은 수습을 위해 두 귀를 막은 일리아스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이거 놔 주세요.”

요청을 받아들인 일리아스가 손을 치워주자 공작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안을 모욕한 것은 나를 모욕한 것과 같다. 오데르겐의 이름으로 즉결 처형하겠다.”

뭐? 처형이라니! 설마 내가 아는 그 처형은 아니겠지?

하지만 의문하기 무섭게 공작님의 손이 검 손잡이 근처에 가 닿았다. 세상에. 맞구나, 그 처형! 지안은 서둘러 악시온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하. 처형이라니. 그런 무서운 농담 마세요. 아무튼 물의를 빚어 죄송하고, 그간 감사했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식겁하며 상황을 수습한 지안은 본관을 벗어난 뒤에야 악시온을 닦달할 수 있었다.

“공작님. 처형이니 뭐니 여기서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왜 안 되나? 그자는 그대를 위협하고 모욕했다.”

“모욕은 당했는데 위협은 안 당했어요. 그리고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니 마니 하면 안 되죠.”

“하지만…… 그대 앞에서 언성을 높였잖나.”

“그래도. 언성 좀 높인 걸로 그러시면 안 돼요. 그보다 협회장이 뭐라고 했어요? 협회장이 뭐라 말하는 걸 보긴 했는데. 전하가 제 귀를 막으셔서 하나도 못 들었어요.”

“한국 내에서 각성자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제재하겠다더군.”

“그리고요?”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해도 좋냐고 묻길래 상관없다고 답했다.”

그렇구나. 근데 이것뿐이라기엔 대화가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은데.

“정말 그것뿐이에요?”

“회유를…… 하려고 했다.”

“회유? 어떻게요?”

“더 좋은 가이드를 붙여 주겠다더군. 하지만 내게 가이드는 그대뿐이다. 정말이다.”

쩔쩔매며 대답하는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안 씨! 잠깐만, 잠시만 기다려!”

돌아보니 허겁지겁 달려 나온 소장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협회장님이 사과하신다고 했어! 탈퇴는 좀 철회해주라. 응? 징계 철회하신대!”

“……번복은 없어요.”

“지안 씨. 협회장님이 욱하는 분인 거 잘 알잖아. 그러지 말고 좋게좋게 넘어가자. 응? 게이트에서 생환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민이 쉬운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지안 씨가 그래 버리면, S급 에스퍼 나타났다고 기뻐한 국민들은 뭐가 돼.”

“하. 국민 좀 그만 파세요. 사람들은 제가 협회 소속이건 길드 소속이건 아무 관심 없어요.”

“마음 상한 거 알아. 협회장님이 막말한 거 전부 보고 들었는데 나라고 왜 모르겠어. 그런데, 그렇다고 이대로 가 버리면 어떡해. 아. 그래! 매칭률 검사도 아직 제대로 안 해 봤잖아. 각인 후유증 없는지도 살펴봐야 하고. 탈퇴할 때 하더라도 아직 못 받은 검사라도 좀 받고 가. 응? 검사 확인서 서류도 전부 챙겨 줄게! 나중에 길드에 들어가거나 하려면 꼭 필요한데. 갈 때 가더라도 서류는 챙겨가야지.”

필사적으로 말리는 소장의 말에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야 뭐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데. 마침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했다.

* * *

지안이 연구소장에게 요구한 건 가이드 등급 재검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궁금증을 풀기 위한 마음으로 임한 재검사 결과는 예측을 훨씬 뛰어넘고 말았다. SS급 가이드로 등급이 한 단계 더 상승되었단 것이 공식 확인된 탓이었다.

성축일날 재각성을 하면서 등급이 상승한 것 같다 싶긴 했지만 정말로 가이드 등급이 오를 줄이야……. 지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결과지를 받아들었다.

유례없는 결과에 잔뜩 흥분한 책임 연구원이 소리쳤다.

“이 결과가 사실이면, 이론상으론 에스퍼 수백 명을 혼자서 다 가이딩해 줄 수도 있어요! 각인도 마찬가지구요!”

“황 책임 말이 맞아! 어쩐지, 어제 S급 에스퍼 둘을 각인했는데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싶었어!”

“힘들어야 정상인 건가요? 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당연히 힘들죠! 각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가이드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세상에, 최초의 SS급 가이드가 한국에서 나올 줄은! 앗. 잠시만요. 추가로 한 매칭률 검사 결과도 지금 나왔네요. 어디 보자. 매칭률이 100%… 응? 내가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서 검사 결과지를 다시 확인한 연구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 결과가 왜 이렇지? 이럴 리가 없는데? 기기 고장도 오류도…… 없는데? 이상하다? 세 분 다 검사 다시 해 봐야겠어요.”

책임 연구원의 주장에 따라 재검사를 다섯 번이나 더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덕분에 지안은 에다의 신관이 알려 준 대륙의 신화를 잠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마인이었지만, 스테아가 자신의 힘을 거두어 가면서 마인들 모두 능력자로 전락했다 했던가. 원래 하나의 힘이었다 치면 100%가 나오는 게 이상하진 않다. 빛바랜 이야기 같은 신화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잠시 이어졌다.

그러나 회상도 잠시, 쉴 틈 없이 추가 검사가 이어졌다. 심심하진 않았다. 반복되는 검사에 지루해하는 표정을 짓자마자 곧바로 태블릿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카페에서 사 온 커피에다 간식까지 있었다.

전부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수작이란 걸 뻔히 알 수 있었지만, 백업 가이드 운운한 게 소장도 아니고… 눈치를 보는 다른 연구원들 때문에라도 더 매몰차게 굴기가 어려웠다.

별수 없이 흥미 위주로 한참 너튜브를 탐방하고 있는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였다.

“두 분, 같이 보실래요?”

“……그래도 괜찮은가?”

“네. 뭐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잠시 고민한 뒤 곧바로 너튜브 섬네일 중 하나를 골라냈다. 그런데 골라낸 영상이 하필, 오늘 협회에서의 망한 생방송을 소스로 해서 만든, 소위 국뽕 너튜버의 동영상이었다.

꼭 이걸 봐야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대에 찬 얼굴을 마주하니 차마 딴 걸 고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삼황자 전하마저 공작님의 선택에 이견이 없어 보였다. 지안은 별수 없이 영상을 터치해 틀어 주었다.

화면 위로 영상이 재생되자 일리아스가 물었다.

“그전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네가 가진 것과 이 금속 상자, 몹시 유사하게 생겼군. 둘 다 영상석인가?”

“제가 가진 건 스마트폰이고. 그건 사과패드란 거예요. 둘 다 영상석보다 더 다양한 기능을 해요. 영상은 주로 너튜브 앱을 통해서 보는 거구요.”

“너튜브?”

“흠. 그러니까 너튜브가 뭐냐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앱 플랫폼인데…… 음. 일종의…… 수백 개의 영상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실 거예요.”

“대단하군. 황성에도 이런 건 없는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몇 차례나 영상을 돌려보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아예 사과패드를 줘 버렸다. 저렇게 흥미로워하는데, 난 그냥 핸드폰이나 하지 뭐.

그런 마음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팔에 파장 감지패드를 새로 부착해 주던 연구원이 돌연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태블릿 하나 더 드릴까요?”

그의 시선을 쫓아 옆을 본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태블릿 하나에 애처롭게 붙어 있는 두 남자를 보니 하나 더 있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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