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6/199)

137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비엔은 힘없이 에버렛의 멱살을 놓아 버렸다. 구겨진 옷의 주름을 털어내던 에버렛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일부러 어린 나이에 발현한 능력자를 골라 데려왔습니다.”

무심히 설명하며 에버렛은 부지깽이를 들어 난로의 장작을 불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주홍빛 불씨가 그녀의 얼굴에 노란 그늘을 만들었다.

“저는 에다의 성녀가 이곳에 남아주길 바랍니다. 신탁을 위해서라도. 샤먼으로 전락한 북부의 신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녀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이비엔의 손등 위로 소름이 돋았다. 지안을 배신하고, 그녀의 의사를 묵살해 보았기에 알 수 있다. 만약 지안이 저 말을 들었다면 치를 떨며 진저리칠 것이다. 지안이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좌절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라고 그런 식으로 아이를 사 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원 문을 여는 건 본디 희생을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능력자를 희생시키는 것보단, 멋모르고 무지한 아이를 내세우는 게 성녀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겠지요.”

“성녀를, 지안을 본래 세계로 되돌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공작성에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맞습니다. 누군가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나이 어린 샤먼들보단 제가 좀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앞세우고도 지안이 돌아가길 희망한다면?”

“다른 샤먼을 구해야겠지요. 저는 처음부터 차원 문을 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비엔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모두가 지안을 붙잡으려고만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눈앞의 샤먼에 대해 미리 조사를 마쳐두었단 사실이다.

“아니. 넌 차원문을 열어야 해. 듣자니 북부의 고아를 여럿 보살피고 있다지? 이름도 알아. 에디. 델마. 제이크. 잭. 솔론! 네가 그렇게나 아낀다는 애새끼들을 티아낙이란 사냥꾼이 잠시 보살피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네 아기자기한 통나무집이 폭발로 터져 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차원 문을 열어야 할 거야.”

그 말에 에버렛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 아이들은 제국의 신민입니다. 황녀로서 그들을 보호하진 못할망정, 인질로 삼아 절 협박하시다니요?”

이비엔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모르는군. 황족은 필요하다면 가족도 죽여. 황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지안은 그럼에도 돌아가려고 할 거다.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해.”

“…전하는 성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왔다고 하셨었죠.”

“그래. 나는 이미 한번 지안을 강제로 붙잡으려 한 적이 있고, 그건 아주 큰 잘못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안은 이곳에 온 뒤로 내내 너와 나 같은 사람들의 행패와 속임수를, 배신을 감당해야 했어. 난 알아. 지안은 절대로 그 협박에 응하지 않을 거다. 네가 하는 짓은 지안이 이 세계를 싫어하게만 할 뿐이야. 그러니 당장 그만둬. 아이는 돌려보내.”

그러나 그 말만으로 순순히 포기하고 따를 만큼 에버렛의 미련은 가볍지 않았다.

“왜 굳이 그렇게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전하껜 잘된 일 아닙니까? 성녀를 붙잡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분이 남는다면 전하는 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하가 요타를 대신해 희생양이 되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한 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전대 공작부인을 붙잡던 전대 공작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붙같이 화를 내겠지만, 에버렛은 이비엔 역시 전대 공작과 다를 것 없는 선택을 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어진 황녀의 말은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내가 하겠다.”

“……무슨?”

“내가 하겠다고 했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내가 하는 게 나아.”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지안에겐 알리지 마. 지금까지 그래왔듯 함구해. 이해했나? 만일 지안에게 말하면, 네년의 혀를 잘라 버릴 거다.”

협박성 짙은 경고였으나. 이미 살 만큼 산 에버렛에게 이비엔의 말은 제대로 된 협박이 되지 못했다. 비웃음과 함께 에버렛이 물었다.

“끝에 가선 결국 알게 될 일. 굳이 비밀을 지켜봤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도 알아! 하지만 미리 이 사실을 알려서 애꿎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아. 네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만 명심해. 이 일을 알려서 지안의 선택을 흔들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두 눈은 짙은 음영을 드리운 채 슬픔과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반짝이는 눈빛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분명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선택이었으나. 편향되어 있던 생각의 방향을 틀어 주는 물길이기도 했다.

황녀의 말대로, 그녀의 희생이 이루어진다면…… 이보다 더 애달픈 설득은 없으리라. 어쩌면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돌아서는 신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생각해 낸 것보다 훨씬 더 온건하고 사려 깊은 방식의 설득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에버렛은 대대로 샤먼들의 손을 거쳐 끝내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성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예컨대 떠나버린 성녀가 다시 돌아온다거나 하는…… 그런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지난 수십 년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성물의 용도를 뒤늦게 찬찬히 곱씹어 본 에버렛은 순순히 이비엔의 협박에 굴복했다.

