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4/199)

145화

카드를 내밀자 쇼핑을 도와주던 점원이 슬쩍 물어 왔다.

“저어, 혹시 각성자세요?”

“네? 네.”

“그렇구나. 어쩐지 저분들 몸이 너무 좋으셔서. 딱 봐도 각성자 같았어요! 저희가 마침 각성자 분들께 20% DC를 해 드리는데! 등록증만 있으면 되거든요!”

“감사한데 게이트에서 등록증을 잃어버려서 곧 재발급받을 예정이에요. 그러니 그냥 계산해 주세요. 옷은 저대로 입고 가도 되죠?”

“그럼요. 근데 남은 옷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옷이 좀 특이하던데…….”

“가져갈 수 있게 따로 담아주세요.”

“네. 아참,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최근에 출시된 롱패딩인데 마침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잖아요. 저희 브랜드에서 에스퍼 모델 기용해서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신상이거든요. 입어 보시면 진짜 맘에 드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점원의 얼굴은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딱 고정되어 있었다. 지안은 영업의 대상에서 제외된 채로 떨떠름하게 점원이 손으로만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세상에 신상 롱패딩을 서비스로 주는 매장이 어디 있나. 사심이 넘쳐도 너무 넘쳤다.

하지만 주겠다는데 안 받기도 우습고. 이 브랜드의 롱패딩 가격을 생각하면…….

그래. 날이 쌀쌀해지는 것도 사실이고, 곧 겨울이다. 기왕 주는 거 받아서 살림에 좀 보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TV 부숴 먹은 걸 이런 데서 만회하는구나. 그냥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치자.

하지만 서비스의 행렬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매번 단골로 이용했는데도 서비스 한 번 없던 돼지갈비 식당에선 추가 반찬과 고기가 계속해서 나왔고, 식후 커피를 위해 들른 카페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케이크 서비스를 받았다.

‘돈이 굳어서 좋긴 한데….’

지안은 눈을 굴렸다. 카페 알바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어째 카페에 손님이 자꾸 늘어나는 건 내 착각인 걸까? 커피를 마시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친 몇몇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거나 도발적으로 노려보는 걸 보니…… 착각은 아닌 듯싶었다.

‘허 참….’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잘난 외모야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지만 예전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었는데. 장소가 바뀌어서 그럴까, 고작 트레이닝복에 바람막이 차림인데도 여느 브랜드 모델 못지않다.

‘나중엔 정장이라도 한 벌씩 사 줘 볼까….’

그 때였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가 술렁였다.

“야. 봤어? 저 사람, 창성 길드장 이환 아냐?”

“대박…… 나 실물은 처음 봐!”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드니 사람들의 말대로 이환이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등 뒤엔 협회 사람이 둘이나 붙어 있었다.

“가이드 여지안. 협회 긴급 호출이다.”

그 말과 함께 이환의 시선이 차례대로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가 닿았다. 그새 기사라도 찾아본 건지, 창성의 길드장답지 않은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지안이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협회 호출이라니. 무슨 이유로요?”

“네 징계위원회가 열렸어.”

“징계? 사유는요?”

“아직 격리 해제조치도 안 끝난 에스퍼들을 네 맘대로 데리고 나간 것.”

“하. 위험할지도 모르니 격리하겠다던 에스퍼를 기자회견장에 대놓고 내세우려고 한 주제에…… 핑계 좋네요. 정말 위험했으면 협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했을 거 뻔히 아는데. 왜들 그렇게 솔직하질 못하지? 생방송 망친 죄로 불러오는 거면서.”

지안의 말투는 숫제 냉랭했다. 협조적이지 못한 태도에 이환의 대응도 날이 섰다.

“알면 얌전히 따라와. 협회장이 더 지랄하기 전에. 모처럼 나타난 S급 에스퍼가 둘이나 돼서 몸이 달아 기자회견 준비했는데. 너 때문에 개망신당했다고 난리도 아니야. 못마땅한 건 알겠는데 여태 가이드 수당 받고 살았으면 협조 좀 하지. 그리고 그동안은…… 운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 지난 과정이야 어쨌든. 매칭률이 나오는 에스퍼를, 그것도 S급 에스퍼를 둘이나 찾았으니 네겐 잘된 일이지 않나?”

잘된 일이라.

하긴, 표면적으론 그렇게 보일 거다. 몇 년간 매칭되는 에스퍼 하나 나타나지 않은, 써먹을 수 없는 S급 가이드가 이제야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됐으니 각성자 협회 입장에선 얼마나 감격스럽겠나.

하지만 어제 막 차원을 넘은 두 사람을 생방송에 내보내려 한 협회다. 이걸 따라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심하느라 대답을 미루는 사이 이환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가 이러고 있을수록 네 평판만 나빠져. 네게 에스퍼가 나타난 이상 대접도 입지도, 예전 같진 않을 거다. 징계위원회니 뭐니 해도 결국은 널 회유하려고 부르는 걸 테니 그만 버팅기고 일어나. 시간 없어.”

