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4/199)

135화

“그보다, 돌아가게 된 소감이 어때? 이젠 정말 코앞이잖아.”

“딱히 소감이랄 건 없어요.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궁금하다. 네 고향 집이라니. 나도 가 보고 싶어. 그런데 지안, 여기 와서 좋았던 건 없어? 예를 들면 힉스에서 식사하는 거 좋아했잖아. 황성의 정원도 마음에 들어 했었고.”

“그랬죠.”

“돌아가는 마당에 이런 질문은 역시 별로지? 그래도 궁금해서 말야. 게다가 지금 생각났는데, 나는 네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

이런 쓸데없는 건 왜 묻는 걸까. 게다가 파장은 왜 또 이렇게 서글픈가. 내게 미안해서 그러나? 아니면 이멜다인지 뭔지 하는 후작 영애와 손을 잡았던 걸 만회하려고? 그래서 이렇게 과하게 수선을 떨고, 쓸데없는 걸 묻고, 활기찬 목소리를 꾸며내는 건가?

“녹색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꽃은…… 그런데 전하.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으세요?”

의아해하면서도 묻자, 예기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모르니까. 생각해 보니 난 그동안 무작정 네가 좋아서 호의를 퍼 나를 생각만 했지, 정작 그게 네가 바란 게 맞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

“…….”

“한심하지. 네가 내키지 않아 하는 걸 알면서도 티파티를 열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자고 조르고. 그러면서 내가 널 이만큼 좋아하니까. 너도 이 정도는 양보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어. 이멜다와 손을 잡은 것도 그래서였어. 충분히 네 호의를 샀다고 생각했거든. 네 의사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네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리라 자만했어.”

사람의 목소리가 맑고 활기찬 와중에도 울먹일 수 있구나. 지안은 이 사실을 깨달으며 이비엔의 어깨를 짚었다. 황녀의 파장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대화에 제대로 어울려 주는 게 낫겠다 싶어 지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제 와 굳이 거론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쨌건 이렇게 나타난 걸 보면, 황녀 전하도 단단히 마음을 굳힌 상태일 것 아닌가.

그간 전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지만, 지구로 떠나겠다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낯선 세상에 새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진 않았다. 응어리진 것을 풀어야 한다면 지금 하는 게 가장 좋았다.

“좋았던 거. 있어요. 힉스에 간 것도 좋았고, 전하께 천과 실패를 선물 받은 것도 기뻤어요. 북부에서 순록을 구경한 적도 있고, 오로라도 봤어요. 정말 예뻐서. 먼발치에서 보는 걸로도 좋았어요. 황성의 장미 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요.”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놓자 이비엔의 얼굴이 천천히 밝아졌다. 불안을 담은 채 뻗치던 파장 역시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지안은 그 변화를 느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하가 자만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때때로 독선적인걸요. 모든 판단이 정답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리고 잘못은 제게도 있어요. 전하께서 자만하셨다면 저는 거듭해서 모두를 기만했고, 속였죠. 무엇 하나 제대로 털어놓지 않았고요.”

“그건.”

“내내 거짓말로 순간순간을 모면했어요. 제대로 된 진실은 가장 나중에 꺼내놓았고요. 결정적으로…… 살고 싶어서 한 일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러니까 쌤쌤으로 해요. 비긴 거예요. 우린.”

“……정말로 내가 싫거나 밉지 않아?”

짐짓 심각해하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픽 웃어 버렸다. 그래, 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전하께선 제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그런 전하를, 제가 왜 미워하겠어요?”

대화는 거기서 중단됐다. 악시온이 신전으로 향하는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음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입구를 두껍게 막고 있는 눈을 깨뜨리자, 사람 두엇이 드나들 법한 통로가 나타났다. 지안은 서둘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고색 찬연한 제단과 세심히 조각된 기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아론은 갑판에 주저앉아 울컥 피를 토해냈다. 살아 있는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능을 사용하는 건 고사하고, 선미에 기대앉는 것조차 힘겨웠다. 심장이 찢기고 폐가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에 헐떡이며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길 수차례 반복했을 즈음, 아론은 누군가의 손이 뱃전을 덥석 움켜쥐는 것을 목격했다.

배 위로 기어오른 건 해초를 잔뜩 뒤집어쓴 아르킨이었다.

바다 저 멀리 내던져진 삼황자의 기사가 대체 어떻게? 바로 그런 의문과 함께 아론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사이 파도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그레브의 배로 돌아온 아르킨은 쓰러진 아론을 제쳐두고 선실을 뒤졌다. 하지만 조그만 배 어디에도 지안은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그레브의 시신과 다 죽어가는 능력자뿐.

