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토록 원했던 복수를 이루었고, 심지어 바라던 목표까지 목전에 와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떨지 않아도 되고, 후작가의 실리와 체면을 이유로 연회에 강제 참석할 일도 없다. 개처럼 얻어맞던 날들과도 작별했다. 그러니 행복해야 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황태자를 수단으로 이용해서인 걸까. 아니면 안전을 얻되 자유를 잃었기 때문일까.
하긴, 본래 계획은 카리나와 함께 제도의 외곽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불거져 나오는 문젯거리로 인해 떠날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대관식에 이어 능력자들의 불만이란 산을 넘기 무섭게 진짜 시해범을 찾아내란 황태후 폐하의 명이 있었고…… 와중에 알레인을 대신해 내년 황성의 예산도 배정해두어야 했다. 각 영지에서 올라오는 자잘한 보고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 해결하고 떠나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계속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생겨 자꾸 미루고 말았다. 정확히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쉰 이멜다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어색하게 매만지며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알레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해 이멜다.’
“성질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면서. 답지 않게 착해빠진 행세야.”
중얼거리며 이멜다는 희미하게 올라오는 죄책감을 내리눌렀다. 알레인이 독선적이고, 잘 흥분하며, 난폭한 성격이란 건 황성의 모두가 알았다. 그가 황성의 사용인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걸 목격한 횟수도 수십 번이 넘었다.
그런 사람이, 유독 자신의 앞에선 이빨 빠진 개새끼보다 더 비루하게 굴었다. 버리고 가기 힘들게.
* * *
썰매가 크게 흔들려 지안은 그대로 퉁 튀어 올라야 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몸을 실은 궤짝의 뚜껑에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혹이 날 만큼 세게 맞은 건 아니었다. 하도 자주 있던 일이라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런 일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지안은 아픈 머리를 매만지다 말고 품속의 작은 불덩어리를 끌어안았다. 축구공보단 작고 럭비공보다 조금 큰 불덩어리는, 늘 그랬듯이 따뜻한 물 정도의 온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짐작이지만 이 북부에서 삼황자 전하의 이능만큼 유용하고 편리한 건 없을 것이다.
짐짝과 다름없는 신세로 이동하고 있지만, 궤짝에 숨어 이동하는 건 썩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눈 내린 노면이 고르지 않아 자주 머리를 얻어맞았고, 하도 흔들리는 바람에 쿠션을 깔고도 엉덩이가 얼얼하지만…… 상관없다. 어디까지 온 건지.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궤짝의 뚜껑이 조금 열리고 틈새로 데워진 빵이 불쑥 내밀어졌다.
“먹어.”
지안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다시 뚜껑을 닫으며 일리아스가 말했다.
“내일 북부의 샤먼과 만날 거야. 이후에는 거기서 나와야 해. 알지? 썰매로 산을 오를 순 없어.”
알았다는 의미로 지안은 궤짝의 벽면을 통 하고 작게 두드렸다. 예는 한 번, 아니오는 두 번. 숨어서 이동하는 터라, 입을 열기보단 이런 수신호가 더 편리했다. 마침 입에 빵을 물고 있기도 했고.
“……그리고 이비엔이 보낸 전서구를 받았는데. 이틀 전에 공작이 미리 대기시켜둔 샤먼과 만났다는군. 먼저 얼음산에 가 있겠다고 연락이 왔어.”
뜻밖의 소식에 반가움과 반감이 번갈아 나타나 마음을 할퀴었다. 지안은 대답 대신 우물거리며 빵을 삼켰다. 일리아스 역시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잠시 멈춘 듯하던 썰매가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고물 버스에 탑승한 것보다 승차감이 더 엉망이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보단 황녀 전하가 북부의 샤먼과 함께 있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이 두 번 배신하지 말란 법 없잖은가.
만약, 황녀 전하가 샤먼을 죽인다면? 그래서 새로운 샤먼을 찾아 나서야 한다면?
상상만 해도 전신으로 소름이 돋아 지안은 숨죽여 기침했다. 막 삼킨 말랑한 빵조각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기침이 멎을 즈음, 샤먼이 차원 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황녀 전하가 아직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그래. 거기까진 전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눈치로 보아 삼황자 전하는 공작에게 전해 들어 아는 모양이지만, 그마저도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거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안은 천천히 숨을 죽였다. 차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황녀 전하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잘 알지만, 불쑥 치솟는 불안을 잠재우고 다스리는 게 무척 어려웠다.
그간 지구의 몇몇 가이드들이 에스퍼들간의 싸움에 왜 그렇게나 무기력해했는지, 왜 그냥 손을 놓아 버리고 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막상 겪어 보면, 가이드로서의 힘과 영향력만으론 역부족인 일이 너무 많다. 에스퍼들에게 강압적으로 굴고, 멋대로 부려먹기도 하던 지구의 가이드들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라고 자신의 에스퍼에게 일부러 심술 맞게 군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드센 성격으로나마 스스로를 포장해보려는 하나의 전략이자, 나름대로 자신을 지켜내려는 시도였던 거다. 상황의 주도성을 잃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던 거다.
