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뭐?”
“저 지금 방사 가이딩 하고 있으니까, 폭주 진단 검사 다시 해 보시라고요.”
“무슨 말이야 그게. 설마 매칭률이 나오기라도 하는……”
지안은 손목을 들어 휴대용 매칭률 검사기를 흔들어 보였다.
“게이트 안에서 검사해 봤는데 대충 90%가 넘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해요. 검사.”
“……사실이야?”
“이런 상황에 거짓말할 리 없잖아요. 재검사해도 고위험군으로 뜨면 그때 연구실 폐쇄하고 에스퍼 격리 절차 밟으세요.”
“아, 알았어. 황 책임. 들었지? 기기 다시 세팅해. 지금 바로 재검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안 씨는 검사실로 들어와. 고위험군이라 방사 가이딩 가지곤 안 돼. 당장 접촉 가이딩으로 전환해!”
그렇게 말한 소장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지안을 검사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돌변한 분위기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방사 가이딩에 이어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지안이 가까워지자 확연히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사이 악시온의 손을 잡고 정밀 검사기에 앉힌 지안은 곧장 소장에게 눈짓했다.
“시작하세요.”
* * *
에스퍼동에 대기하고 있던 1팀과 2팀은 협회 내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곧바로 연구소로 달려갔다. 게이트 발생으로 인한 호출이 아닌, 연구소 에서의 긴급 호출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적지만 대개 사안이 더 심각했다. 무조건 에스퍼의 폭주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햇수의 근속 덕에 폭주자로 인한 협회 내 호출을 다수 경험해 본 바 있는 2팀의 리더 성민은 착잡한 얼굴로 1팀 리더 채원에게 물었다.
“젠장. 야, 한채원. 설마 너희 팀에서 폭주자 나온 건 아니지?”
“재수 없는 소리 마. 우리 팀엔 폭주자 없어.”
“아씨. 그럼 대체 뭐야? 3팀에서 나온 건가?”
“모르지.”
짧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손목의 스마트 워치 화면 위로 연구소 내의 사정이 알려졌다.
[S급 에스퍼. 폭주 고위험군. 상황코드 19번. 즉시 연구소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긴급 메시지를 확인한 두 사람은 더욱 심각한 얼굴이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연구소를 향해 질주했다. S급의 폭주라니 상황이 심각했다.
앞서 바깥으로 빠져나온 선임 연구원들에 의해 절반쯤 폐쇄된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성민은 욕설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야 잠깐만. 생각해 보니 너랑 내 팀 다 합쳐도 A급 에스퍼는 고작 스물 아냐? 왜 1팀이랑 2팀만 부른 거야? 9팀까지 싹 다 불러도 모자라구만!”
“3팀 이하로는 부르나 마나야. 와 봤자 별 도움 안 돼.”
“그래도! 백업이 좀 있긴 해야 할 것 아냐! 씨발. 상대가 S급인데 같은 S급을 불러야지, 왜 하필 우리야!”
투덜거리며 성민은 투명한 강화유리 안의 검사실을 노려보았다.
고위험군 에스퍼는 짧으면 일주일. 길어도 한 달 내 폭주한다. 바로 그 위험성 때문에 이들은 발견 즉시 폭주 에스퍼를 위한 격리소에 격리되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격리소지… 그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폭주해 죽으란 소리다.
울릉도가 괜히 싹 비워진 게 아니다. 한국 본토에서 독도 다음으로 먼 섬에 지어진 에스퍼 격리소는, 가이드를 찾지 못한 불운한 에스퍼들의 무덤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폭주가 임박한 에스퍼들은 대부분 검사 결과를 부정하거나 거세게 반항한다. 연구원들을 협박해 수십 번씩 재검사를 요청하는 에스퍼들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실 안에선 재검사가 한창이었다.
“잠깐, 저 사람…… 가이드 여지안 아니야?”
채원의 말에 성민은 긴장한 얼굴로 검사실 안을 들여다보다 말고 경악했다.
“어? 진짜네? 뭐야? 쟤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죽은 게 아니라 게이트에 휩쓸려 실종됐었어.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사실 안의 기기 화면 위로 검사 결과가 송출됐다. 주황색 화면 위에 ‘주의’라는 단어가 뜬 것을 본 채원과 성민은 어리둥절한 채로 얼굴을 구겼다.
“우리 지금…… 호출 낚시 당한 건가?”
“그런 것 같네. 실수로 호출 버튼 잘못 눌렀나?”
“하. 실수? 실수우? 기분 더럽게 진짜!”
투덜거린 성민은 검사실에서 흘러나오는 환호성에 얼굴을 잔뜩 구겼다.
“와. 지금 사람 똥개 훈련 시켜 놓고. 약 올리나?”
“잠깐, 그게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쯧. 귓구멍 막힌 놈이 목청만 좋아선……. 못 들었어? 여지안이랑 매칭률 나오는 에스퍼라잖아.”
“뭐? 진짜야? 와. 에스퍼 못 찾고 맨날 기죽어 있더니 드디어 에스퍼 찾았네?”
채원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검사실 가까이로 향했다. 앞서가는 채원의 모습에 성민이 다급히 물었다.
“야. 어디 가!”
“상황 종료된 거 맞는지 확인해야지. 단순한 호출 실수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근무일지 작성해야 할 것 아냐.”
“하여튼 깐깐하긴. 협회 에스퍼 중에서 일지 꼬박꼬박 작성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흥. 네가 그러니까 내가 1팀 리더고 넌 2팀 리더밖에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넌 궁금하지도 않아? 눈이 있으면 좀 봐라. 검사실 안에 있는 에스퍼, 못 보던 얼굴이잖아.”
