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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5/199)

136화

눈을 감자 황녀와 처음 마주한 날이 생생히 떠올랐다.

눈보라를 뚫고, 일대의 기사단과 함께 공작성을 찾은 황녀가 에다의 신관을 대동한 채 자신을 찾았던 날.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황녀가 물었다.

“네가 북부의 샤먼인가? 공작이 미리 대기시켜 놓았다는?”

“그렇습니다.”

“나는 이비엔 테리온. 제국의 황녀다.”

서둘러 자신을 소개한 황녀의 다음 질문은 에버렛으로서도 퍽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당신…… 정말로 차원을 통과하는 문을 열 수 있나?”

할 수 있다. 한데 새파랗게 어린 황녀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샤먼 중 차원 문을 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건, 북부 공작가의 소수 인원과 고위 신관 몇몇뿐일 텐데?

대답 없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황녀의 옆에 선 에다의 신관이 난처한 얼굴로 나섰다.

“제가 전하께 알려드렸습니다. 에다의 종. 크론쇼입니다.”

“흠. 에버렛 베스티입니다. 그래서 두 분은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는지?”

대답은 황녀에게서 나왔다.

“이곳에서 네 신변을 보호할 것이다. 네가 있어야 지안이 지구란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안이라면…… 에다의 성녀 말이로군요.”

“알고 있다니 더 설명할 필요 없겠군. 지안이 곧 북부에 도착할 거다. 나는 지안이 무사히 차원을 건널 수 있도록 도우러 왔다.”

“떠나는 걸 돕겠다라……. 어째서입니까? 소문으론 황녀 전하께서도 능력자로 발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헛소문이었나 보군요?”

“헛소문이 아니다. 올해 발현했어.”

기막힌 말에 에버렛은 작게 실소했다.

“에다의 성녀가 없다면 오래지 않아 폭주하시게 될 텐데. 그건 알고 하는 말이십니까?”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떠나겠다는 성녀를 돕겠다? 에다의 성녀와 함께 떠나실 요량인 모양이군요. 뭐, 제 신변을 보호해 주신다니 저야 환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지안이 아닌 제삼자가 차원을 넘는 게 가능하긴 한 모양이군. 내 짐작이 맞나?”

“……전례가 있으니까요.”

“전례까지 있다니 그거 다행이군. 다만,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가지 않아. 지안과 함께 떠나는 건 오라버니와 공작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반쪽짜리 능력자가 된 마인이라면 당연히 에다의 성녀를, 스테아의 현신인 그녀를 붙잡으려 드는 게 정상인데. 가지 않겠다니?

“나는 이곳에 남아서 곧 있을 재난을 대비할 생각이다. 제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북부는 다르지. 공작을 대신해 북부의 인력을 통솔할 생각이다. 어차피 공작은 떠날 테고, 남겨진 사람들은 지도자가 필요할 테니까.”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불친절한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에다의 신관이 나서서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곧 재해가 일어날 거란 신탁이 있었습니다.”

“주신의 신탁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 * *

황녀는 매일 초조한 얼굴로 멀리 에다의 성녀를 마중하러 나섰다가 눈사람이 되어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언제는 차원 문을 열 수 있는 샤먼인 자신을 지킬 것이라 하더니, 막상 공작저의 경비를 보고선 그럴 필요가 없단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에버렛은, 이후 황녀가 택한 미련한 행보를 혀를 차며 지켜보게 되었다.

전서구를 받았으니 성녀가 며칠 뒤에나 도착할 걸 뻔히 알 텐데. 황녀는 이른 새벽에 설원으로 나섰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바보 같은 짓이건만,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에버렛 역시, 황녀를 말리는 게 꼭 자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흔 가까이 나이를 먹은 에버렛에게 이비엔은 새파랗게 어린, 불쌍한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또한 그녀는, 신탁에 저항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에버렛이 보기에 황녀는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그렇듯 무모했고, 고집스러웠으며, 미숙했다. 황녀가 스스로의 미련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도 있겠으나, 분명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충고해 봤자 내 입만 아프겠지…….’

하지만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황녀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그녀를 동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에버렛은 이비엔이 왜 저렇게까지 절박하게 구는지 알지 못했다. 대충 크론쇼에게 듣기론 에다의 성녀와 마찰이 있었다 했던 것도 같은데…….

뭐,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나, 추위에 부르튼 얼굴로 실의에 빠진 황녀의 모습엔 일견 가련한 구석이 있었다. 가끔은 북부의 고아들보다 그녀가 더 불쌍해 보였다. 바로 그 처연함이 에버렛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다곤 해도 뭔가 거창한 마음이 생겨난 건 아니었다. 충고를 할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반 눈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황녀를 조금 챙겨주는 것. 마중을 나가고, 난로의 불을 지키는 등의 작은 배려. 에버렛이 한 건 이처럼 사소한 것이었다.