아르킨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분명해 보이는 아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봐! 대답해라. 성녀님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해.”

위협에 반응하듯 아론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뭘 대답해 주고 싶어도, 입을 열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론은 며칠간 바다 위를 힘겹게 표류한 아르킨보다 더 심각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간신히 남아 있는 반쪽짜리 각인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폭주해 절명했을 터였다.

간헐적으로 핏물을 게워내는 아론의 모습을 본 아르킨은 낭패한 얼굴로 아론을 갑판 위에 내동댕이쳤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론이 그대로 쓰러져 기절하자, 그는 한숨과 함께 배의 닻을 조정해 방향을 잡았다. 우선은 저놈을 살려놓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성녀의 행방을 캐물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울분을 삼킨 아르킨은 욕설을 내뱉으며 짐꾸러미에서 지혈제를 찾았다. 사라진 성녀를 찾으려면 단서가 필요했고, 그 단서를 가진 건 다 죽어가는 저 이능력자였다.

* * *

서둘러 앞서가는 지안의 뒷모습을 본 에버렛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가능하면 북부의 수호신이 이곳에 남아 주길 바랐건만, 맹목적으로 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니 이번에도 영 글렀다. 오래전 마인들에게 배신당한 신의 마음을 붙잡아두기엔 역시 역부족이었던 거다.

본래 자신이 머물렀던 세계를 찾아 세대를 거듭하며 차원을 넘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아는 늘 다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북부의 샤먼인 에버렛으로선 안타까움에 애가 다 닳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의 종으로서 어찌 그 선택에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보단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두 번의 기회가 찾아왔음에 감사하는 것이 더 건설적인 일이었다.

오래전 북부의 공작부인이 악시온 오데르겐을 낳았을 때만 해도 에버렛은 북부의 수호신이 완전히 돌아왔노라고 믿었다. 전대 공작이 그녀를 극진히 대하며 붙잡아두는 것을 보았고, 마침내 그 결실까지 맺지 않았나.

그러니 언젠가 별의 여신이 생을 다하여 인간의 형상에서 탈피하는 날. 과거의 상처를 잊고 다시 이곳에 남아 북부의 겨울 신으로 남아 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랬는데, 설마 그녀가 브리켄의 여식에게 독살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날의 일이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전대 공작부인이 피를 토하는 걸 보고도 손쓸 도리 없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그 날을, 어찌 잊을까.

신의 종으로서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샤먼으로 전락한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부스러기 같은 신성력뿐. 희미한 신성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몹시 한정적이었다.

무엇보다 공작부인의 육신은 온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강력한 극독으로 단숨에 절명해 버렸으니 에다의 종이 나섰대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함께, 에버렛은 공작부인의 영혼에 깃들어 있던 신의 자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다시 인간의 손에 허망히 살해당했으니. 스테아의 현신이 다시 한번 이 세계를 방문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신은 또 한 번 차원을 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각 없이 다시 한번 차원을 건너온 여신은 피신하듯 이곳을 떠나는 것에 골몰해 있었다. 정확히는 신의 힘을 손에 쥔 여인의 의사일 뿐이지만, 피아를 정확히 구분 짓기 모호할뿐더러, 어차피 그녀의 뜻이 신의 뜻이다.

에버렛이라고 지안이 돌아가고자 하는 연유를 모르진 않았다. 황녀에게 전해 들은 바론, 노예상에 의해 제도로 팔려나간 데다 황성에 구금당하기까지 했으니……. 실로 타오르는 분노 위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북부를, 이 세계를 떠나게 된 게 저렇게나 좋을까. 보란 듯 기대감을 드러내는 지안의 모습에 에버렛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 그녀의 의사를 되돌린다거나 뒤늦게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지켜보는 자일 뿐. 개입하는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뭔가를 시도하기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걸, 에버렛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동시에 에버렛은 생각했다. 북부의 수호신이 기어코 되돌아왔음에도 다시 사라지고야 마는 것은, 배신을 상쇄할 만한 희생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발적인 희생. 번번이 돌아서는 마음을 강력하게 붙잡을 속죄양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신의 마음을 사로잡겠는가?

하나 놀랍게도 이를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그 지원자는 제국의 황녀였다. 뒤늦게 이능을 발현한, 에다의 안배를 한 몸에 받은 테리온의 핏줄. 공교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