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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142/199)

143화

동선을 생각하며 움직인 덕분에 금방 주민번호도 되살리고 핸드폰도 개통할 수 있었다. 개통과 동시에 즐겨 사용하던 가사도우미 앱도 설치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먼지 쌓인 집이 싹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뒤이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모바일 메신저를 열자 주르륵 확인하지 못한 알람이 떴다. 가스요금 안내, 관리비 체납, 실종되어 있던 상태에서도 정기적으로 비용이 나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사람에게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하…….”

허탈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힘들게 돌아왔는데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다니. 인생을 헛살았다. 쓸쓸함을 커피와 함께 삼킨 지안은 클라우드에 들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의 사진을 확인했다.

몇 번 터치하자 활짝 웃는 얼굴, 같이 먹은 음식,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가서 찍었던 사진들이 주르륵 화면에 떠올랐다. 동영상도 몇 개 있었다. 무심코 하나를 누르자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안아! 이것 봐! 꽃게다 꽃게!

―호들갑 좀 그만 떨어요. 그게 뭐 그리 신기하다고…….

파도 소리와 투덜대는 자신, 하얀 거품과 모래알,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으로 라영 언니가 활짝 웃었다.

―이럴 때 기분을 내야지! 저거 봐. 물 엄청 맑다. 혹시 수영복 챙겨 왔어?

―전 수영 못해요.

―그래? 그럼 바다에 발이라도 담그자.

―싫어요. 수건도 없고 양말이랑 신발 다 젖는단 말예요.

―그럼 삼선 슬리퍼 사자! 요 앞에 편의점에서 파는 거 봤어.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게!

붙잡을 새도 없이 편의점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이 멈췄다. 지안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반겨주는 사람은 없지만, 그리웠던 건 되찾았다. 이제 더는 옆에 없는 사람이지만, 함께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실에 대응하기 급급해서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그리움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그 자체로 너무 괴로운 일이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으니 이젠 조금 덜 괴로워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늘 괜찮지 않다는 것만 재확인하며 끝나 버린다.

지안은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카페를 나섰다. 이제 그만 협회로 향하려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거리의 거대한 전광판 위로 헤드라인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뒤이어 영상 하단에 기재되기 시작한 자막에 지안은 얼굴을 굳혔다.

[속보입니다. 각성자 협회에서 미등록 S급 에스퍼 공개 기자회견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돌발성 게이트에서 생환한 에스퍼는 총 두 사람으로, 두 사람 다 S급의 에스퍼이며 이능은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합니다.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곧 있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질 예정입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곧 있을 대선 민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되었…….]

“……이게 무슨 개소리야?”

기자회견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앉혀놓고 뭘 하려는 거야 대체? 대체 누구 짓이지?

경악과 함께, 이런 짓을 꾸밀 만한 몇몇 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중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각성자 협회 협회장 최종만. 그 사람 짓인가?

지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 * *

협회 앞은 모여든 기자들로 이미 북새통이었다. 서둘러 택시에서 내린 지안은 모여든 기자들 사이를 헤집으며 협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잠시만 지나갈게요!”

양해를 구하며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지안은 곧바로 협회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런 지안의 앞을 보안요원이 가로막았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출입증 좀 보여주시죠.”

“출입증이요?”

“현재 생방송 예정이라 통제 중입니다. 미리 선정된 기자분과 관계자만 출입 가능합니다.”

“생방송이라니 맙소사……. 들여보내 주세요. 오늘 방송에 나오는 에스퍼. 제 에스퍼예요. 저는 전담 가이드고요.”

“죄송하지만, 전달받지 못한 사항이어서요. 입구가 혼잡하니 출입증 없으시면 비켜 주시기 바랍니다.”

완강한 보안요원의 말에 지안은 별수 없이 일리아스를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삼황자 전하가 개화시킨 특성을 생각하면 이미 여태까지의 실랑이를 다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막 입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삼황자 전하가 나타났다. 반색한 얼굴로 손을 뻗은 일리아스는 그대로 지안을 껴안았다.

“늦었잖아.”

“저, 전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당황해서 호칭이 먼저 튀어나왔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자꾸 주위를 맴돌기만 하고 곧장 오질 않아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널 기다리는 일은 항상 힘들군. 덧붙이는 일리아스의 말에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럴 때가 아닌 건 아는데, 뜻밖에 가슴이 크게 울렸다. 두껍게 쳐놓았던 벽이 하룻밤 사이 얇아진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뒤늦게 일리아스의 얼굴을 알아본 기자가 외쳤다.

“저기 저 사람! 오늘 기자회견에 나온다는 S급 에스퍼야!”

“뭐? 야, 찍어 찍어!”

곧이어 요란한 플래시 소리가 이어졌다.

촤라라라락―!

눈부신 촬영 빛에 미간이 찌푸려진 것도 잠시, 상황 수습을 위해 지난밤부터 내내 일리아스를 마킹하고 있던 성민이 튀어나왔다.

