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자. 각인 끝났어요. 아. 근데, 제가 택시를 좀 타야겠는데 카드가 없네. 소장님? 사과는 됐고, 택시비나 좀 빌려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소장은 빠르게 카드를 내밀었다. 공손히 내밀어진 카드를 받아든 지안은 그제야 웃는 얼굴을 지우고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카드까지 얻었겠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갈게요.”
“알겠어. 그, 각인까지 했다니 지안 씨 믿고 보내줄게. 근데, 가는 건 좋은데…… 여기 두 사람은 센터에 일시 격리조치 돼야 하는 거 알지?”
“격리?”
지안이 반감을 드러내자, 잠자코 보고 있던 채원이 나섰다.
“이번엔 여지안 가이드가 양보해. 너 혼자라면 몰라도, 위험성이 검증되지 않은 에스퍼를, 그것도 S급을 사회에 막 풀어놓을 순 없어. 게다가 정말로 각인을 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이외에도 밟아야 하는 절차란 게 있다고. 뭐가 그렇게 급한지 모르겠는데. 정 가려면 너는 가고. 두 사람은 놓고 가. 협회 방침이야.”
다년간 협회에 들락거린 덕분에 에스퍼 격리조치가 엄격히 시행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서 떠올리질 못했다.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 지안은 의논해 보겠다며 연구동의 개별 연구실을 잠시 빌렸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지안은 각인의 여파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공작님. 전하. 아무래도 저희가 하루 이틀 정도는 여기. 각성자 센터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있어야 한다고?”
“네. 가능하면 바로 저희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두 분 다 이능력자라…… 당장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네요. 격리조치가 해제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격리라곤 해도 각성자를 삼일 이상 억류할 순 없다고 알고 있으니 금방 끝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지안의 안색이 몹시 어두워, 악시온은 감정을 읽기 위해 지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대는, 집으로 가고 싶은 것 아닌가?”
“……가고 싶어요. 하지만 두 분을 여기 놔두고 갈 순 없어요.”
“안심하고 다녀와도 된다.”
“네? 하지만…….”
악시온은 망설이는 지안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투명하고 부드럽던 피부가 까칠했다.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여정을 끝낸 지안에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집으로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자신 때문에 붙잡혀 있길 바라진 않았다.
“그대는 쉬어야 한다.”
“쉬는 건 협회에서도 할 수 있어요.”
악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닿은 피부로 흘러드는 지안의 걱정과 염려,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 간절함으로 범벅이 된 갈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긴, 마음 놓고 쉴 장소가 아니잖나. 그리고 그 격리란 걸 따르지 않으면…… 그대가 곤란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다녀와라.”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난 괜찮다. 기다리겠다.”
“잠깐, 그래서 언제 돌아오는데? 아니지, 그보다 방금 뭘 한 건지 말해 줘.”
흔들리는 눈으로 묻는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설핏 웃었다.
“각인을 했어요.”
“각인?”
“네. 이제까진 제가 해 드렸던 건 가이딩이에요. 각인과는 다르죠. 각인을 하면 파장이 항시 안정되고 이능을 사용한 부작용도 피할 수 있게 돼요. 앞으로는 절대 폭주할 일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믿기 힘든 정보였으나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수긍을 마쳤다. 입맞춤과 함께 밀려온 지안의 기운이 남긴 강렬함은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자신들의 이능과 궤를 달리하는 힘이라곤 하나, 그만한 기운을 사용한 지안이 경이로워 보일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그보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너는 괜찮은 건가? 후유증이 남는다든가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약속해. 꼭 돌아오겠다고.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갈 거다.”
삼황자다운 말에 지안은 설핏 웃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러나 하루 정도라 해도 여전히 자신이 두 사람 곁을 떠나는 것은 염려되어, 지안은 이것저것 당부했다.
“연구원들이 이것저것 검사도 하고 신원도 확인하려고 할 텐데. 검사에만 협조하고 이외에는 대체로 침묵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무것도 응하지 마시고 사인도 하지 마시고요.”
“알겠다.”
그러는 사이, 연구소 내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 역시 저마다 모여 웅성거리기 바빴다. 미등록 S급 에스퍼가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각성자 폭주라는 사태를 피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단연 충격받은 건, 긴급 호출을 받고 연구동으로 뛰어온 두 명의 에스퍼였다.
“진짜 각인해 준 거야? 아니, 근데…… 저렇게 각인을 막 해 준다고? 이렇게 쉽게?”
“우리야 모르지. 그래도 아까 그 에스퍼들 반응으로 봐선 진짜로 해 준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얌전할 수가 없지 않나?”
“씨발 부러워!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뭐, 그동안 무능하다고 푸대접받은 거 생각하면 앞뒤 생각 없이 각인할 만도 하지. 그런데 여지안은 그렇다 치고, 저 에스퍼들 내가 영 모르는 얼굴인데……. 대체 정체가 뭐예요? 저 사람들? 대충 해외 각성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어디 출신이지?”