버팅긴다니. 단어 선정이 영 아니꼬웠다. 하지만 협회와 담판을 내긴 해야 했다. 가서 가이드 등록증도 갱신해야 하고 수납 못 한 병원비도 내야 한다.

그래. 어차피 가야 할 협회, 이렇게 데리러 와 줬으니 그냥 택시비가 굳었다고 생각하자.

“좋아요.”

수긍을 마친 지안은 카페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협회 소유의 차량에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른 일리아스가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네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지?”

“창성의 길드장 이환이고 S급 에스퍼예요. 이능은 얼음이고요. 음. 아무래도 말보단 영상이 더 좋겠네요.”

그 이상은 아는 것도 없거니와, 알더라도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백번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지안은 너튜브에서 이환을 소개하는 영상을 찾은 뒤 일리아스의 손에 들려 주었다.

뚱한 표정으로 너튜브 영상을 유심히 시청하던 일리아스는 영상을 보다 말고 하단의 연관 동영상을 눌렀다. 동영상 대표 화면에 지안의 얼굴이 나와 있는 걸 확인한 탓이었다.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하자, 지금보다 훨씬 더 앳된 모습의 지안이 화면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상 위, 난감한 표정으로 기사들의 질문 세례를 듣던 지안의 머리카락이 돌연 휘날리더니 곧 상공의 헬기에서 남자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잠시 헬기를 비추던 영상은 이내 지안과 이환이 악수하듯 손을 맞잡은 장면을 담았다. 누가 봐도 극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손을 붙잡은 이환은 곧장 얼굴을 구기더니 지안의 손목을, 팔을, 급기야 얼굴을 더듬듯 붙잡았다. 이내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네가 S급 가이드라고? 거짓말하지 마!

얼굴을 일그러뜨린 이환은 곧이어 지안의 손을 뿌리치며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소리쳤다. 뒤이어 영상 속 당황한 지안의 얼굴 위로 보란 듯 ‘S급 가이드 굴욕’이라는 자막이 달랐다.

졸지에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들켜 버리고 만 지안은 서둘러 일리아스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았다.

좀 더 빨리 뺏었어야 했는데. 당황 좀 했다고 동영상이 재생되는 걸 멍청히 보기만 하다니! 너튜브에 자신을 조롱하는 영상이 남아 있단 걸 알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뭐, 뭐 이런 걸 보고 그래요!”

“아니, 나는…… 네 모습이 나오길래…….”

당황한 일리아스의 모습에 짜증을 삼킨 지안은 ‘초등학생도 이해 가능한 각성자 상식’이란 제목이 달린 영상을 클릭한 뒤, 공작과 삼황자의 앞에 내밀었다.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이거나 보고 계세요.”

* * *

즉각 각성자 협회의 본관으로 소환된 지안은 착잡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대범해지려고 애쓰고는 있는데, 막상 징계위원회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생방송을 망친 걸 후회하진 않았다. 공작님과 전하를 제가 겪었던 것처럼 대중의 입을 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협회에서도 심한 제재나 징계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 싫은 소리 좀 듣고 말지 뭐.

징계위원회가 열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구소장과 협회장, 이외에도 각 부처의 장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왔군. 앉으세요.”

압박감을 느끼며 착석을 마치자 곧장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가이드 여지안 씨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각성자 발표는 협회에서 주관하는 일이라는 거, 모르진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짓입니까? 덕분에 생방송이 엉망이 됐습니다. 축하를 위해 방문하셨던 국회의원님들, 그리고 국방부 장관께서도 도중에 발길을 돌리셨고요. 이건 명백한 월권입니다.”

작정한 듯 비난하는 목소리가 매서웠다. 여러 사람의 앞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럴까. 습관처럼 위축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주먹 쥔 손등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악시온의 손이었다. 옆을 지키고 선 두 사람의 기척이 생생했다.

덕분에, 입을 뗄 용기가 났다.

“아직 신원도 파악 못 한 에스퍼를 보려고 장관까지 왔단 말인가요?”

“S급 에스퍼가 국가 전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협회장님 말이 맞습니다. 어딜 새파랗게 어린 게 가이드랍시고 나서서 생방송을 망쳐! 망치길! 그게 어떤 자린데!”

협회장을 도와 목에 힘을 주는 사무처장의 말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저 때문에 곤란하셨다니 유감입니다. 하지만, 방송에 대한 상식도 없는 사람들을 무려 실시간 생방송에 내보내려 한 건…….”

“지안 씨.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데, 당신 가이드야. 저 에스퍼들 보호자가 아니라! 여론 안정을 위해 고등급 에스퍼들은 대부분 공개 활동을 하고, 협회는 에스퍼 활동을 보조하면서 같이 상생하는 건데. 가이드가 돼서 이것도 모르나? 지금 몇 년차 가이드야?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어?”

쾅! 소리와 함께 테이블을 내리치는 협회장의 행동이 사뭇 위협적이었으나.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경험한 일들에 비하면 협회장의 보여주기식 압박은 가소롭다 못해 하찮을 지경이었다.

“생방송 망친 건 사과드립니다.”

“지금 이게 사과 가지고 될 일이야!?”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사과 말고, 제가 뭘 더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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