그리고 결국, 오늘이다.

회상을 마친 에버렛은 착잡한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는 이비엔에게 말했다.

“이제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해야겠군요.”

“…….”

“각오는 되셨습니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이비엔은 곧장 지안에게 다가갔다. 함께 지구란 곳으로 돌아가리라 굳게 믿고 있는 그녀에게 차마 진실을 알릴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오라버니보다, 공작보다 더 빨리 북부에 도착해 에버렛과 조우하게 된 건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살고 싶다는 바람도, 다가올 신탁의 날을 막겠다는 결심도 지안의 앞에 서면 희미해졌다.

늦은 나이에 발현하고, 꼼짝없이 폭주할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 지안을 만났다. 함께 한 제도 나들이에 아이처럼 설렜고, 지안의 옆에 붙어서 오라버니와 공작을 골탕 먹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언젠가 지안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보란 듯 손가락의 반지를 빼앗아가며, 지안은 충고했었다.

‘가이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호감을 무작정 키워선 안 돼요. 냉철하게 생각하고, 또 저를 경계하실 줄도 알아야 해요. 기본적으론 가이드도 타인에 불과하니까요’

‘제가 가이드란 이유로 자진해서 약자의 위치에 서시면 안 돼요. 제게 어떤 감정을 느끼건, 일종의 현상일 뿐이란 걸 자각하셔야 해요. 무턱대고 저를 우선하셔선 안 돼요. 알고 계시겠지만, 어떤 순간이든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에요.’

아마 지안은, 지금과 같은 맹목적인 감정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조언했을 것이다. 함부로 무조건적인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안 된다고……. 하지만 도무지 그 조언을 따를 수가 없다.

“지안.”

떨리는 목소리에 지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지안을, 이비엔은 와락 끌어안았다. 잘못했다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공포로 몸이 떨리는 만큼이나 지안에게 도움이 되리란 사실이 기뻤다. 어설픈 사과를 받아준 지안이 고마웠다.

“왜 그러세요, 전하?”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심장을 뒤흔드는 슬픔을 감추며 힘껏 웃었다. 기왕이면, 웃는 얼굴로 나를 기억해 주길.

이비엔은 지안을 껴안은 팔에 힘을 풀며 미리 준비한 전대를 지안의 허리춤에 단단히 둘러매 주었다. 불시에 껴안은 용건이 본래 그것이었던 양 과장스럽게 말을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건 내가 아끼는 보석이랑 유사시에 쓸 금화인데, 내가 한꺼번에 다 들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잠시만 맡겨둘게. 혹시나 차원을 건너다가 유실될 수도 있잖아. 나중에 돌려받을 테니 잘 챙겨줘. 알겠지? 이렇게 나눠서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하나쯤은 건질 수 있을 거야.”

변명을 마친 이비엔은 삼황자와 공작에게도 주머니를 하나씩 나눠준 뒤,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에버렛에게 눈짓했다.

그 신호를 알아챈 에버렛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요. 아. 그 전에…… 이것도 받으십시오. 잃어버리면 큰일 나니까 당장 챙겨 넣으시고.”

얼떨결에 에버렛이 건넨 것까지 받아들게 된 지안은, 이어진 그녀의 지시에 손에 쥐게 된 물건을 살필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것을 전대에 집어넣었다.

“방금 제가 드린 건, 북부의 샤먼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성배입니다. 차원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죠. 길잡이 역할을 해 주는 성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략히 설명을 마친 에버렛은 물건이 지안의 전대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확인하고선, 소매에서 천을 꺼내 그 위를 한 번 더 꽁꽁 싸매 주었다.

“이제 됐습니다.”

혹시 허술한 데가 없는지 재차 확인한 에버렛은 고개를 들어 지안을 바라보았다. 넘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지안의 얼굴 위로 옛 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에버렛은 지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허공이 일그러지며 새하얀 빛이 튀었다. 게이트 발현 전조증상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아…!”

그것을 본 지안은 감격에 찬 얼굴로 눈을 빛냈다.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참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렸다.

그런 지안에게 에버렛이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성배에 물을 채운 뒤, 수면에 가장 밝은 별을 비추고 기운을 쏟아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놀라 반문하려 했으나, 뭔가 물을 틈도 없이 에버렛은 지안을 그대로 지나쳐 옛 신전의 제단 앞으로 나섰다. 바로 옆엔 황녀 전하가 함께였다.

지안은 흔들리는 눈으로 황녀와 샤먼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응시했다. 고대하던 순간이 코앞인데, 어째서일까. 뭔가 이상했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며 씩 웃는 황녀 전하의 미소와 눈빛이 어딘가 평소와 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