채원의 말에 대답한 건 황주연 책임 연구원이었다.
“그게, 저희도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여지안 가이드랑 같이 석전동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에스퍼인 것만 알아요. 지문등록도 안 되어 있고, 국적도 몰라요. 신원 확인 도중에 등급이랑 폭주 검사를 했는데 폭주 고위험이 떠서…… 당장은 지문 확보한 게 전부입니다. 지금부터 신원 파악해 봐야죠.”
* * *
꼬질꼬질하고 괴상한 차림새 때문에 승차 거부를 두 번이나 당했다. 택시비를 기존의 세 배로 부르고 나서야 안락한 시트 위에 몸을 기댈 수 있게 된 지안은 멍한 얼굴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을 응시했다.
익숙한 거리. 친숙한 풍경.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아파트. 설렘으로 가슴이 거칠게 흔들렸다. 전기차의 인위적인 엔진음마저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문득 가로수의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본 지안이 말했다.
“기사님. 혹시 오늘이 몇월 며칠이에요?”
“10월 5일입니다.”
“아. 그래서 나무들이 저렇게…… 그새 여름이 다 가 버렸네요.”
“어휴. 여름은 진작에 다 지났죠. 그런데 그, 뭐냐. 어디 해외 게이트 원정이라도 다녀온 모양입니다?”
“네. 어쩌다 보니 이제야 한국에 도착했어요.”
“그렇구만. 살아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네 정말로요. 간신히…… 한국에 돌아왔네요.”
대화를 마무리한 지안은 택시비를 결제한 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믿기지 않았다. 두 발을 받치고 있는 보도블럭이 언제라도 갑자기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난데없는 추락감과 함께 냉혹한 현실이 찾아올까 두려웠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공작님이 마련한 궤짝 속에서 깨어나게 되는 건 아닐까?
떨리는 손으로 1층의 보안키에 지문을 인식시킨 지안은 유리문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걸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층수를 누른 뒤 고개를 드니 엘리베이터 안 디스플레이에서 신원불명의 S급 에스퍼가 나타났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엔 짤막하게 실종된 가이드가 생환했다는 자막이 달려 있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지안은 홀린 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 섰다. 도어락 비밀번호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으나 집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가락이 도어락 번호를 대신 기억해 준 덕분이었다.
띠리릭―! 도어락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선 지안은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그대로 현관에서 무너졌다.
집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 * *
포근한 이불 냄새를 맡으며 지안은 눈을 떴다. 매트리스가 탄탄히 몸을 받쳐 주는 감각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잠들기엔 얼굴을 강타하는 햇살이 너무 폭력적이다. 비몽사몽한 채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였다.
‘내가 이렇게나 오래 잤다고?’
놀라며 시계를 다시 확인하자 벽시계가 멈춰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한숨을 내뱉은 지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세수라도 해서 정신을 좀 깨워야 할 것 같았다.
바닥에 허물이라도 벗어놓은 듯 대충 던져놓은 옷가지들을 발로 슥슥 밀며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인상이 조금 달라진 자신이 그 속에 서 있었다.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유순하단 말을 참 많이 들어왔는데…… 어딘가 인상이 차갑고 걍팍해졌다.
지안은 얼굴에 물을 묻히면서 한 번,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질을 하며 또 한 번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험난하긴 했으나 결국 목적한 바를 이뤘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다. 게다가 일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힘들게 돌아온 만큼 휴식이 절실했지만, 침대를 뒹굴며 청승을 떨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도 끊긴 것 같고, 핸드폰도 없다. 신분증도 다시 발급받아야 했다.
차근차근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아나가야 했다.
간단히 씻고 옷을 챙겨입은 지안은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제 연구소장에게서 강탈한 카드와, 여분으로 만들어둔 뒤 서랍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체크카드도 잊지 않고 챙겼다.
가장 먼저 행정복지센터에 들러서 사망처리를 철회하고 신분을 되살려야 했다. 그리고 통신사 대리점에 들러서 핸드폰을 개통하고, 앱으로 신용카드를 재발급받을 생각이었다.
그다음엔 카페에 들러 그렇게나 마시고 싶던 커피도 한 잔 하고, 어제 납부하지 못한 병원비도 내고, 일시 격리된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를 안심시켜준 뒤 협회 행정처로 가서 가이드 등록을 다시 하는 거다. 이후엔 돌아오면서 아파트 관리실에 가서 그간 밀린 관리비를 내면 된다.
생각해 보니 전기와 수도가 아직 끊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각성자들이 게이트 생활을 몇 달간 하게 된 이후로 관리비가 밀려도 최대 2년까지는 단전 단수를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에스퍼도 아닌데 그 혜택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안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