별 의미를 둔 행동은 아니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니, 난로를 지키는 것도 딱히 나쁘지 않다. 그리고 원래 노인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걸 좋아한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에버렛은 숄을 들고 이비엔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김없이 얼어붙은 눈사람이 되어버린 황녀를 얼추 사람 같은 몰골로 만들어 주었고, 얼어붙은 뺨에는 기름을 발라 주었다.

그렇게 우연히 대화가 시작됐다.

“꼴을 보아하니 오늘도 공작님 일행이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저기 화롯가에 앉으십시오. 몸을 녹여야 하니까.”

훈계하듯 말한 에버렛은 이비엔에게 담요와 따뜻한 우유를 들려 주었다. 얌전히 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이던 이비엔이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못 보던 어린애가 하나 있던데. 누구지?”

이비엔의 물음에 주전자를 정리하던 에버렛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요타 말이로군요. 얼음산에 동행시킬 아이입니다.”

“동행시킨다니? 거길? 무슨 이유로?”

수상함을 느낀 이비엔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일. 지금은 굳이 알 필요 없으십니다. 그보단, 마침 마을 사람들이 설탕을 좀 나눠 주었는데. 우유에 좀 타 드릴까요?”

“내가 요구한 건 설탕이 아냐. 당신, 왜 엉뚱한 말을 하지? 더 수상쩍게 굴지 말고 대답해.”

에버렛은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로 보아 답하지 않으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역시, 답지 않은 친절을 발휘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오직 북부의 샤먼들만이 아는 진실을 끄집어냈다. 지금보다 더 젊고 혈기가 넘쳤을 때라면 조금 더 망설였을 테지만, 곧 스테아가 돌아가려는 마당에 이깟 진실이 뭐 어떠랴 싶었다.

“……북부의 신관들은 신을 잃고서 샤먼으로 전락했지요. 저는 에다의 종과 달라서, 이런저런 재주는 부릴 수 있어도 제대로 된 신의 이적을 행사하진 못합니다. 말인즉, 차원문을 여는 방법은 알지만 힘이 부족합니다. 아마 제대로 된 신성력이 있다 해도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 논점을 흐리지 마. 부모가 아픈 집의 아이를 큰돈을 주고 데려왔다고 들었다. 마치……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듯이. 어떤 용도를 염두에 두고 아이를 데려온 것 같더군.”

그 말에 에버렛은 끌끌거리며 웃었다. 신경을 온통 성녀에게 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짧은 사이 거기까지 알아차리다니. 미숙하나 수완가의 면모가 있다. 어려도 황족은 황족이라 이건가? 모르고 있었다면 차라리 속 편했을 텐데. 하필 눈치가 좋았다.

“굳이 아셔야겠습니까?”

에버렛의 말에 이비엔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이를 본 에버렛은 잠깐의 계산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게 될 진실, 하루 이틀 먼저 알게 된다 한들 차이가 있으랴.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첫째로, 차원 문을 여는 데는 폭발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문을 열기 위해선 폭주하는 능력자가 필요합니다.”

“뭐?”

이비엔이 놀라 입을 꾹 다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에버렛의 말이 이어졌다.

“숨기려던 건 아닙니다. 어차피 차원 문을 열 때 알려질 사실이기도 하고. 당장 성녀가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그 어린애를 앞에 두고 말인가?”

“…….”

이번에는 에버렛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 말대로였다. 이 같은 진실을 안다면 지안이 돌아가는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주저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녀 나름대로의 미약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그 숨겨진 의도에 이비엔은 자연스럽게 이멜다를 떠올렸다. 벼락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비엔은 손을 뻗어 에버렛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멜다의 간자인가?”

“이멜다? 아아. 이번에 황후가 되었다는 여자 말이로군요.”

“대답해!”

사납게 윽박지르는 황녀의 모습에 에버렛은 코웃음 치며 혀를 찼다.

“흥. 황성의 힘도 미처 북부에 닿기 전에 시들어 버리는 마당에, 에를랑겐 후작가의 힘이 먼 북부까지 어찌 미치겠습니까?”

그 말에 황녀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섬뜩히 울렸다.

“그래. 그렇긴 하지. 하긴, 너 같은 노파를 이멜다가 제 공작원으로 쓸 리 없지. 하지만 이멜다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이 같은 진실을 이제서야 말하다니.”

화를 억누르는 것에 실패한 이비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공작이 준비시킨 샤먼이라 최소한의 대우는 해 주려 했는데. 미친 늙은이가 망발에 이어 괴이쩍은 짓까지 일삼는구나! 거짓말이라고 말해! 폭주하는 능력자가 필요하다니. 날더러. 그 사실을 믿으라고?”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제가 무얼 하러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이비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이렇게나 흥분했는데 상대는 동요 한 점 없이 노련했다. 에버렛의 평정심과 태연함이 연륜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 때문에 그런 건지 헷갈렸다.

혀를 찬 에버렛이 말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에다의 성녀가 누군가를 희생시키길 주저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도 성녀가 이곳 세상에 남기를 바라시겠지요. 제 짐작이 틀립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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