“에엥? 잠깐, 뭐야. 진짜잖아? 뭐지? 전국민 각성자 검사 기간도 아닌데?”
“정황상 새로운 S급 에스퍼인 것 같은데? 해외에서 각성한 에스퍼인지도 모르지. 알아보러 가자.”
채원의 말에 성민은 투덜거리면서도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며 그 뒤를 따랐다.
* * *
확연히 긴장이 줄어든 분위기를 보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모두가 바라는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악시온과 일리아스는 연구원들의 말을 적당히 해석하며 지안의 옆에 붙어 섰다.
결과를 확인한 지안은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연구원들을 향해 말했다.
“결과도 다 나왔고, 전 그만 집에 가 봐야겠어요.”
“뭐? 잠깐, 잠깐만! 검사 결과 나오는 동안 전화 싹 돌렸어! 가긴 어딜 가! 그래! 링거! 링거액도 아직 다 안 맞았잖아. 막 게이트에서 탈출한 참이라 정신없을 텐데. 협회 가이딩룸에서 좀 쉬다 가. 응? 제일 좋은 가이딩룸으로 줄게!”
연구소장의 외침에 지안은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목의 의료테이프와 바늘을 뜯어냈다. 의사 표현은 이걸로 충분하고 넘쳤다.
그대로 검사실을 나서는 지안을 붙잡은 건 소장의 외침이었다.
“지안 씨! 잠깐만 좀 기다려 봐! 아직 검사할 게 한참 남았어. 저 두 사람, 아무리 고위험군 아니래도 주의단계잖아! 지안 씨 혼자서 S급 에스퍼 두 명 감당할 수 있어? 이대로 집으로 갔다가 도심에서 폭주라도 하면? 그거 생각은 안 해?”
“네. 신경 안 써요.”
소름 끼칠 만큼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 음성을 우연히 코앞에서 듣게 된 성민은 움찔 몸을 굳혔다.
‘여지안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생각하는 사이 지안과 눈이 마주쳤다. 스스륵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는 얼굴이 서늘했다.
“비켜.”
성민은 그제야 자신이 검사실 입구를 막고 있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려 비켜 주었다. 옆에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채원이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휘유― 박력 좀 봐.”
“지안 씨! 잠깐 좀! 멈춰 보라니까! 거기, 두 사람 뭐 해! 좀 붙잡아 봐!”
소장의 외침에 대답한 건 성민이었다.
“싫은데요.”
“뭐?”
“눈 삐셨어요? 여지안 뒤에 붙어 있는 에스퍼 안 보이시나? 잘못하면 한 대 맞는 걸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에스퍼 앞에서 가이드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리는 거 몰라요? 심지어 S급이 두 명인데, 황천길 프리패스 할 일 있나.”
“아니, 그나마 가이딩 중에 검사해서 결과 좋았던 거야! 저러다 위험 단계 가면 그땐 진짜 늦어! 당장 붙잡아서 성가이딩을 시켜도 모자랄 판국…….”
소장은 말하다 말고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하지만 들을 사람은 이미 다 들은 뒤였다. 파괴적이기까지 한 심각한 말실수에 연구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막 연구동 밖으로 나서려던 지안 역시 걸음을 멈췄다.
한껏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채원이 말했다.
“소장님. 연구소장직 딱지치기로 따셨어요? 미쳤어요?”
“지, 지안 씨.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미안해!”
“……미안하실 것까지야. S급 에스퍼가 갑자기 둘이나 나타났으니 놀라실 만해요. 근데, 제가 오늘 게이트에서 겨우 생환한 데다 보시다시피 꼴이 말이 아니어서요. 누구 하나 붙잡고 섹스할 기분이 전혀 아닌데. 어쩌죠? 좀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목소리는 상냥한데 눈빛은 영하를 내달리고 있었다. 분노로 새파랗게 빛나는 지안의 눈을 본 채원은 ‘일 났네, 일 났어.’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S급 빙결계 능력자인 이환이 이 일대에 블리자드라도 소환한 것 같았다.
“…….”
“…….”
연구소를 통째로 침묵케 한 지안은, 다음 순간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삐뚜름히 웃었다. 사람이 완전히 빡돌면 어떻게 웃는지 알려 주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제안은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정 안심이 안 되시면, 각인은 어때요?”
“뭐?!”
성민은 너무 놀라서 빽 소리쳤다. 주룩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 올린 소장 역시 말을 더듬었다.
“가, 각인?”
“그동안 저, 매칭률 맞는 에스퍼가 하나도 없어서 몇 년간 허탕만 쳤잖아요. 이제야 겨우 파장이 맞는 에스퍼가 나타났는데. 가이딩 단계 차례대로 밟아가면서 이리저리 재 볼 여유, 없어요. 게다가 둘 다 S급인데. 잽싸게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래 준다면야 나야 안심이지! 그런데, 정말로?”
지안은 말 대신 악시온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겨 키스했다. 단순 접촉으로도 각인이 가능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조금 임팩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간 각인을 시도한 전적이 두 번이나 있어서 그럴까. 순식간에 각인이 이루어졌다.
부릅뜬 동공을 짧게 응시하며 공작에게서 입술을 뗀 지안은 그대로 일리아스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멱살을 잡고, 잡아당기고, 입을 맞추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그사이 공작은 지안의 허리춤에 팔을 두른 채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있었다.
삼황자 역시 결과가 그리 다르진 않았다. 옷자락이 그러잡은 그의 손가락이 연약하게 파들거렸다. 지안은 다리에 힘이 풀린 두 사람을 기다려 주며 경악에 휩싸인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각인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