“와씨! 또 왜 이러는데요!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갑자기 왜…….”

성민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일리아스가 지안을 껴안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나가더라니, 가이드 때문이었나. 그런 거라면 짜증은 좀 나지만 같은 에스퍼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 * *

성민의 신원보증으로 대회의실 안에 들어가게 된 지안은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엔 협회장과 연구소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 지안 씨! 게이트에서 생환했다는 말은 어제 들었네. 하하! 건강해 보여 다행이야!”

서슴없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려는 협회장을 그대로 무시한 지안은 곧장 악시온에게 향했다.

“공작…… 아니, 악시온. 밤사이 별일 없었죠? 혹시 이상한데 사인했다거나 그러진 않았죠?”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작이 된 이후로 누구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적 없었다. 염려 섞인 음성과 함께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런 일 없었다.”

“하. 다행이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혹시 생방송 출연에 동의하셨어요?”

“생방송이 뭔지 몰라서 섣불리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기다리면 그대가 빨리 올 거라기에…….”

악시온의 대답에 지안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협회장과 연구소장을 노려보았다. 더 생각할 것 없었다. 지안은 곧장 악시온을 일으켜 세웠다.

“나가요, 우리. 기자회견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그렇게 말한 지안은 당황하는 협회장을 본체만체하며 연구소장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소장님. 카드 잘 썼어요. 그런데 지금 이거 뭐예요? 격리조치 중에 무슨 기자회견이고 생방송이에요? 사전 합의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무통보로 기자회견을 하시면 어떡해요? 제가 말했잖아요. 이 사람들! 어릴 때 게이트에 휩쓸려 들어가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고! 생방송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을 카메라 앞에 내세우다니 미쳤어요?”

“그게…… 지안 씨. 진정하고 좀 들어 봐. 모처럼 나온 S급 에스퍼잖아. 그냥 말은 최대한 안 시키고, 신원 확인도 도무지 안 돼서 얼굴만이라도 보이게 하려고 했지. 안 그래도 요즘 게이트가 빈번하게 발생해서 여론이 안 좋은데 국민을 위해서라도…….”

“국민은 무슨 국민이야! 엄한 핑계 대지 말아요! 생방송을 진행하는 걸 보면 격리조치는 진작 해제됐겠네요. 두 사람 다 데리고 갈 거예요. 방송 취소해요.”

사실상 연구소장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협회장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아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이제 곧 방송 시작할 시간인데 취소는 무슨 취소야!? 준비도 다 끝났어. 자자, 에스퍼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협조 좀 해 주게. 여기 기자회견 문답지도 다 만들어 놨어. 써 놓은 대로 읽기만 하면 돼.”

지안은 대답 대신 이를 갈았다.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전직 정치인인 사람과 말 섞고 싶지 않다. 대꾸 없이 그대로 공작과 삼황자를 챙겨 문으로 향하자 협회장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지안 씨. 정말 이러긴가? 생각 없이 굴지 말고 좀 진정해. 이거 지안 씨한테도 좋은 일이야. 모처럼 이미지 쇄신할 기회가 왔는데 왜 그걸 걷어차나. 응? 소장한테 다 들었네. 각인까지 해 줬다면서? 게이트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나온 에스퍼가 처음으로 방송 타는 건데. 기왕 방송 나가는 김에 지안 씨도 쓸모없는 S급 가이드 이미지도 청산하고 얼마나 좋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지안은 걸음을 멈췄다.

“그딴 거 너나 해!”

* * *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선 지안은 핸드폰을 켜 뉴스를 확인했다. 하필 기자들이 모여 있는 데서 난리를 친 탓에 벌써 속보로 기사가 떴다.

[가이드 갑질,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S급 가이드 횡포로 에스퍼 생방송 돌연 취소되…]

[게이트에서 생환한 S급 가이드 마침내 에스퍼 찾아…]

어느 언론사 할 것 없이 난리였다. 지안은 심란한 얼굴로 기사를 눌렀다. 제목은 선정적으로 뽑아 놓고, 막상 내용은 S급 에스퍼가 나타난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말미에는 꼭 이런 내용이 붙었다. 가이드의 횡포와 갑질로 기자회견과 생방송이 돌연 취소되었으며. 각성자 협회는 물의를 일으킨 가이드에게 곧 책임을 물을 예정이라고 말이다. 그 덕분인지 기사마다 악플이 폭발적으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런 악플이야 평생 보고 들었다. 게다가 생방송을 망쳤는데 욕먹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 봤자 정말 죽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쩔 줄 모르고 집에 틀어박혔을 텐데, 여기선 제가 멋대로 굴어도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는다. 가장 단적인 예로, 눈앞에서 헤롤드의 손목이 날아가거나 하는 일이 없다. 게다가 각오하고 한 일이라 그런지. 비난 일색의 악플을 보고도 딱히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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