뜻밖의 깨달음에 지안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이제 와 이런 해석을 한들 무슨 상관일까. 앞으로의 운명을 공작님과 삼황자의 손에 맡긴 채 썰매의 짐칸에 실려 가는 처지인데.
남은 거라곤 무수한 경험 끝에 얻은, 힘이 없으면 자신의 삶을 지킬 수도, 선택할 수도 없다는 진리뿐이다. 게다가 꿈꾸는 자유는 아직도 아주 먼 곳에, 저 멀리 다른 세상에 있었다.
“괜히 협회가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에 개입하는 게 아니었네….”
중얼거리며 지안은 흔들리는 궤짝 안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삼황자 전하의 등 뒤였다. 펑펑 쏟아지는 눈과 함께 얼음을 밟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게다가 잠깐 사이 파장 하나가 더 늘어 있었다.
‘누구지?’
머리에 푹 뒤집어씌운 로브를 슬쩍 걷어내자, 뜻밖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 안으로 굽이치는 금발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어났어?”
“황녀… 전하?”
“목소리가 말이 아니네. 감기에 걸린 건 아니지?”
지안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 파장이 감지된다 했더니, 황녀 전하였구나.
“……전 멀쩡해요.”
“너무 곤히 잠들어 있길래 난 네가 어디 아픈 줄 알았어. 그래도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다. 아. 그렇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이쪽은 북부의 샤먼인 에버렛 베스티. 너도 알다시피 차원을 넘는 통로를 만들어줄 거야.”
스스럼없는 말에 눈두덩이가 절로 파르르 떨렸다. 황녀 전하가 소개해 준 사람이 샤먼이란 것보단, 전하가 샤먼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게 더 경악스러웠다.
샤먼이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란 걸, 전하께선 대체 어떻게 아신 걸까. 삼황자 전하가 그새 알려 주기라도 한 걸까? 지안은 놀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이비엔이 끌어 온 사람을 응시했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 북부의 샤먼은 제도에서 봤던 사제들과 비슷한 복장을 한 노파였다. 눈이 마주치자 주름이 가득한 눈으로 생긋 웃어온다. 어딘가 어색한, 냉막한 인상과 부조화를 이루는 미소였다. 하지만 이어진 인사만큼은 몹시 자연스럽고 정중했다.
“겨울 신의 종이 인사 올립니다. 에버렛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는, 지안이에요.”
주저하며 말한 지안은 일리아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만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잠에서 깬 이상 계속 그에게 업혀 있을 순 없었다.
두 발로 얼음을 디딘 지안은 급경사의 가파른 험로를 흘긋 바라보며 이비엔에게 물었다.
“제가 오래 잤나요? 언제 합류하신 거예요?”
질문에 대답한 건 일리아스였다.
“대여섯 시간 전에 합류했어. 얼음산 초입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더군. 쯧. 오데르겐령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넌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냐 이비엔.”
“나도 공작의 영지에서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어. 하지만 이멜다가 보내온 추격대가 걱정되기도 하고. 마음이 급해져서 안 되겠더라고. 결과적으론 무사히 합류하게 됐으니 잘된 거잖아?”
지안은 잠자코 남매의 말을 주워들었다. 함께 떠나기보단 남아서 제국을 수호할 거라더니, 그새 마음이 바뀐 걸까? 하긴, 황녀 전하는 생존에 크게 연연했었다. 막판에 이멜다인가 하는 여자를 배신해 버려 입장이 크게 난처해진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떠나자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데, 발밑이 푹 꺼졌다. 휘청거린 지안의 손목을 붙잡아 준 건 에버렛이었다.
“아.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정말로 별일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인 에버렛은 으르렁거리는 이비엔과 일리아스의 사이에 끼어들며 지안을 황녀에게 떠밀었다.
“두 분. 쓸데없이 다투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분을 방치하시네요. 시간 낭비는 그쯤 하시는 게 어떤가요.”
따끔한 충고에 이비엔은 머쓱해진 얼굴로 지안을 부축했다. 고작해야 한 달쯤 헤어졌을 뿐인데 그사이 지안은 무척 가벼워져 있었다. 얼굴을 보고 야윈 걸 알긴 했지만, 이렇게나 허약해질 줄이야. 게다가 못 본 사이 부쩍 말수가 줄었다.
“전하. 저는…….”
무슨 말일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부축이고 뭐고 다 사양하려는 거겠지. 이비엔은 뒷말을 듣지도 않고 지안의 말을 끊었다.
“길이 가팔라. 잘못 넘어지면 저 아래까지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내가 돕게 해 줘. 잠깐이면 돼. 조금만 더 가면 신전이 나와.”
“…….”
“갑자기 내가 나타나서 놀랐지? 음. 그게 말야, 가능하면 제도에 남아서 닥쳐올 신탁에 좀 대응을 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게 협력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뭘 하든 이멜다가 방해할 게 뻔하기도 했고. 그리고 내가 권세가들이랑 그닥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거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어. 그랬는데 네가 해 준 말이 생각나더라.”
그렇게 된 거구나. 현실이 힘에 부쳐서. 그래서 도망치듯 북부로 온 건가.